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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 챈스의 외출
저지 코진스키 지음, 이재경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8년 9월
평점 :
식물은 자신에 대해 생각할 줄도 자신을 알 줄도 모른다. 식물에게는 자기 얼굴을 알아볼 거울도 없고 고의를 행할 의사도 없다. 식물은 그저 자라기만 한다. 따라서 식물의 생장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식물은 사고를 하지도 꿈을 꾸지도 않으므로.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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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보이스피싱에 속아 손해를 입은 피해자의 뉴스를 접할 때면 아직도 저런 말에 속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전문가가 오히려 전문가보다 더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현혹하는 경우들도 있고 보니 이해가 되더군요.
[정원사 챈스의 외출'은 지능이 다소 떨어지고 TV로 세상물정을 배운 챈스가 정원 속 식물들의 세계에 대해 하는 말을 위대한 성찰로 착각한 사람들이 그를 월스트리트 거물의 후계자로, 대통령 정책고문으로 만드는 현실 우화라고 합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원조라니 유머와 진지한 철학이 어우러진 작품으로 기대되었습니다.
정원사 챈스는 정원일을 하고 TV를 보며 세상을 알아갑니다.
TV는 스스로의 빛과 색과 시간을 창조했다.
모든 초목을 끝없이 아래로 처지게 하는 중력의 법칙을 따르지 않았다.
무엇이든 TV에 나오는 것들은 언제나 얽히고설키면서도 언제나 잘 풀렸다.
TV 속 찬란한 세계에서 정원사의 일이란 장님의 흰지팡이였다. P.13-14
그는 태어나자마자 모친을 잃고 고아가 되었고 챈스를 키운 어르신은 그의 부친이 누군지 말해지주 않았어요. 그의 이름은 우연히, 어쩌다 태어났기 때문에 '챈스'가 되었고 글을 깨치지 못했지요. 그의 삶은 자신의 거처와 정원으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어르신이 돌아가시고, 챈스는 자신이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보일 수 있게 되었다는 걸 깨달아요.
사람들이란 보는 이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TV속 인물들처럼 사람들도 누군가 그들에게 눈길을 던질 때에야 존재하기 시작한다. 그제야 누군가의 마음에 자리할 수 있다.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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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니 챈스는 출생증명서도 없고 어르신의 정원사로 일했다는 걸 증명할 서류가 아무것도 없었어요. 결국 그는 무일푼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길을 가다 차에 치이고 말아요. 운전기사가 사고를 일으킨 사과로 랜드 부인은 그를 집으로 데려가고 랜드 씨는 그와의 대화에 열렬한 반응을 보입니다.
"정원사라! 진정한 비즈니스맨을 표현하는 말로 이보다 더 완벽한 말이 있을까! 맨손의 노동으로 자갈밭을 열매 맺는 땅으로 바꾸는 사람! 기막힌 비유였소!P.58
랜드 씨는 미국제일금융의 이사회장으로 기업가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하죠. 챈스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랜드는 그를 대통령 접견에 데려갑니다. 대통령의 질문에 챈스는 정원의 성장과 관련한 대답을 하고, 대통령은 자신의 취향대로 해석합니다. 랜드 씨는 챈스에게 대통령에 대해 묻고 자신의 의견을 말해요.
대통령은 결국 정치인이라는 걸 잊지 말게. 정치인은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든 지나는 길에 있는 식물 모두에게 친절이라는 물을 고루 뿌리는 사람일세. 그게 외교적 행보라는 거야. P.78
대통령의 연설에 챈스의 이름이 언급되면서 그는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죠. 대통령의 자문으로 TV에도 출연하고 외국 대사들과도 자리를 같이 합니다.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유혹도 받죠. 과묵하고 가끔 정원에 대한 말을 할 뿐이죠. 듣는 사람들은 그의 말을 철학적으로 받아들이고 우문현답식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사람들을 깨닫게 하는 현자가 되는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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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요? 무슨 전쟁요?" 챈스가 말했다.
"TV에서 본 전쟁이 워낙 많아서요."
"아아, 슬퍼요. 이 나라에서 우리가 현실을 꿈꿀 때 TV가 우리를 깨우죠.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쟁은 그저 또 다른 TV프로그램일 뿐이에요. 바깥 세계에서는 전선에서는 실제 남자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죠." P.144
그를 짝사랑하는 여인은 그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다고 생각하고 가슴 아파해요. 그의 진실은 그보다 더 슬프게 들립니다.
그는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자신은 그녀를 보는 게 훨씬 좋다고. 자신은 오직 보는 것을 통해서만 그녀를 기억하고 그녀를 얻고 그녀를 소유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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챈스는 자신의 이름을 촌시 가드너라고 부르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질문에 자신이 아는 정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뿐이죠. 사람들은 그의 반응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그를 대단한 사람으로 상상합니다. 챈스는 그저 그곳에 있는(원제:BEING THERE) 것 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 되죠. 거기에는 그의 단정한 용모가 영향을 미쳤다는 걸 부정할 수 없어요.
이 책은 단순한 이야기 구조 속에 사람들의 본성을 블랙 코미디로 그렸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책의 저자가 챈스보다 더 영화같은 삶을 살았다는 거였어요. 천재적인 재능으로 인정받던 작가가 자살로 삶을 끝낸 극적인 배경 때문에 이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경험을 비틀어 쓴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단숨에 읽을 수 있는 분량으로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제시하는 현대판 우화였습니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