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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듀나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꿋꿋하게 sf소설가로 자리매김해오신 듀나님의 신작이라 반가워요 감시 시스템과 관련된 이야기라니 현실과 관련해 더 공감가는 내용으로 기대했습니다.

이 책의 앞부분에 실린 이야기들은 한국의 현실형 인간들에게 벌어지는 sf적 사건을 다루고 있어요. 내키지 않는 선 자리에서 만난 여자가 보여준 시간 여행 동전 마술을 결혼 후에도 마음에 담고 있는 남자, 오래 사귄 남자친구의 머리 위에 뜬 물음표가 보이는 여자, 만만한 친구를 이용하는 유령 여자 등 주위에 있을듯한 주인공들의 심리를 환상적인 상황을 통해 다른 각도로 보여줍니다.
은주가 그들 주변에 있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들은 학교 다닐 때 늘 은주를 알리바이로 이용했다. 늘 여윳돈이 부족했고 숫기가 없었던 은주는 이상적인 공범자였다.
은주는 그림자와 같았다. 늘 따라다니지만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흐릿한 존재.p.36

처음엔 정화가 은주를 함부로 대하는 듯해서 왕따와 관련된 내용인가 했어요. 뜻밖에 세 여자의 치정에 얽힌 전개였어요. 정화는 자신이 이미 1년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 놀라요. 은주는 정화가 죽은 뒤 유령으로 나타나 함께 지내는 걸 알면서도 정화와 사귀던 현아와 동거하며 기이한 질투심에 사로잡혀요. sf에 유령이라니 참 특이하죠.
개념만 따진다면 사유와 그 애의 새 애인이 겪은 일들은 계급과 신군에 의해 서로로부터 격리된 중세의 두 연인들이 겪었던 예스러운 시련과 다를 게 없었다.p. 67

우주선이 나오는 단편 '호텔'은 게임을 배경으로 하여 짧고 코믹했어요. 호텔 플레이 속의 A급 플레이어와 D급 플레이어의 연애는 왕족과 평민 사이처럼 엄청난 반향을 일으켜요. A급 플레이어 시유의 부모는 스타 플레이어의 메인 스태프로 많은 혜택을 누렸지만 더이상은 그렇지 못하게 됩니다. 시작은 신분 차이를 이유로 한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인데 전개는 유쾌했어요. 이런식의 게임 소설도 가능하군요.
소문과는 달리 북한은 검역에 철저하게 신경을 썼으며 지구인이 외계 미생물과 만날 때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위험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철저하게 대비를 해도 외계 바이러스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p.147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서는 현재 우리를 괴롭히는 전염병을 연상시키는 외계 바이러스로 지구가 침략자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모습이 나와요. 북한은 이론상 바이러스를 가장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오히려 치명적인 우주 감기가 발생한 곳으로 그려집니다. 아이를 죽이고 식인까지하는 끔찍한 장면에 경악했어요.
우주 식민지가 생겨도 로봇이 파업하거나 외계 바이러스가 공격하여 인간은 동네북이나 마찬가지네요. 먼 미래에도 현재 시점의 인간이 느낄 감정들이 사라지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잔인한 장면도 많았어요. 짧고 다양한 이야기들은 크기와 맛이 다른 사탕들이 들어있는 사탕상자 같았어요. 여운이 오래 남는 것도 있어서 진지하게 읽었습니다.
* 이 리뷰는 네이버 이북카페를 통해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