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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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활자와 인쇄

 

“태종께서 처음으로 주자소를 두시고 큰 활자를 주조할 때 조정 신하들이 모두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태종께서 우겨 만들게 하시고, 그것으로 많은 책을 인쇄해 중외(中外)에 널리 보급했으니, 또한 위대한 일이었다.

다만 일을 처음 시작한 탓에 제조방법이 정밀하지 않았다. 예컨대 책을 찍을 때 반드시 먼저 조판틀에 밀랍을 편 다음

그 위에 활자를 심었다. 그런데 밀랍의 성질이 원래 물렁해 꽂은 활자가 고정되지 아니하므로, 몇 장을 인쇄하면

활자가 움직여 한쪽으로 쏠리는 탓에 또다시 바로 잡아줘야 했기에 인쇄공들이 골치를 앓았다.

내가 이런 문제를 걱정하여 경에게 개량할 것을 명했으나 경은 또한 어렵게 여겼다.

 내가 강요하자 경은 그제야 지혜를 짜내어 조판틀을 다시 만들고 활자를 다시 주조했던 바,

모두가 평평하고 방정(方正)하여 단단히 고정이 돼, 밀랍을 쓰지 않고도 많은 양을 인쇄해도

활자가 한쪽으로 쏠리지 아니하므로 내가 아주 아름답게 여겼다.”  - <세종실록> 16년 7월 2일


세계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나라는 영광스럽게도 대한민국이다.


고려시대에 이미 금속활자가 제작되었으나 이상하게도 이 금속활자가 본격적으로 사용된것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의 일이다. 금속활자는 얼핏 생각하면 대량의 인쇄물을 얻기 위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대량의 인쇄물은 목판인쇄로 얻었으니, 사실 금속활자는 다종소량(多種少量)의 인쇄물을 얻는 데 목적이 있었다.

다종소량의 텍스트 중 보다 널리 보급해야 할 책이 있다면 그것은 지방에서 목판으로 번각되거나 아니면 필사본으로

복제되었다. 결국 여러 종류의 서적을 빠른 시간 내에 제작하는 데는 금속활자를 사용하고, 이를 대량 복제하는 데는

목판인쇄를 이용했던 것이다. 이런 기술은 당시 세계적으로도 수준 높은 것이었다. 다만 이러한 기술을 민간이 아닌

국가에서 독점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말이다.

 

목판인쇄를 보자.

목판은 제작과 보관이 어렵다. 또한 쉽게 닳는 단점이 있다.

거기다 목판은 단 1종의 인쇄물밖에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금속활자는 마모되지 않고

대량의 인쇄물을 생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활자의 가동성(可動性)은 많은 종수의

책을 생산케 한다. 책을 찍고 나면 판을 해체하여 다른 책을 인쇄할 수 있는 것이다.

금속활자에는 대량의 인쇄물을 신속하게 찍어내어 일부에게 독점된 지식을 해방시키는

근대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그렇다면 고려와 조선의 금속활자도 과연 그러했을까.

유감스럽게도 조선의 금속활자는 대량의 인쇄물이 아니라,

오로지 다종의 인쇄물을 짧은 시간에 얻는 데 목적이 있었다.


책 읽는 기계였던 세종은 왕의 권력을 이용해 책을 생산했다.

왕위에 오른 뒤 그가 처음 했던 일은 금속활자의 개량이었다.


태종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계미자(癸未字)로 책을 찍어내기는 했지만 계미자는 몇 가지 약점이 있었다.

활자 모양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고, 활자 크기도 들쭉날쭉했다. 무엇보다 큰 약점은 느린 인쇄 속도였다.

조선시대의 활자 인쇄는 조판틀에 활자를 배열한 뒤 활자판에 먹을 바르고 뒤집어 찍어내는 과정으로 이뤄졌다.

한데 활자를 배열하는 기술에 문제가 있었다. 구리고 만든 조판틀에 활자를 배열하고 인쇄할 때 활자가 움직이면

인쇄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활자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방법이 필요한데 계미자의 경우 그렇지가 못했다.

계미자는 밀랍을 녹여 붓고 거기에 활자를 심어 고정시켰던 것이다.

 

밀랍은 간단히 말해 ‘양초’ 성분의 물질이라 생각하면 된다.

녹이기는 쉽지만, 무르고 열에 약하다. 밀랍에 의해 고정된 활자는 쉽게 흔들린다.

인쇄를 몇 장하고 나면 활자가 삐뚤삐뚤해진다. 다시 고정시켜야 한다.

 

이 같은 밀랍 고정방식 때문에 계미자로는 하루에 열 장 정도밖에 인쇄할 수가 없었다.

말이 금속활자 인쇄지 목판인쇄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고려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때 금속활자로 <고금상정예문>을 인쇄한 이후 밀랍 고정방식은 한 번도 개량된 적이

없었단 말인가? 그렇다. 이는 이미 말한 대로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대량의 인쇄물을 빠른 시간 안에 얻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조선은 더욱 많은 서적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활자와 인쇄방법의 개량이 시도된 것이다.


고려의 금속활자보다 뒤늦게 발명된 구텐베르크 활자는 발명되자 곧 유럽전역으로 퍼졌다.

가톨릭에 저항하는 마르틴 루터의 팸플릿과 독일어 성경이 그 활자로 만들어졌고,

이는 종교개혁으로 이어져 마침내 서구의 근대를 여는 결정적인 도구가 되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금속활자는 무엇을 했던가.

고려 때 발명되었던 금속활자가 상용화된 것은 조선 세종 때였다.

이후 금속활자는 과연 어떤 역사적 역할을 했던가.

우리는 금속활자가 세계 최초라고 떠들기만 했지, 정작 그 금속활자로 만들어낸 책이

어떤 역사적 역할을 했던가 하는 문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같다.

 

 2) 독서


“독서하는 사람은 반드시 단정히 손을 모으고 꿇어앉아 공경스런 자세로 책을

대해야 할 것이다.“    - <격몽요결> 中, 율곡 이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석학 중 한 사람인 율곡의 책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가 대학자가 될 수 밖에 없었음을 느낄 수 있다.

 

만일 나도 매일 두 시간씩만 저런 자세로 독서를 한다면 뭔가 위대한 족적(?)을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지긋지긋한 관절염에서 벗어나야 한다.


율곡의 글을 통해 학문에 접근하는 태도와 함께 책 자체가 귀했던 당시의 상황이 눈에 그려진다.

율곡이야 관직에 있었으니 그나마 책을 구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출판 상황을 고려한다면 지식에 대한 목마름이 어땠을지 유추해 볼 수 있겠다.

 

단순히 책을 복사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리고 인쇄도구를 국가에서 관리하기에 권력에 줄이 닿지 않는

사람들은 돈이 있어도 책을 출판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거기다 외국서적(주로 중국서적)을 구하는 것은 더욱 어려우니 지식의 평준화는 참으로 요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재의 상황은 조선시대의 지식인들이 보기에 천국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불과 90년대 까지만 해도 전문서적이나 번역서가 너무도 부족했다.

원서라도 구하고자 한다면 외국에 있는 친척이나 출장가는 분에게 부탁을 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원하는 서적을 구하기가 어려웠다(이랬으니 내가 공부를 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나 20세기말이나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 지식의 유통은 그리 원활하지 않았다.


21세기에 들어서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지식의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고 지식의 유통도 활발해지고 있다.

웬만한 자료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구해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자 이제 마음껏 지적 욕구를 채워보자.....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안타깝게도 이제는 지적 열망이 사그라들어 도서관에 있는 책들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지금은 글을 안다는 것이 특권층의 상징이 되는 시대는 아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은 것은 정보를 독점하는 자들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거짓을 분별하려면 내가 똑똑해 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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