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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를 잡다
아르놀트 판 더 라르 지음, 제효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8월
평점 :
소설처럼 흥미진진한 외과수술 이야기
히포크라테스로서는 외과 수술이 목숨을 구할 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개선시키는 시대가 오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P.31
누구보다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외과 의사들도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래야 막중한 책임감을 견디고 속에 남아 있는 죄책감과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이다. P.20
이국종 교수님이 해적에게 총상을 입으신 석해균 선장님을 구해내시는 과정을 보고 외과의사가 얼마나 힘든 직업인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수술의 기술도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간단하게 생각하는 맹장 수술부터 사람의 목숨을 좌우하는 큰 수술을 진행하는 동안 예측못한 변수가 발생할 여지는 너무나 많겠지요.
[메스를 잡다]는 마취도 없이 절단술을 행했던 끔찍한 과거부터 오늘날의 최첨단 수술까지 수술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생히 전한다고 되어 있어요. 특이하고 흥미진진한 수술 현장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니, 소설보다 스릴넘치는 실제 이야기를 기대되었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최초의 외과의사의 등장은 골절로 인해 뼈를 맞추는 기술, 경험과 사람들이 신뢰하고 몸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의 존재부터라고 말합니다. 골절된 뼈를 원래 자리에 정확히 돌려놓지 않으면 뼈 마모로 인해 퇴행성 관절 질환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라니 이해되네요. 골절 후 깁스를 하는 이유도 뼈를 맞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고, 석고 붕대는 1851년 네덜란드 군의관에 의해서라고 합니다.
저자가 네덜란스 사람이라서 같은 나라 사람의 업적은 꼼꼼히 챙긴듯해요.
17세기 암스테르담의 대장장이 얀 더 도트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직접 자신의 방광결석을 제거했다고 하고 외과의사가 그 내용을 꺼낸 결석의 삽화와 함께 자세히 저서에 기록했답니다. 사실 본문 내용 중, 이미 1세기 로마의 기록에 결석수술이 있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어요. 방광 결석은 매일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입는 것이 예방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깨알같은 정보도 알려주네요.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에선 뇌에 총을 맞았다고 무조건 사망하는 게 아니라는 부분이 흥미로웠어요. 호흡과 의식을 조절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은 뇌 깊숙이 위치한 뇌간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손상 부위에 따라 기능 이상이 생기는 정도라고 합니다.
충분한 자격을 갖춘 외과 의사에게는 권한이 주어지지만 의사로서 계속 일하기 위해서는 합당한 수준의 자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이를 위해 경험을 쌓고 보강 교육을 받는 한편 우수한 결과를 낼 수 있어야 한다. p.123
정맥류의 원인이 혈액의 역류를 막는 판막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인류의 직립보행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어요. 치질, 서혜부 헤르니아, 동맥경화 등의 질병도 직립보행으로 인해 생긴 질환이라고 하니 진화의 댓가인가 봅니다.
전신마취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출산의 고통을 못느끼게 하기위해 시도되었고 그녀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후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고 해요. 세균, 위생, 소독의 개념도 외과 수술을 통해 정립되게 되었고요.
과거에는 진단을 내리는 내과 의사가 소극적이었던 반면 외과의사는 문제의 원인 제거를 위해 칼을 이용하는 걸 선호했다니 성격차이가 뚜렷하죠. 저자가 내과 의사를 귀납적 사고를 하는 푸와로에, 외과 의사를 연역적 사고를 하는 홈즈에 비유한 점이 코믹하기도 했어요.
로마시대에 이미 비만을 줄이기 위해 복부 지방을 제거하는 수술이 시행되었다는 건 로마인들에게 새삼 감탄하게 만듭니다. 양초를 조명으로 사용하던 방법에서 현재 사용하는 내시경이 되기까지의 발전과정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해요. 흔히 언청이라 불리는 구순열이 물고기처럼 아가미가 있다가 사라지는 배아 발달과정에서 이상이 생긴 거라고 합니다. 성형 수술은 매독이나 결핵으로 코와 턱의 형태가 변형된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보형물을 집어넣는 방식에서 발전되었다고 해요.
의사들의 진단서에 알아보기 힘든 영어처럼 쓰는 건 사실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된 용어이고, 몸의 복잡한 부분, 방향을 정확히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어요.
진단도 문제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지켜본 이후에 내리는 것이 가장 좋다. 여기서 핵심은 기다림을 멈추고 치료를 시작해야 할 시점을 인지하는 것이다. p.305
이 책에선 전문적인 용어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수술 방법과 과정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설명해서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게 했어요. 대부분 끔찍하기도 기괴하기도 한 장면이라 외과의사들은 비위도 강하고 용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자는 상당한 자료 조사로 유인원, 로마인, 팝가수, 과학자, 왕과 여왕 등 많은 인물들을 다뤘고 기록들을 토대로 환자의 증상을 진단합니다. 에필로그에선 고전 SF작품에 등장한 외과 의사들 중 미래의 외과 의사 톱 10을 선정했어요.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사건들, 유머감각을 지닌 문장이 단편적인 이야기가 아닌 장편 소설로 썼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새로운 사실도 많이 알게 되었고 저자의 글솜씨가 뛰어나 스릴러 소설을 읽는 것처럼 지루한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렵고 전문적인 내용이었을텐데 매끄러운 번역과 깔끔한 구성 덕분에 보기편해서 더욱 좋았어요.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