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문을 열고 들어서보니 나는 낯선 사람들로 넘실거리는 거리에 서 있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고 뉴런조직을 헤집어 보아도 왜 이곳에 서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유 없는 행동은 할 수 있지만 목적 없는 행동은 없다. 나는 최초의 목적을 잊어버렸다.

애당초 나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곳까지 왔을 터이다.

일단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조명이 꺼진 옷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쇼 윈도우 안쪽에서 강렬하게 빛나는 디지털시계가 숫자들을 품고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숫자로 보건대 지금 시각은 3:20 이다. 당연히 낮 3:20 이 아니라 새벽 시각이다.

평소 같으면 굳이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들이 의식 속으로 간섭해 들어온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의 상황이 아니다.


기억을 잃었다.

시간, 의도, 방향, 목적을 잃어버렸다.
어쨌든 시간은 확보했다. 주위를 둘러본다. 익숙한 공간이다.

대한민국의 어느 도시를 가도 보게 되는 구조와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가게 옆에 가게, 상점 옆에 상점
편의점, 은행, 핸드폰 판매점
정신없이 배회하다가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갑자기 문이 나타났다.
무의식적으로 문을 열었다.


낯은 익은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은 여인이 방에 있었다.
나에게 반말로 이야기 하는 걸로 보아 나보다 어린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왜 같은 방에 있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같은 공간에 남녀가 함께 있었으나 어색함이 없었다.

여인이 갑자가 윗옷을 벗기 시작했다. 옷을 벗으니 브래지어가 나타났다.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나를 유혹하기 위해서인지 단순히 답답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의외로 성적으로 흥분이 되지는 않았다.

여인도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듯이 옷을 벗은 건 별 뜻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여인을 쓰러뜨리듯 바닥으로 눕혔다. 여인의 브래지어를 벗기고 가슴에 키스했다.

자극에 반응을 하던 여인이 “거긴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 돼”라고 외쳤다.

그 말을 듣고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가슴이 봉긋이 돋아나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아래에 있는 가슴을 입안으로 욱여넣기 시작했다.

여인의 신음소리와 함께 나도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삽입을 하고 싶어졌다.

여인의 성기를 더듬으며 구멍을 찾았다. 손으로는 느껴지는데 성기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여인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나의 성기는 부질없이 허탕을 쳤다.

나는 구멍을 못 찾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여인은 그만하자고 말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불연소된 욕망과 함께.


문을 나오자 다시 문이 있었다. 그 문에는 도어락이 달려 있었다.

도어락의 커버를 열고 숫자패드를 바라본다.
비밀번호를 떠올리기 전에 손가락이 먼저 움직인다.

7.3.1.2

손가락은 기억보다 근육에 의지해 번호를 눌렀고 삐리릿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수 천 번도 넘게 드나들었을 이 공간이 지금은 낯이 설다. 남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어색하다.

현관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화장실이 있고 조금 지나서 거실이 나타난다.

안쪽에 있는 부엌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안방이다.

우리 부부가 하루를 마감하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안방으로 다가간다.

아내는 내가 집을 나간 것도 모른 채 잠을 자고 있는 것 같다.

아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꽉 쥔 채 아주 천천히 돌리기 시작한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방안의 공기는 묵직하고 달 표면처럼 고요하다.

손잡이의 딸깍거리는 소리조차도 동굴 속 울림처럼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침대위에는 두 명이 누워있다. 한 명은 분명 아내일터이다. 다른 한 명은 누구일까?
혹시 내가 잘 못 들어 온 건가?
하지만 남의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익숙한 가구들이다.

햇빛이 들어와서 늦잠을 방해한다고 얼마 전에 바꾼 진회색의 암막커튼, 가구 집을 열군데 정도 돌아다닌 후 겨우 찾아낸 2인용 소파, 어벤져스 캐릭터가 새겨진 취침등.

여긴 분명 내 아내와 매일 잠이 드는 그 방이 틀림없다.

도대체 아내 옆에 잠들어 있는 저 사람은 무엇일까?
기이한 상황이긴 하지만 확인해야만 한다. 
상황에 맞지 않게 나는 의외로 침착하고 자연스럽게 침대로 다가간다.

얼굴을 반쯤가린 이불을 끌어내린다. 옆으로 돌아누운 얼굴이 보인다.

어두워서 정확한 모습은 확인할 수 없다. 커튼을 살짝 열어본다. 희미한 새벽빛. 주위가 좀 더 밝아졌다.
담담하게 뛰고 있는 심장의 위치를 느끼며 아내 옆에 누워있는 사람 쪽으로 다가간다.

자세히 얼굴을 들여다본다. 
익숙한 얼굴이다. 낯이 익지만 누구인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친근하고 잘 알고 지내는 사이.


그것은 나의 얼굴이다.


그러니까 내가 거기 있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갑자기 나의 존재가 낯설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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