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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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그리고 지하 1층에서 시작한 이 시리즈는 물 속의 골리앗을 만나게 해주었다가,

폭우를 맞게 했고 거리의 마술사를 알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제 상류에 맹금류가

도사리고 있다. 맹금류만큼이나 날카로운 시선과, 어딘지 모르게 담담하면서도 서릿한

말투로 몸을 서리게 하는 단편들이 차곡차곡. 우리가 살아가는 이 불안과 혼돈의 시대는

저 먼 상류에서 맹금류가 지켜보고 있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알 듯 모를 듯한

맹금류의 위협 속에 우리는 저마다 질환을 겪고 있다. 자신만의 질환을. 그 질환은

신체적인 것일 수도, 정신적인 것일 수도, 상황적인 것일 수도, 관계적인 것일 수도

있을 터이다.

 

황정은. 믿고 보는 작가. 그녀의 작품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게 한다. 숨을 고르고...

언제 터져나올지 모르는 펀치에 대비하여 읽어주어야 한다. 이번에도 역시. 조금은 낮고

비껴간 듯한 시선으로 우리가 보지 못한, 어쩌면 보지 않은 것을 일깨운다. 이 시선의 고도.

내가 생각하는 황정은의 힘이다. 따듯한 위로였다가 통렬한 비난이 되기도 하는.

 

조해진의 빛의 호위. 이 작품 역시 아득한 기분으로 읽었다. 작품의 출발지점은 "전쟁을, 학살을, 혹은 그와 비슷한 무게의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라는저자의 나직하면서도 단호한 질문이다. 저자는 흩어진 자, 라는 의미의 디아스포라를 빛으로 감싸는 놀라운 능력을 선보인다. 우리는 고통을 겪는 이들을 기억한다. 외면하지 않는다. 그리고 쓴다. 박노해는 "문학이 약이라면, 그것은 정녕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 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빛의 호위는, 우리 시대의 젊은 작가가 써 낸 한편의 처방전으로 읽힌다.

 

 

쿤의 여행. 쿤이 뭐지? 하고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쿤이 무엇인가는 결국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쿤 역시 개개인의 질환이며 삶의 무게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쿤을 짊어진 채, 혹은 쿤에게 엉겨붙은 채 삶을 이동한다. 살아있는 나라는 존재가 아니라

나에게 들러붙은 질환이 때로는 더 큰 생생함으로 삶을 증거한다. 그 무게감에 허덕거릴 때, 작가는 이렇게 속삭인다. 자라지 않아도 괜찮아, 라고. 함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충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이상의 다른 어떤 노력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한번쯤 쿤에게 시달릴 때, 이 단편을 기억해 봄직하다.

 

 

그런가 하면 창 너머 겨울, 에서는 질환은 이제 좀 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사타구니 가려움증이라는, 한 사내를 변태환자이자 잠재적 아동 성학대범으로 몰고 가는 질환이다. 누구에게 섣불리 밝힐 수도 그렇다고 숨길 수도 없이, 손에 든 밤톨마냥 이리 저리 찔리며 들지도 못하고 내려놓지도 못한 채 함께 살아가는 일상의 질환들. 사내의 질환 내력이 밝혀질수록, 질환과의 사투가 고조될수록 가혹하리만큼 냉정한 저자의 서술이 오히려 더욱 가슴에 밟힌다.

성공적인 첫만남.

 

 

기준영이라는 작가도 처음이다. 이상한 정열. 이상한, 과 정열, 이라는 단어를 나란히 배치해 두고 난 후의 저자의 망설임이 조금은 와닿는다. 한순간 건너뛴 듯한 과정에, 감정에 다시 심지를 붙여보려는 화자의 노력이 이상한 정열의 형태로 타오른다. 역시나 정열의 온도가 높아갈수록, 그만하면 됐다, 라고 다독거려주고라도 싶은 기분이 된다. 하지만 저자는 작품을 "생이 덧없다는 말은 무용했다" 라는 문장으로 마감한다.  생이 덧없다는 말은 무용했다. 이 문장만으로, 이 작품을 읽는 일은 무용하지 않게 되었다.

 

 

가장 친숙한 작가 손보미. 첫 단편집을 이렇게 기다려 본 작가도 처음이었고, 그녀는 내 기다림을 값진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서는 아버지의 산책을 따라나선다. 의혹과 두려움과 걱정과, 저 밑바닥에는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한 회의를 짊어진 어느 딸의 발걸음이다. 손보미의 작품 역시 서늘하다. 아버지를 의심하고, 남편을 의심하는 여자 역시 불안정하고 위태롭다. 서로를 믿지 못함이, 믿지 못하고 있어 라고 말할 수 없음도, 말하지 못하면서도 그런 감정에 지배당함이, 하나 하나 서릿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작가는 다음 날에도, 또 다음날에도,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쓸 것이다. 그 다음날에도 또 쓰고 있을 작가를 믿는다.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마지막 단편은 미뤄두었다. 어느새 오년. 젊은 작가들의, 현재를 살아가는 작품들. 작품을 고뇌했던 흔적이 담긴 노트, 그리고 답장이라도 하듯 이어지는 젊은 평론가의 젊은 해석. 이 젊음에 희망을 건다. 문학의 미래와 같은 거창한 희망이 아니다. 다음 날에도, 또 다음날에도,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읽을 수 있다는, 읽으며 느끼고 생각하고 무언가를 적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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