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눌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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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지 마라. 곧 밤에 오리라.
그러면 창백한 산과 들 위에
살포시 웃음짓는 차가운 달을 보리라.
그리고 서로 손을 잡고 쉬게 되리라.

서러워하지 마라.
곧 우리가 잠이 들 시간이 오리라.
그리고 두 개의 우리들의 십자가가
밝은 한 길가에 나란히 서게 되리라.
그리고 비가 오고 눈이 날리며
바람이 불어와 스치고 가리라.


-헤르만 헤세의 시<크눌프의 추억>에서


이 책을 처음 접한건 중학교 2학년때 데미안을 읽고 감동받은후 헤르만 헤세에 관심이 갈 무렵이었다. 비교적 짧고 쉬운 문체로 되어 있어 먼저 손이 갔던 것 같다. 그 때는 그냥 줄거리만 파악하고 별 감동없이 지나쳤는데 대학졸업후 다시 읽으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그만 쉴새없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크눌프의 자유롭고 방랑자적인 삶이 신의 이름으로, 신의 분신으로 행해졌다는게 가슴을 벅차고 설레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달리 만들어질 수 없었던 크눌프의 삶....그렇다면 나의 삶은 왜 이렇게 되었는지 해답이 나온 셈이었고 긍정하도록 만드는 필연성을 찾은 셈이었다.

크눌프는 열세살 때 짝사랑하던 프란치스카에게 배신당한 이후 사람에 대한 신용을 잃어버리고 외롭고 자유로운 방랑의 길을 살게 된다. 그는 타고난 아름다운 외모와 유쾌한 성품으로 주위에 맑은 웃음을 주고 자유로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비록 피혁공 친구 에밀 로트프스의 집에 머물때는 그의 부인의 은밀한 유혹작전으로 혐오감을 느낀 적도 있으나 베르벨레라는 아름다운 처녀와의 하룻밤 데이트는 그 곳 생활도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채색하기에 충분했다.

그가 친구와 여행하면서 했던 말 "가장 아름다운 것은 기쁨을 주는 동시에 또한 슬픔과 불안을 준다"는 덧없는(ephemeral)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아가씨라도 늙고 추해지기 마련이며, 예쁜 꽃도 철이 지나면 시들기 마련이다.
캄캄한 밤에 공중으로 올라가는 초록색의 불꽃은 가장 아름다워질 무렵에 작은 호선을 그리며 꺼진다

그것들이 영원히 아름다움을 지속한다면 우린 처음엔 보고 감탄할는지 모르겠지만, 점점 냉정하게 보게되며 늘 있는 것에 대해 흥미를 잃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짧은 아름다움을 보는 순간 순간적인 운명과 퇴색되어갈 아름다움을 예감하고 기쁨과 불안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다.
어린 왕자에게 장미가 그토록 소중했던 이유도 곧 사라질 위험에 처해진 '일시저' 존재였기 때문이다. (Ephemeral means which is threatened by imminent disappearance)

그렇다. 크눌프의 삶은 짧지만 아름다웠다. 40이 넘어갈 무렵 건강에 이상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고향을 보기 위해 게르베르사우로 향했다. 거기서 라틴어학교 친구였던 의사 마홀드를 만났다.
그는 마홀드에게 열세 살 때 잘 다니던 라틴어학교를 그만두고 초급학교로 옮긴게 프란치스카 때문이었음을 고백하고 그 후 외로운 방랑생활을 하게된 계기가 되었다고 밝힌다.

사람이나 꽃같은 외형적 존재뿐 아니라 사랑, 우정 같은 감정도 영원히 계속되지 않고 변할 수 있음을 이미 열세 살에 깨달은 것이다.

그 후 다시는 사람의 말을 신용하지 않고 되는 대로 살았기에 자유롭고 아름답게 살았지만 항상 외로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죽기전 마지막으로 고향에 내려갔을 때도 모든 것이 낯설고 자기를 미워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친구가 마련해준 병원입원자리도 뿌리치고 마지막을 준비하러 숲길로 향하게 된다.

눈 덮인 숲길에서 신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삶이 무의미해진 이유가 프란치스카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이라고 호소한다.
그러자 신은 그가 무도장의 왕으로 지냈던 일과 노래도 잘 하고 하모니카도 잘 불어 처녀들의 눈을 황홀케 했던 기억을 회상시키면서 꿀과 포도주같이 강렬하고 달콤하며 이른 봄바람처럼 훈훈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가 공장장이 되어 처자를 거느리고 저녁에 주간신문을 읽는 신세가 되지 못했음을 한탄할 때도 여우와 숲에서 자며, 새장이나 놓고 , 뱀을 길들이던 그의 삶이 도처에서 익살, 감사, 사랑을 받기 위해서였음을 일깨워준다.

그가 웃음거리가 되었을때 그 안에 있던 신도 똑같이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는 신의 아들, 동생, 분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생은 신의 의지가 반영된 삶이었기에 무의미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삶을 긍정하면서 생을 마감할수 있다는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나는 그만 크눌프의 마음에 동화돼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고 말았다.
아름다운 자연과 내면성찰, 잊었던 고향에 대한 향수, 인간의 애정과 자유, 일시적 삶의 의미가 한꺼번에 다가와 팔에 무겁게 쌓인 눈을 털지 못하고 잠들어가는 크눌프의 어깨를 지나 내 영혼까지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비록 프란체스카나 다른 친구들과의 사랑과 우정은 불완전한, 기쁨과 슬픔의 사랑이었지만 신의 사랑은 영원하고 완전하다. 지나간 나의 삶을 긍정할 수 있을 때의 기쁨이란...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고마운 작가이다. 

실연의 상처를 입은 크눌프는 인생의 방관자가 되어 유랑생활을 한다. 가는 곳마다 아이들에게는 노래를 들려주고 어른들에게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그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는 비록 바보 취급을 받지만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숙식을 제공받는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폐병을 앓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병원에 입원시키지만 자유와 자연을 사랑하는 그는 병원을 뛰쳐나와 눈 덮인 산길을 헤매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몽롱한 가운데서 지친 다리를 이끌며 그는 신에게 "나는 일생을 잘못 걸었다."고 뉘우친다. 그러자 신은 "정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에 대한 향수를 전해주는 역할을 다했다"고 칭찬을 하면서 "너는 나의 아들이요 나의 몸의 일부이다"라고 답한다.

크눌프는 신의 음성을 듣고 자기의 생과 화해를 하고 손발 위에 눈이 쌓이는 것을 느끼면서 만족한 표정으로 눈을 감는다.


소설 『크눌프』는 헤세가 영향을 받은 독일 낭만주의 작가인 아이헨도르프 Eichendorf의 단편인 『무능력자의 생활에 Aus dem Leben eines Taugenichts, 1826』와 비슷한 점이 있다.

『크눌프』의 주인공 크눌프는 유랑자이며, 온당한 노동자 혹은 직업인으로서 규정된 질서에는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크눌프는 어린애 같은 마음을 지닌 꿈꾸는 자로서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유희와 만족을 주는 유쾌한 일면을 지니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독하고 고향 없는 한 인간인 제 2의 크눌프로서 언제나 떠돌아다니면서 어느 곳에서도 발을 붙이지 않고 생활한다.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그의 자유생활은 평민적인 행복과 가족 그리고 가장생활을 포기하는 대가를 치르어야만 했다.

이러한 사실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실제 이상으로 암시되는 것이고, 이 상쾌하고 장중하지 않은 이야기에서도 예술가 기질의 문제성이 다뤄지고 있다.
즉 성과를 기대하는 생산적인 효용의 세계와 표면상으로는 비효용적이고 목적성이 결여된 것 같아 보이는 작가와 예술가의 세계 사이의 긴장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 비판적인 측면이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능력자이며 방랑자인 크눌프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기 고향의 수풀 속을 헤매면서 피곤에 지친 상태로 쌓여가는 눈더미 속에 파묻히는데 그런 그에게 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라! 나는 네가 지금 있는 상태를 그대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너는 나의 이름으로 방황하면서 정착된 사람들에게 언제나 조금이라나마 새롭게 자유를 갈망하게 하는 향수를 불어넣어 주었다.
나의 이름으로 너는 바보짓을 했으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조소하게 했다.
너를 통해 나는 조소당했고 너를 통해 나는 또한 사랑받고 있다. 너는 나의 친구이며 너는 내 몸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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