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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줄다리기 - 언어 속 숨은 이데올로기 톺아보기
신지영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뜻을 알고 나면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은 단어가 있다. 내가 '미망인'이라는 단어의 뜻이 '아직 죽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겨우 1년 전이다. '과부보다는 미망인이라는 표현이 낫지 않나...?'라고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던 내게 너무 큰 충격이었다. 그렇게 폭력적이고 비인격적인 단어가 과연 미망인뿐일까? 언어가 바뀌면 사회도 바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부터 차별적이고 비민주적인 단어 사용을 지양하고 싶어서 읽어보았다.
이 책은 약 300쪽의 분량으로, 대통령 '각하'라는 호칭과 '대통령'이라는 단어 자체에 담긴 뜻과 미혼/기혼/비혼의 차이, 미망인과 여교사 등 인간의 기본값을 남성으로 제한시켜버리는 단어들, (60년 전부터 이어져온) 신조어와 비속어를 둘러싼 갈등, 외래어와 심지어 북한 말의 표기법까지 정말 넓게 다룬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은 여섯 번째 경기장인 [여교사와 여성 교사의 줄다리기]와 여덟 번째 경기장인 ['요즘 애들'과 '요즘 어른들'의 줄다리기]였다. 여섯 번째 경기장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글쓴이도 언급했듯이 지금은 4~50년 전에 비하면 차별적인 단어 사용이 많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교사, 여검사 등의 표현은 하루에도 몇 번씩 보이기 때문이다. 그중에 굳이 여성임을 명시해야 하는 경우는 얼마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나에게는 가장 와닿는 줄다리기였다.
여덟 번째 경기장은 잠시 쉬어가라는 듯이 신조어와 비속어, 은어를 둘러싼 갈등을 재치있게 풀어냈다. 글쓴이는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라는, 굳이 따지자면 기득권에 속하는 직업인데도 '60년 동안 줄곧 '요즘 애들'을 탓하는 '요즘 어른들'', '요즘 어른들의 주장대로라면 한국어는 현재 최악의 언어' 등의 소제목으로 촌철살인을 보여줘서 굉장히 인상 깊었다.
'언어 속 숨은 이데올로기 톺아보기'라는 부제답게 단어의 사전적 뜻 자체보다는 그 단어의 발생 배경, 단어가 전제로 하고 있는 이데올로기, 집단 간의 관점 차이 등을 설명하는 데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는데, 중간중간 신문 기사 스크랩이나 통계 자료를 굉장히 많이 삽입하여 객관적인 수치를 충분히 제시한다. 지루하지 않게 금방 읽히고, 자료 조사에 정말 오랜 시간을 들인 책이라는 게 눈에 띄었다.
세대 간, 직급 간, 성별 간의 권력 차가 언어에 얼마나 녹아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글쓴이는 언어를 바꾸고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진짜 그런 뜻으로 쓰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예민하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불편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바뀌어간다. 나 또한 앞으로도 마음 쓰고, 표현을 점검하고, 불편해할 것이다.
사람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말을 통해 생각은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말은 다시 생각을 지배하게 된다. … 그래서 언어의 문제는 문제의식을 갖는 것 자체가 어렵고(너무 자연스러워서), 문제의식을 표현했을 때 거부감이 크다(자연스러움과 익숙함을 역행하는 것이어서). 따라서 익숙하게 써 오던 언어 표현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불편해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치부해거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의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익숙함에 마비되기 쉬운 언어 감수성을 키우고 언어 속에 담긴 문제들을 톺아보며(※구석구석 꼼꼼히 살펴보다) 문제의식을 지속적으로 갖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