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의 사랑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20
막스 뮐러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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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의 쌀쌀하고 까칠해진 대기, 높고 푸른 하늘. 내 인생의 또 한 번의 여름은 이렇게 저물어가고 새로운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지난 봄에 작은 터에 뿌리고 심었던 몇가지 작물들을 거두면서 오늘 나도 나의 가을을 준비했다. 그러면서 이처럼 내 가슴속에 무성히 자라난 분노와 욕구와 후회도 말끔히 사라졌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독일인의 사랑˝은 순전히 번역가만 보고 선택한 책이었다. 안톤 슈낙의 번역글을 보고 감명 받은 바 많았기에 이 책을 포함해 두권을 구매했던 것이다. 사실 이번주 정말로 수면이 부족했고 일이 많았으며 분노도 많이 일었기에 주중 출퇴근길 버스와 지하철에서 일독을 하면서도 책 내용 자체에 큰 느낌이 없었다. 다만 목요일경 책 말미 역자의 작품 해설을 읽고나서 내가 잘못 읽었던 것은 아닌지 어렴풋이 생각을 했었고, 주말 아침 상쾌한 정신으로 재독하면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 역자의 해설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뻔한 19세기 감성적 연애소설 정도로 치부하고 책장에 던져놓았을 뻔 했다.

작은 시골에서 19년을 살다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회사를 다니면서 가장 이해와 적응이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서울 사람들의 남을 대하는 태도였던 것 같다. 파전 하나 생겨도 이웃과 나눠먹던 그런 삶을 살다가 이해타산적인 관계 방식을 접하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도시 생활 20여년이 지난 이 시점에 나를 되돌아보면 나 역시 이제는 그런 관계 형성에 너무 익숙해져있었던 것 같다. 다른 어떤 사람도 나 때문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는지 걱정도 되고 미안해지기도 한다. 아마 저자인 막스 뮐러도 산업화, 도시화, 개인주의화를 향해 치닫는 시대에서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향수가 더 커졌고, 그래서 이 책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에 관해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책을 덮고 온 종일 좀 많이 반성했다. 내가 그간 정말 많이 타락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망상을 하고 지냈단 말인가. 많이 부끄러웠고 숨고 싶었다. 정말이지 사람되기 쉽지 않다.

˝낯선 타인의 존재를 배우면서부터 어린이는 이미 어린이임과 고별한다. (...) 사랑의 샘에는 단지 몇 방울 물밖에 남아 있지 않다. (...) 하지만 그것은 이미 순수하고 완전한, 기쁨에 충만한 어린이의 사랑은 아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궁핍이 섞인 사랑 - 작열하는 불꽃이요, 타오르는 정열일 뿐이다. 달아오른 모래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스스로를 소모하는 사랑 - 갈망하는 사랑이지 헌신하는 사랑이 아니다. 나의 것이 되어 달라고 요구하는 사랑이지 너의 것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본위의, 의혹이 뒤섞은 사랑이다! (...) 우리는 이렇게 모두 한때는 이 같은 불꽃놀이를 영원한 사랑의 햇빛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불꽃이 환하면 환할수록 뒤따르는 어둠의 농도는 더욱 짙은 법이다.˝ (26~27쪽)

˝천사의 품에 포근히 안겨 있어도 좋을 그녀가 왜 굳이 이 세상에 보내졌을까, 수많은 성화들에 그려져 있듯이 천사의 부드러운 날개에 실려 공중을 날 수도 있을 텐데.(...) 그럴 때면 나는 그녀의 고통 일부를 떼어 받아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홀로 고통을 겪지 않고, 우리 모두가 그녀와 고통을 나누기 위하여.˝ (37~38쪽)

˝<언제고 내가 너희를 떠나더라도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기를 바라. 그래서 너희들 모두에게 반지를 하나씩 가져왔어.> (...) 그러면서 그녀는 남동생에게처럼 내게 키스를 하고 반지를 주었다. (...) 온갖 쓰라린 고통이 내 가슴으로부터 씻은 듯 사라졌다. 이미 나는 혼자가 아니며, 타인이나 제외된 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 곁에, 그녀와 더불어, 그녀의 마음속에 있음을 느꼈다. (...) <이 반지를 내게 선사하고 싶으면 그냥 네가 갖고 있어. 너의 것은 곧 내것이니까>˝ (38~41쪽)

˝그녀가 켜는 감정의 현치고 이미 나의 영혼 속에서 울리지 않은 음이 없었고, 내가 입 밖에 낸 생각치고 그녀가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라고 응해오지 않은 생각은 없었다. (...) 흔히 5월에는 이제 곧 장미가 시들 거란 생각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우리의 그 계절에는 매일 저녁 꽃잎이 하나씩 땅에 떨어지고 있다는 경고의 소리가 들려왔다˝ (62~63쪽)

˝<그렇지만 저 소란스런 바깥세상에는 괘념하지 말고, 두 마음이 순수한 마음의 언어를 쓸 수 있는 우리만의 성전을 지킵시다.>(...) <왜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 <왜라니요? 마리아! 어린애한테 왜 태어났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꽃한테 왜 피었느냐고, 태양에게 왜 비추느냐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 <마리아, 당신은 내가 알고 있는 최선의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기울고, 그래서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겁니다. 당신 안에 살아 있는 말을 그대로 하십시오. 당신은 나의 것이라고. 당신의 가장 깊은 감정을 부인하지 마십시오. 신은 당신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주셨지만 그 고통을 당신과 나누도록 나를 당신에게 보내신 겁니다. 당신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어야 합니다.>˝ (150~153쪽)

˝그녀에 대한 사랑은 이제 살아 있는 인류의 대양 속에 합류하며, 몇백만 - 어린 시절부터 내가 사랑했던 몇백만 ‘타인들‘의 마음에 스며들어 그들을 포옹하고 있다. 다만 오늘처럼 고요한 여름날, 홀로 푸른 숲 속에서 자연의 품에 안겨 저 바깥에 인간들이 있는지, 아니면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혼자 외톨이로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르면, 기억의 묘지에서는 소생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죽어버린 생각들이 되살아나고, 엄청난 사랑의 힘이 마음속으로 되돌아와, 지금까지도 그윽하고 바닥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저 아름다운 존재를 향해 흘러간다. 그러면 몇백만을 향한 사랑이 이 사랑 안으로 - 나의 수호천사를 향한 이 사랑 안으로 수렴되는 것만 같다.˝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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