번역의 탄생 - 한국어가 바로 서는 살아 있는 번역 강의
이희재 지음 / 교양인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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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다름아닌 화폐 단위 표기에 대한 저자의 견해입니다.

문제의 책을 서점에서 본 게 2009년이었는데, 펼치자 마자 경제를 수박 겉핥기로 배운 저조차도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 펼쳐지더군요.

"과거의 어떤 화폐단위도 현재 한국의 원화로 환산해서 표기하라!"

너무 어이가 없어서 사려는 생각을 접었던...


이게 왜 문제가 돼냐 하면 말이죠.

(1)정확한 환율 환산 자체가 의외로 매우 어렵습니다.

돈도 결국 가치를 표현하는 도구고, 그 가치는 자연적이고 내재적인 불변의 가치가 아니라 인간이 인위적으로 부여한 가치입니다.

똑같은 물건이라도 어느 시대에는 비싸게, 어느 시대에는 싸게 거래될 수 있습니다. 과거 유럽 역사의 튤립 파동이나, 요즘 부는 가상화폐 열풍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특히 화폐 가치 격변기(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 화폐 개혁, 경제 공황기)의 화폐 가치는 도대체 어떻게 계산할 겁니까?

1920년대 독일을 배경으로 한 영화 <악의 탄생>에서 히틀러가 그러더군요.

"요즘 빵 한 개 가격이 무려 50만 마르크요!"

이 50만 마르크, 원화로 얼마로 번역하죠? 숫자가 50만이나 붙은 거 보니 되게 비싼 금액 같기도 하고, 빵 한 개 가격이라니 몇 푼 안 되는 금액 같기도 하고.

게다가 환율은 끊임없이 요동칩니다. 우리나라도 1997년 IMF떄는 1달러에 2,000원 가까이 찍었습니다.

머지않은 과거에 유럽에서 화폐 개혁을 했는데, 그 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글도 이 주장대로라면 정말 옮기기 힘들겠군요.

"독일인 아이스너 씨는 은행에 200마르크를 내고 100유로를 환전받았다."가 "독일인 아이스너 씨는 은행에 14만 원을 내고 14만 원을 환전받았다."가 되어 버리니... OMG.


(2)화폐 단위도 그 화폐를 만든 사회의 역사고 문화입니다.

"1930년 미국 뉴욕시에 살던 마이클은 가판대에서 1달러를 내고 신문을 구입했다." 라는 문장은, 이 책의 주장대로라면 다음과 같이 고쳐져야 합니다.

"1930년 미국 뉴욕시에 살던 마이클은 가판대에서 1,200원을 내고 신문을 구입했다."

1930년대의 미국에서 원화가 통용되었나요? 아니잖아요! 왜 번역사를 거짓말쟁이로 만들려고 하시죠?


(3)원작자가 파 놓은 문학적 장치가 무력화될 수도 있습니다.

"제이미는 미키에게 비상금으로 100파운드 지폐 3장을 주었다." 같은 문장이 제시되고, 극중에서 미키가 어떤 상황을 만날 때마다 이 지폐를 한 장씩 꺼내 쓰면서 위기를 모면하는 내용의 작품이 있다고 할 때, 이 책의 주장대로라면 참 웃기게 됩니다.

"제이미는 미키에게 비상금으로 16만원 지폐 3장을 주었다... 어라라?"

한국 돈에는 16만원권도 없고, 16은 100처럼 십진법으로 딱 떨어지는 수도 아닙니다.

원작의 금액값 자체에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을 경우에는 더욱 안 되는 말이구요.


(4)번역사의 인건비는? 독자의 실익은?

이런 부분까지 다 따져가면서 과거의 화폐 단위를 원화로 제대로 바꾸려면 경제학 석사는 돼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번역사가 이런 것까지 시간 들여서 환산하면 번역료 더 나오나요? 독자는 현대 한국의 원화를 들고 있는 외국인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요?


물론 원문의 작성시점과 번역문의 작성시점 간의 시간적 격차가 적고, 번역문의 수명이 짧고 용도가 비교적 실용적일 경우에는 원 화폐 단위와 원화 환산치를 병기하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전혀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1960년대 버스 요금은 5원이었습니다. 60년이 지난 지금은 300배 늘은 1,500원(제가 사는 경기도 시내버스 성인 현금 요금 기준)입니다. 그리고 종이매체는 최대 100년을 갑니다. 환율이 100년 후 어떻게 변해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의 돈을 맘대로 번역 시점 당시의 원화 가치로 환산할 수 있습니까?


이 책을 보셨다는 분들 중에서 누구도 이런 부분을 문제삼지 않아서 장문의 글을 써보았습니다.

...뭐, 이렇게 적어도 악플(?)은 달릴 것 같지만. ㅋㅅ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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セ-ラ-萬年筆 魅せペンケ-スBOOK - 사이즈(약) 20×15×2.5cm
寶島社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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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비 좋긴 한데... 이거 재질 폴리우레탄입니다. 오래 쓰면 가수분해로 터질 위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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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유민주주의와 그 적들 정치학적 대화 2
노재봉 외 지음 / 북앤피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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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에서는 윤석열을 위한 교과서라고 말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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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재난 국가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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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이다. 서평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의무감도 느껴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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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를 격침하라 - 1941년 대서양 전투의 변곡점
앵거스 콘스텀 지음, 이승훈 옮김 / 일조각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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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사실상 멸종한 해군 무기체계가 있다. 바로 그 전까지만 해도 해전의 끝판왕이자 오늘날의 전략 탄도 미사일 잠수함과도 같은 국가 전략병기로까지 여겨지던 전함(戰艦)이다. 모든 포함 중에 가장 두터운 장갑과 가장 강력한 함포를 지닌 전함은 평시에는 포함 외교(라고 쓰고 <포함 협박>이라고 읽는다), 전시에는 함대 결전의 주역을 맡아 맹활약했다.

그러나 전간기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에는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한 항공모함은 해전에 제3차원을 부여하고, 함포의 사거리를 아득히 뛰어넘은 원거리까지 함재기를 이용해 무력과 정찰력을 투사하면서 전함의 자리를 위협할 잠재력을 보였다. 즉, 제공권 확보를 통해 제해권까지 확보되는 시대를 열 힘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게 다름아닌 제2차 세계대전이었고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제공권을 뺏긴 전함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940년 11월 타란토 공습에서 그랬고,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에서 그랬다. 서 있는 전함 뿐 아니라, 전투 행동 중이던 전함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일본의 야마토급이 완성되기 전, 명실 공히 세계 최대, 최강의 전함이었던 독일의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네임 쉽 비스마르크 역시 그랬다.

제2차 세계대전 개전 당시 나치 독일은 열강의 말석에 있었다. 다른 열강들에 비해 돈이 모자랐다. 이는 군비, 특히 돈이 많이 드는 해군의 군비에 치명적인 제약이었다. 그 결과 개전 당시 독일 해군은 사실상의 연안 해군 전력으로 강대한 대양 해군과 막대한 상선단을 지닌 연합군에 맞서야 했다. 개전 당시 독일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은 이러한 현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 해군에는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일만 남았다!”

그 말은 감히 개전 첫 해부터, 독일 해군의 귀중한 수상 전력 중 하나였던 순양전함 그라프 슈페의 자폭으로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 비스마르크 역시 빈약한 전력으로 영국 해군 전체에 맞서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세계 최대, 최강의 전함이었지만 북대서양의 제공권 및 제해권을 장악하고 훨씬 많은 머릿수를 보유한 영국 해군에게 사실상 단신으로 맞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던 것이다.

책의 서술은 그다지 친절하지는 못하다. 원래 전쟁이라는 현상 자체가 글로만 표현하기에는 그리 적절하지 않다. 지휘소마다 지도가 있는 것은 전쟁을 가장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상당한 시각적 자료가 필요한 비스마르크 추격전의 디테일을 너무 말로만 설명하려고 하고 있다. 설명의 밀도도 너무 높고, 강약 조절이 잘 되어 있지 않아 이해하려면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격침당한 지 무려 83년이 지나서야 나온 최초의 한글판 단행본이라는 가치는 부정할 수 없다. 본문에도 나왔듯이 이 사건에 대한 책이 해외에는 그야말로 천지삐까리인데 국내에는 이제야 처음으로 나오다니, 때늦은 감을 넘어 국내의 군사적 지성의 수준에 상당한 위기감마저 느껴진다. 번역 및 책의 만듦새 또한 훌륭해서 제2차 세계대전의 미국에 ‘공군’이 있었고, 장례식에서 해병대 ‘경호대’가 조총을 발사한다는 식의 황당한 표현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역자의 건승을 기원한다.

물론 이 책에도 번역 과정에서 생긴 옥의 티가 없지는 않다. 우선 도량형(임페리얼 스케일과 메트릭 스케일) 간의 환산 과정에서 버그가 많이 생겼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해군에는 구경 10.4cm 짜리 함포는 없었다. 800kg은 미톤으로도 불톤으로도 영톤으로도 0.75톤은 될 수 없다. 독일어 Dienst는 디엔스트가 아닌 딘스트로 표기해야 한다. 함재기가 함을 떠나는 것은 이함이 아니라 발함이다. 해군 내의 여러 병과가 동시에 참여한 작전은 합동 작전이 아니라 협동 작전이다. 원문의 오기였는지도 모르지만 타이타닉 호 잔해가 발견된 것은 본문과는 달리 1985년, 즉 비스마르크 잔해 발견 4년 전이었다. 그리고 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원문을 찾아보고 싶은 용어들도 약간 보였다(예: 행정원사).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번역에는 합격점을 주고 싶다. 번역에 이 책의 반만큼도 정성을 기울이지 않은 책들이 한국에는 넘쳐나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는 소장가치 높은 귀중한 책이었다. 앞으로도 역자가, 그리고 한국 출판계가 볼만한 군사 서적을 많이 만들어내기를 기원하며 리뷰를 마감한다.


PS: 전쟁에서 중립국은 절대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도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PPS: 이 책을 읽고 시각적 목마름이 있다면 극영화 <비스마르크를 격침하라>, 다큐멘터리 <비스마르크의 비밀>의 시청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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