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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간 공룡 콩콩동시 15
박영식 지음, 황유진 그림 / 소야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아이들은 거짓말을 잘 못한다.  

문자사용에 서투르기 때문에 생각을 오래 담아두지 못하고, 경험이 많지 않아서 즉시 떠오르는 생각을 옛경험과 연관시키지 못한채 생각을 있는 그대로 뱉어낸다. 
그래서 이성으로 판단하지 않고 생각이 곧바로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는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생각과 행동에 간극이 없는 <호메로스적 인간> 에 가깝다.  
그래서 아이들의 눈으로 본 세상은 이해타산이 없고 현실의 경계를 넘어선다. 

아이들은 주위 환경에 있는 사물을 보고 상상적 우화를 만들어낸다. 
 안타깝게도 요즘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접하는게 스마트폰, TV, PC 같은 전자기기들이다.

 그런 기기들은 엄청난 정보를 쏟아내 판단력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여 상상할 기회를 없애고 작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켜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 결과 아이들은 지식은 많아졌지만 상상력, 창의력, 배려심이 부족하고 쓸데없는 지식들로 가득찬 헛똑똑이가 되었다.  

박영식 시인의 《바다로 간 공룡》은 디지털 중독에 걸린 아이들에게 디지털 디톡스 주사 한 방을 처방하는 동시들로 가득차있다. 
이 시집의 소재들은 바다, 숲, 동물, 식물, 소나기 같은 자연친화적인 것들이고 스마트폰, 공부, 시험, 학교, 학원같은 요즘 아이들이 항상 접하는 소재와 환경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버리고 잊게 만들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미니멀 라이프> 를 만들어 준다. 

자연을 접할 기회가 없어진 아이들이 자연을 접했을때 일어남직한 동심의 상상력과 성인이 된 시인이 아이로 돌아가서 그때의 자신에게 들려주고픈 순수한 내면이 교차되어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 공간에는 자연, 향토적 정서, 가족들의 유대감, 유적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 공간의 동물, 식물은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닌 인간과 대등하게 행동하며 공존하는 능동적 존재다.


비 오는 날> 에서 거미줄은 우주로부터 오는 일기예보 신호를 잡는 레이다망이 되고 달팽이는 더듬이를 바짝 세우며 공습경보를 전하고 청개구리는 사이렌을 울리며 다가오는 물난리를 대비하는 조화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언뜻 보면 동물들간에 개연성이 없어 보이지만 생태계의 작은 구성원들이 각자의 역할을 다하며 큰 위기를 넘기는 모습에서 인간사회에서도 아무리 왜소하고 보잘것 없어 보여도 '쓸모없는 인간은 없다' 는 교훈을 남긴다. 
그러면서 요즘 학교마다 만연해있는 왕따문화가 없어지길 원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 


거인의 자장면> 은 흥미로운 상상으로 가득한 시다. 깜깜한 밤하늘에 떠있는 반달은 노란 단무지 색깔과 비슷하다. 
단무지하면 생각나는게 자장면 아닌가! 
아이는 지금 눈에 보이는 재료로 머릿속에서 자장면을 제조하기 시작한다. 
까만 밤하늘을 끓여 장장을 만들고 전깃줄로 면발을 뽑고 전봇대는 젓가락으로 사용한다. 
물리적 시공간을 초월하여 우주천체와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 이차원 평면에 놓이는 순간, 아이의 눈에는 이런 것들이 자장면을 만드는 재료들로 둔갑한다.
 자장면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기에 눈에 보이는 도처에는 자장면 외에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 재료들이 즐비하다. 


산골분교> 는 시험보고 경쟁하는 학교가 아니라 자연학습장을 연상케 하는 작은 분교가 등장한다. 
교문 앞에는 학생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매의 눈으로 관찰하는 학생주임이 아니라 물까치가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맑은 목소리로 아침인사를 한다. 
70, 80년대 시절 각 교실마다 있었던 추억의 악기 풍금은 솔바람의 조율로 정겨운 소리를 낸다.
 줄무늬가 빽빽한 유선노트대신 나뭇잎 책장을 넘기며 초록바람과 신나는 자연공부를 한다. 
다람쥐가 나뭇가지를 붙잡고 쫑긋쫑긋 몸을 세우는 모습은 학창시절 다른 반 아이들이 복도를 지나면서 창문을 까치발하며 교실안을 살짝 들여다 보는 것처럼 귀엽다. 
이런 자연친화적인 학습공간은 요즘 점점 폐교가 늘어나는 현대 사회에서 아득한 추억을 선물한다
 

할머니의 재봉틀> 은 누구나 어린 시절 갖고있는 할머니에 대한 향수를 떠오르게 한다. 
손주들에겐 무조건 퍼주시기만 하던 할머니는 대개 손주들이 나중에 성인이 됐을때 그 시절의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구시대적인 매개체가 있다. 
그중 하나가 검은색 고물 재봉틀이다. 
지금의 세련되고 성능좋은 재봉틀과는 비교도 안되게 칠도 벗겨지고 빽빽 소리를 내서 기름칠을 해야 되지만 추운 겨울 손주들에게 따뜻한 옷한벌 지어 주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다. 
손자는 재봉틀이 옷감을 두줄로 박음질하는 장면을 보며 기차길이 만들어 지는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죽음은 대부분의 손주들이 겪어야할 슬픈 통과의례다. 
손주는 할머니 그리운 마음을 재봉틀에 담아 여전히 할머니의 손에 의해 기차길을 만들고 싶은 고물 재봉틀을 거실 한구석에 두며 버리지 못한다.  

가족들간의 따뜻한 유대감을 사물로 형상화한 시중에 또 <가로수 아저씨> 가 있다. 
가로수가 일년 365일 꿋꿋하게 한 자리를 지키며 서있는 모습은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고, 달밤에 가로수 사이로 보이는 둥근 달은 환한 등을 내다건것 같다. 
아이에게 가로수는 엄마를 향한 아이의 마음을 형상화시켜 보여주는 매개체다. 
아이는 밤늦게 시장에서 돌아오는 엄마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어 문밖에 서서 엄마가 먼발치에서 걸어오는 모습을 확인하고자 한다. 
드디어 엄마가 보이자 아이의 입가엔 둥그런 달처럼 환한 미소가 감돈다. 
엄마는 언제 봐도 반갑고 친근한 존재다. 
자기를 기다리며 대문 밖에 서있는 아이를 본 순간 시장에서 종일 일했던 고단한 하루는 아이의 미소와 함께 감사하는 날이 된다. 


송편> 은 지금은 없어진 명절문화를 회상하고 있다.
요즘은 송편을 사서 먹지만 40~50 년전 시골에선 추석때마다 가족이 둘러앉아 쌀가루로 송편을 빚으며 소원을 빌고 시루 위에 솔잎을 깔아 아궁이로 구워냈다. 
시인은 백자 모양의 송편이 아궁이에서 구워지면서 하얀 반달 모양이 되는걸 보고 달이 웃는것 같다고 생각했다. 
요즘 애들은 할수 없는 경험이기에 '성숙을 겸비한 영원한 어린아이'가 된 시인은 송편빚기에 임할 때의 진지함을 되찾으려 하면서 성숙된 자아를 다지고 있다  

박영식 시인의 특징중 하나가 반구대 암각화, 토기, 백자, 청자 등 문화재에 관심이 많다는 거다. 


민속박물관 견학> 에서는 사라진 옛문화를 현재로 소환해내 살아있는 모습으로 재현하여 아이들에게 보여준다. 
물레, 흰 사기등잔, 참종이 문.... 
요즘 세상에선 비효율적 가치가 되어 사라진 물건들이 역사가 되어 재탄생할때 단순하고 하찮아 보이는 이것들이 당시엔 최상의 물건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오리모양토기> 에서 천년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오리모양토기들이 발굴되어 문화재 감식원들의 검사를 받고 박물관에 보관되듯 내가 지금 쓰던 물건도 잘 간직하면 천년뒤 살아있는 역사가 될수 있다. 골동품닮은 선생님의 말씀처럼....  

가족들의 외모와 성격을 조금씩 물려받아 탄생한 <백자 달항아리>는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귀여워 사람들의 손때묻지 않게 먼 하늘에 박아두고 영원히 볼수있게 해놓았다. 

<고려청자>는 독야청청한 고려인의 마음을 노래했다. 솔가지와 학은 맑은 심성으로 오래 살고픈 소망을 나타내고 우주와 산은 변하지 않는 인고의 가치를 대변한다. 동동 뜬 흰구름은 천년전 물소리를 동반자처럼 데리고 다니며 고려인은 이 물소리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림일기 형식으로 된 <반구대 암각화> 는 울산에 있는 석기시대의 유적으로 동물, 사람의 모습을 바위 위에 새겨놓은 것이다. 
시인은 그 유적을 보고 그당시 원시인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하루를 그려보았다. 
남자들은 숫돌을 갈아 사냥무기를 만들어 요즘 현대인들 회사에 출근하듯 아침마다 움막집을 빠져나와 산으로, 바다로 사냥을 나간다. 
해질 무렵 퇴근한 남자들은 어깨와 손엔 칡범, 뿔사슴, 멧돼지, 참고래가 들려있다. 
그들은 살생에 대한 죄책감을 용서받기 위해 산신령, 바다용왕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동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바위벽에 그들의 모습을 새겨 놓는다.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조각들에는 그래서인지 사냥의 풍요를 비는 원시인들의 마음과 주술과 제의를 받고 부활한 동물들의 쩌렁쩌렁한 기상이 산과 동해바다를 뒤덮는다.

이처럼 자연, 유물, 사랑같이 변하지 않는 가치들로 행복을 추구할때 우리마음은 지금 당장 행복을 느낄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머리가 커질수록 미래의 안락함을 위하여 현재의 행복을 유보하려 하고 돈, 명예, 물질, 사람들의 인정같이 가변적인 것들을 추구하며 살게 된다.

그러다보면 순간순간의 소확행을 누리다가도 그때는 의식을 못하다가 그것을 되돌아 볼 때에만 갑자기 놀라면서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다.

《바다로 간 공룡》은 아이들에게 변하지 않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면서 순간의 행복을 느끼도록 도와줄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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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간 공룡 콩콩동시 15
박영식 지음, 황유진 그림 / 소야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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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식 시인의 《바다로 간 공룡》은 디지털 중독에 걸린 아이들에게 디지털 디톡스 주사 한 방을 처방하는 동시들로 가득차있다.�
이 시집의 소재들은 바다, 숲, 동물, 식물, 소나기 같은 자연친화적인 것들이고 스마트폰, 공부, 시험, 학교, 학원같은 요즘아이들이 항상 접하는 소재는 등장 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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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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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지 마라. 곧 밤에 오리라.
그러면 창백한 산과 들 위에
살포시 웃음짓는 차가운 달을 보리라.
그리고 서로 손을 잡고 쉬게 되리라.

서러워하지 마라.
곧 우리가 잠이 들 시간이 오리라.
그리고 두 개의 우리들의 십자가가
밝은 한 길가에 나란히 서게 되리라.
그리고 비가 오고 눈이 날리며
바람이 불어와 스치고 가리라.


-헤르만 헤세의 시<크눌프의 추억>에서


이 책을 처음 접한건 중학교 2학년때 데미안을 읽고 감동받은후 헤르만 헤세에 관심이 갈 무렵이었다. 비교적 짧고 쉬운 문체로 되어 있어 먼저 손이 갔던 것 같다. 그 때는 그냥 줄거리만 파악하고 별 감동없이 지나쳤는데 대학졸업후 다시 읽으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그만 쉴새없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크눌프의 자유롭고 방랑자적인 삶이 신의 이름으로, 신의 분신으로 행해졌다는게 가슴을 벅차고 설레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달리 만들어질 수 없었던 크눌프의 삶....그렇다면 나의 삶은 왜 이렇게 되었는지 해답이 나온 셈이었고 긍정하도록 만드는 필연성을 찾은 셈이었다.

크눌프는 열세살 때 짝사랑하던 프란치스카에게 배신당한 이후 사람에 대한 신용을 잃어버리고 외롭고 자유로운 방랑의 길을 살게 된다. 그는 타고난 아름다운 외모와 유쾌한 성품으로 주위에 맑은 웃음을 주고 자유로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비록 피혁공 친구 에밀 로트프스의 집에 머물때는 그의 부인의 은밀한 유혹작전으로 혐오감을 느낀 적도 있으나 베르벨레라는 아름다운 처녀와의 하룻밤 데이트는 그 곳 생활도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채색하기에 충분했다.

그가 친구와 여행하면서 했던 말 "가장 아름다운 것은 기쁨을 주는 동시에 또한 슬픔과 불안을 준다"는 덧없는(ephemeral)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아가씨라도 늙고 추해지기 마련이며, 예쁜 꽃도 철이 지나면 시들기 마련이다.
캄캄한 밤에 공중으로 올라가는 초록색의 불꽃은 가장 아름다워질 무렵에 작은 호선을 그리며 꺼진다

그것들이 영원히 아름다움을 지속한다면 우린 처음엔 보고 감탄할는지 모르겠지만, 점점 냉정하게 보게되며 늘 있는 것에 대해 흥미를 잃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짧은 아름다움을 보는 순간 순간적인 운명과 퇴색되어갈 아름다움을 예감하고 기쁨과 불안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다.
어린 왕자에게 장미가 그토록 소중했던 이유도 곧 사라질 위험에 처해진 '일시저' 존재였기 때문이다. (Ephemeral means which is threatened by imminent disappearance)

그렇다. 크눌프의 삶은 짧지만 아름다웠다. 40이 넘어갈 무렵 건강에 이상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고향을 보기 위해 게르베르사우로 향했다. 거기서 라틴어학교 친구였던 의사 마홀드를 만났다.
그는 마홀드에게 열세 살 때 잘 다니던 라틴어학교를 그만두고 초급학교로 옮긴게 프란치스카 때문이었음을 고백하고 그 후 외로운 방랑생활을 하게된 계기가 되었다고 밝힌다.

사람이나 꽃같은 외형적 존재뿐 아니라 사랑, 우정 같은 감정도 영원히 계속되지 않고 변할 수 있음을 이미 열세 살에 깨달은 것이다.

그 후 다시는 사람의 말을 신용하지 않고 되는 대로 살았기에 자유롭고 아름답게 살았지만 항상 외로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죽기전 마지막으로 고향에 내려갔을 때도 모든 것이 낯설고 자기를 미워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친구가 마련해준 병원입원자리도 뿌리치고 마지막을 준비하러 숲길로 향하게 된다.

눈 덮인 숲길에서 신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삶이 무의미해진 이유가 프란치스카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이라고 호소한다.
그러자 신은 그가 무도장의 왕으로 지냈던 일과 노래도 잘 하고 하모니카도 잘 불어 처녀들의 눈을 황홀케 했던 기억을 회상시키면서 꿀과 포도주같이 강렬하고 달콤하며 이른 봄바람처럼 훈훈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가 공장장이 되어 처자를 거느리고 저녁에 주간신문을 읽는 신세가 되지 못했음을 한탄할 때도 여우와 숲에서 자며, 새장이나 놓고 , 뱀을 길들이던 그의 삶이 도처에서 익살, 감사, 사랑을 받기 위해서였음을 일깨워준다.

그가 웃음거리가 되었을때 그 안에 있던 신도 똑같이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는 신의 아들, 동생, 분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생은 신의 의지가 반영된 삶이었기에 무의미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면서 생을 마감할수 있다는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나는 그만 크눌프의 마음에 동화돼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고 말았다.
아름다운 자연과 내면성찰, 잊었던 고향에 대한 향수, 인간의 애정과 자유, 일시적 삶의 의미가 한꺼번에 다가와 팔에 무겁게 쌓인 눈을 털지 못하고 잠들어가는 크눌프의 어깨를 지나 내 영혼까지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비록 프란체스카나 다른 친구들과의 사랑과 우정은 불완전한, 기쁨과 슬픔의 사랑이었지만 신의 사랑은 영원하고 완전하다. 지나간 나의 삶을 긍정할 수 있을 때의 기쁨이란...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고마운 작가이다. 

실연의 상처를 입은 크눌프는 인생의 방관자가 되어 유랑생활을 한다. 가는 곳마다 아이들에게는 노래를 들려주고 어른들에게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그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는 비록 바보 취급을 받지만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숙식을 제공받는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폐병을 앓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병원에 입원시키지만 자유와 자연을 사랑하는 그는 병원을 뛰쳐나와 눈 덮인 산길을 헤매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몽롱한 가운데서 지친 다리를 이끌며 그는 신에게 "나는 일생을 잘못 걸었다."고 뉘우친다. 그러자 신은 "정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에 대한 향수를 전해주는 역할을 다했다"고 칭찬을 하면서 "너는 나의 아들이요 나의 몸의 일부이다"라고 답한다.

크눌프는 신의 음성을 듣고 자기의 생과 화해를 하고 손발 위에 눈이 쌓이는 것을 느끼면서 만족한 표정으로 눈을 감는다.


소설 『크눌프』는 헤세가 영향을 받은 독일 낭만주의 작가인 아이헨도르프 Eichendorf의 단편인 『무능력자의 생활에 Aus dem Leben eines Taugenichts, 1826』와 비슷한 점이 있다.

『크눌프』의 주인공 크눌프는 유랑자이며, 온당한 노동자 혹은 직업인으로서 규정된 질서에는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크눌프는 어린애 같은 마음을 지닌 꿈꾸는 자로서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유희와 만족을 주는 유쾌한 일면을 지니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독하고 고향 없는 한 인간인 제 2의 크눌프로서 언제나 떠돌아다니면서 어느 곳에서도 발을 붙이지 않고 생활한다.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그의 자유생활은 평민적인 행복과 가족 그리고 가장생활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어야만 했다.

이러한 사실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실제 이상으로 암시되는 것이고, 이 상쾌하고 장중하지 않은 이야기에서도 예술가 기질의 문제성이 다뤄지고 있다.
즉 성과를 기대하는 생산적인 효용의 세계와 표면상으로는 비효용적이고 목적성이 결여된 것 같아 보이는 작가와 예술가의 세계 사이의 긴장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 비판적인 측면이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능력자이며 방랑자인 크눌프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기 고향의 수풀 속을 헤매면서 피곤에 지친 상태로 쌓여가는 눈더미 속에 파묻히는데 그런 그에게 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라! 나는 네가 지금 있는 상태를 그대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너는 나의 이름으로 방황하면서 정착된 사람들에게 언제나 조금이라나마 새롭게 자유를 갈망하게 하는 향수를 불어넣어 주었다.
나의 이름으로 너는 바보짓을 했으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조소하게 했다.
너를 통해 나는 조소당했고 너를 통해 나는 또한 사랑받고 있다. 너는 나의 친구이며 너는 내 몸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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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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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우울증때문에 지쳐가고있을때 학교상담실의 권유로 정신과 상담을 받은적이 있었다.

모교출신 의사이자 그후 병원장도 했던 그 여자는 그떄 별거 아닌걸로 불렀다면서 온갖 욕설, 악담, 저주, 비난을 두시간동안 쏟아부은후 혼자 고치라며 먼저 나가버렸다.

그후 나의 우울증과 열등감은 더욱 심해져서 몇년동안 극도의 대인공포와 신경쇠약을 겪어야했다.

내편을 들어줄 사람은 없을거라고 생각했기에...

한참 세월이 지난후 유쾌 상쾌 발랄한 이라부의 치료과정을 보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말았다.

내가 그때 이라부같은 사람한테 치료를 받았다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하면서...중년의 나이에 엄마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마마보이,늘어진 턱살과 뱃살, 벗겨진 이마, 얼굴에 흐르는 개기름, 손으로 쓸어내릴때마다 우수수 쏟아지는 비듬, 무리하게 짧은 다리를 꼬아대거나 코를 후비는 행동은 ’정신과의사’라는 권위적이고 딱딱한 지위가 주는 거부감을 없애 환자와 의사와의 거리를 제로로 만든다. 

 

남들이 보기에 사소한 문제가 다른이에겐 치명적인 결함이 될수있지만 자신에게 닥치지 않은 이상 이해하지 못한다. 그 사소한 문제는 무의식의 세계에 기반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그 깊고긴 무의식의 심연에 뛰어들 용기와 배짱이 없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니 태아일떄 혹인 선조대대로 내려오는 태고적부터 삶의 궤적을 무의식속에 층층이 간직하며 개인의 역사를 그려간다. 현재 나에게 보여지는 신경증의 표출은 땅속에 엃혀있는 포도넝쿨처럼 무의식의 세계에서 잘못 뿌리내린 하나가 삶의 흐름에 제동을 걸면서 왜곡된 형태로 의식에 표출된 결과다.

따라서 신경증을 치료하기 위해선 백지와 같은 하얀 옷을 걸치고 무의식에 세계로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

때론 생각하고싶지 않은 고통스런 작업일수있으나 곪아터진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선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지 않을수없다.

 

이라부는 그 작업을 진행시키기 위해 철저히 자신의 옷을 벗어던지고 환자와 같은 처지로 내려와 어린아이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욕구그대로 행동한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하고 무의식 세계의 허상을 뒤쫓고 있을때 이라부는 과감히 그의 행동에 반기를 들고 정곡을 찌르고 무의식세계로의 여행을 감행한다.

마치 그는 환자의 증세를 미리 알고있는 것처럼 행동하여 하늘이 보낸 천사가 이닐까하는 신비감마저 풍긴다.

 아내의 부정으로 이혼당해 지속발기증세를 보이는 회사원앞에선 바람피운 전부인과 물건던지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결과 점잖은 식품회사주임의 신분으로 분출하지 못했던 동물적인 분노와 욕구를 자신을 실험대상으로 여기며 수치심과 모욕감을 안겨준 의사에게 여과없이 표출시킨다.

 스토커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모델(일종의 공주병)앞에선 불가능한 용모를 가지고 액션배우 오디션에 응모하여 ’세상에 어쩜 저렇게 행복한 사람이 다 있담’하는 부러움을 선사한다.

 

운동중독에 걸린 카즈오와 같이 수영을 하면서 아예 다섯시간 내내 수영하고 싶다면서 한밤중에 숨어들어 공구로 유리창을 부수는 행동은 어떻고...

 

중학시절 왕따의 아픔을 겪은후 관계에서 소외당하지 않기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 휴대폰 증독에 걸린 고등학생 앞에서 이라부는 당당하고 태연하게 자신은 친구가 없다고 인정한다.  

 

한술더떠 마유미는 이상형을 묻자

"친구없는 놈. 떼거리로 노는거, 나 안좋아하거든."라고 대답한다.

어차피 인생의 절반은 혼자있는 시간이다.

혼자있는 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두려워하면 같이 있는 시간도 즐기지 못한다.

환자의 증세와 똑같은 아니 더한 행동을 함으로써 편하게 사는 방식을 보여줌과 동시에 무의식의 세계로 통하는 통로는 보여준게 아닐까. 

 

지금도 이라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 너만 못난게 아니야..나도 너의 결점을 가지고 있어...자, 보이지?...어차피 잘나봤자 다 거기서 가기야...

 

이번 기회에 나의 왜곡되고 억압된 감정과 이상증후를 느끼며 퀴퀴한 이라부의 지하세계로 걸어가 육체파 간호사의 비타민 주사 한방 맞고 이라부의 특급처방을 받고싶다.

그리고 젊은 시절 내내 자괴감과 모멸감을 느끼게 하며 욕설과 악담을 선사해준 그 정신과 의사를( 그 여잔 날 기억조차 못하겠지만) 용서할 아량을 갖게될지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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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한 자살 여행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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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아이러닉하 게도 가장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아르토 파실린나의 재치가 돋보인다.
 
사업에 실패하고 아내한테 버림받은 50대 사장이 역시 군대에서 쫓겨나다시피한 대령과 자살클럽을 만들어 자살자들을 모집하는데 생각보다 꽤 많은 500여명의 신청서를 받는다.
 
그들중에 추리고 추려 값비싼 버스 하나를 구입해 유럽 곳곳을 여행하면서 마지막에 절벽에서 바다로 돌진하려 하지만 승객들이 모두 차 밖에 있을때 단 한 사람만이 운전 미숙으로 차를 몰고 뛰어든다.
 
승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바다에 뛰어든 그도 목숨을 건진다.
또한 자살자 모임가운데 여러 커플이 탄생하고 각자 자기 삶을 찾아열심히 살게된다

 

결론은 역시 이 세상은 아름답다, 세상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교훈적인 주제이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데서 조금 위안을 얻는다.  
이 책의 작가가 생소한 핀란드 사람이고 본국에서 큰 호응을 얻은걸 보면 드러내진 못하지만 자살이라는 주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이슈로 자리잡는것 같다.
 
물론 자살이 나쁘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자살을 생각하는것 자체는 나쁘지 않는것 같다.
어차피 사람은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지 않은가.
 
자살이 궁극적 안정상태 즉 최초의 유기체 상태로 환원하려는 본능이라는 주장까지 있는걸 보면
죽음은 피하고 싶지만 반드시 거쳐야하는 과정이기에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는 심정으로 미리 앞당길수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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