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셔츠- 얀 마텔

20세기의 셔츠
얀 마텔 지음, 강주헌 옮김 / 작가정신 / 2013년 6월

줄무늬 셔츠의 단추 사이 붉은 색이 보이고 그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있는 당나귀와 원숭이. 사실 제목과 표지그림만 볼 땐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파이이야기> 작가의 책이라기에 관심을 가지고 읽게되었다. 그런데 읽는 내내 새롭게 다가오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모습들이 점점 더 책 속에 빠져들게 했다.

한 권의 책으로 유명해진 소설가 헨리는 소설과 평론을 한 권에 담는 새로운 책을 썼으나 출판관계자들에게 비관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실의에 빠진 헨리는 해외로 이주하여 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연극단체에도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휴식과 변화된 삶 속에서 만족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독자가 보낸 소포가 배송되었고 그 안에 든 단편소설과 독자가 직접 쓴 희곡을 통해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사람이 같은 도시에 사는 것을 알고 그 곳을 찾아가 그의 희곡에 도움을 주게 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다시 말해 소설과 헨리와 박제사 헨리의 이야기와 박제사 헨리의 희곡 속 이야기가 반복되면서 전개되며 마지막 반전은 충격적이다.

처음 베아트리스와 버질이라는 당나귀와 원숭이의 대화로 구성된 단순한 희곡인줄 알았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소재가 되는 많은 대화와 단어들 너머로 무언가 다른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줄무늬 셔츠, 침묵의 소리, 호러스, 손짓, 아우키츠 등 베아트리스와 버질 사이에 드러나는 단어들은 상징적으로 홀로코스트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기존 홀로코스트 소설과는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 이유는 마지막에 드러난다. 기존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소설은 사실적이고 대학살을 겪은 유대인 피해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던 반면, 그 희곡은 대학살을 어떤 죄책감없이 저지른 가해자인 박제사 헨리의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이다. 과거 무모한 살상을 저지른 박제사 헨리가 현재 죄없이 죽어 박제가 된 동물을 옹호하는 이 역설적인 모습 속에서 홀로코스트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홀로코스트는 역사의 이야기가 아닌 현재의 이야기다. 2차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 뿐 아니라 킬링필드 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량학살사건, 인간의 이기에 의해 멸종되어가는 동물 등 모두가 살아숨쉬고 존엄성을 가진 존재임을 망각하고 자행되는 인간의 잔인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현실이다. 이 책은 베아트리스와 버질을 통해 홀로코스트를 직접적으로가 아닌 간접적으로 이야기함으로 홀로코스트는 어디서든 존재할 수 있고 그렇기에 기억되어야 함을 더욱 명료하게 보여준다.

책을 다 읽고 다시 훑어보니 모든 글이 새롭게 다가온다. 책 속 희곡에서 나오는 단어 중 ‘호러스’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190페이지 베아트리스와 버질의 대화 중에서 ‘우리가 호러스에 대해 말하는 건 결국 더불어 살기 위한게 아닐까~ 기억하면서 계속 살아가려고.’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이 이 책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가 아닐까 생각된다.

읽는 내내 상징적인 단어들과 대화 속에서 머리가 조금 아팠지만 좀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홀로코스트를 항상 기억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