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만의 허기
레온 드 빈터 지음, 지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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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만의 허기(Hoffman's Honger)

(레온 드 빈터 / 문학동네 / 2012)

 

 

 

“‘파키슨병’혹은 ‘알츠하이머병’이라고 명명하듯 마리안은 그의 허기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호프만의 허기’라고.”(p85)

 

이 소설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사람이 있다.

프레디 맨시니와 펠릭스 호프만

 

1. 프레디 맨시니.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프레디 맨시니는 헝가리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사 인분이나 게걸스레

해치웠다. 그런데도 발을 질질 끌며 객실로 가는 호텔 복도에서 벌써 허기를 느꼈다. “

 

그는 성공한 사업가로서 모든 것을 가졌지만 한 가지 결함이라면 체중이 158kg이나

나간다는 것. 입으로 들어가는 족족 살이 되어 올라붙는다.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그였지만 가끔 혼자 운전을 하다가

“그래, 나는 행복하지 않아.”라고 웅얼거릴 때가 있다.

스스로를 모든 것을 다 갖춘 패배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끊임없이 허기를 느끼는 이유가 자기에게 결핍된 무언가 때문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른다.

 

2. 펠릭스 호프만.

네덜란드 외교관 펠릭스 호프만은 더 이상 진급을 바라볼 수 없는 쉰아홉의

나이에 체코슬로바키아 주재 네덜란드 대사로 임명된다. 여러 해외 근무지를

돌다 퇴직이 임박한 때에 비로소 대사로 진급한 그의 삶은 겉으로는 성공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며 폭식증으로 고통 받고 있다. 유대인인

그는 어린 시절 홀로코스트로 부모를 모두 잃고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대학교를

다닐 때 아내 마리안을 만나 사랑스러운 쌍둥이 딸을 얻었지만, 한 아이는 어려서

백혈병으로 다른 아이는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잃는다.

 

두 딸아이의 죽음은 그의 결혼 생활과 삶을 모두 망가뜨렸다. 아내 마리안과는

지난날 때문에 완전히 결별하지 못한 채 형식적으로만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딸아이가 죽은 후로는 이십 년이 넘도록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끊임없이 음식을 먹고 또 게워내기를 반복한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는 것은 프라하의 관저에서 우연히 발견한 스피노자의 철학책이다.

마치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스피노자의 철학으로 채우려는 듯,

그는 스피노자를 이해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며 가까스로 스스로를 지탱해낸다.

 

인간은 항상 무언가에 고파있는 존재다.

한국인이든 마사이족이든 인도인이든지 항상 배가 고프거나 사랑을 갈구하거나

지식에 대한 갈망 혹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서는 것에 대한 집착 등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새로 구입할 외제차의 옵션을 풀옵션으로 할지 기본옵션으로 할지를 고민하는

사람이나 오늘 점심을 편의점에서 때울지 커피 한잔으로 버틸지를 고민하는

사람도 모두 결핍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본질이다.

 

마치 세상에 없던 새로운 명제를 제시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고 박력 있게 써놓긴 했지만

사실 사람들이 이전부터 해 오던 생각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나의 상태에 대해서 설명해 주기 보다는 답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펠릭스 호프만은 스피노자로부터 그 답을 찾고자 한다.

왜 하필 스피노자일까?

 

억지로라도 두 사람의 공통분모를 찾아보자면,

두 사람 모두 네덜란드 출신이라는 것과 유대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유대교에서 파문을 당했고, 호프만은 부모가 죽은 후

무신론자가 되었다.

 

호프만이 읽고 있는 스피노자의 책은 <지성 개선론>이다.

 

호프만이 <지성 개선론>에 사로잡히게 된 구절은,

 

“......나는 마침내 진정한 의미의 선이, 즉 전달 될 수 있으며 다른 모든 것들이

없어도 독자적으로 능히 정신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런 것이 정녕 존재하는지를

조사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구절이 이 책을 처음 떠들어보는 순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다.

스피노자를 통해 영혼을 충족시킬 수 있는 뭔가를, 바꿔 말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뭔가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스피노자의 책에서 구원을 얻고자 마지막 장까지 이르게 된 호프만은

책의 마지막 두 단락에서 번역자가 덧붙여 놓은 어이없는 한 문장과 마주하게 된다.

 

“나머지 부분은 누락되었음.”

 

이건 뭐지?

이건 마치 정교하게 공들여 만든 허무개그 한 편을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실재로 마지막 단락이 누락이 되어 있는지는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는데

만일 사실이라면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스피노자는 마지막 단락에서 어떻게 결론을 내렸을까?

 

창백하게 그 구절을 쳐다보던 호프만은 어떻게 되었을까?

 

예상외로 그는 멘붕 상태에서 일찍 빠져나와 또다시 스피노자의 다른 책을

읽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에티카>이다.

 

나는 최근 들어 소설을 읽을 때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을

덜 하는 편이다. 소설을 읽을 때만이라도 직관에 의지하여 읽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독법에 따르는 기회비용에 대해서는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책을 펼쳐들었을 때는 잘 익은 토마토처럼 금방 눈에 띄게 열매를 보여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스피노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때문에 헤매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 이름만 들어도 긴장이 된다.

 

이 책은 왠지 평론가들이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허기, 결핍, 이중간첩, 스피노자 그리고 1989년도의 유럽…….

 

이 정도면 평론가들이 좋아할 만한 소재들이 아닌가?

 

하지만 이 책을 덮고 나면 굳이 독자가 낑낑댈 필요가 없음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저자가 곳곳에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별 노력 없이 고생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스피노자와 관련된 구절들이 나올 때는 후다닥 건너뛰었다.)

 

출판사에서는 제2의 밀란 쿤데라로 밀어붙이고 싶은 것 같은데 이 책만 읽어서는

선뜻 동의하기에는 주저가 된다. 조금 철학적인 척한다고 해서 모두가 밀란 쿤데라와

동급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의 다른 책들을 좀 더 읽어 본 후

확인해 봐야 될 듯.

 

좋은 책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대체로 잘 갖추었다고 본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책이란 마지막 페이지까지 쫓아오도록 유혹하는 힘,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 상상력을 자극하고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는 책이다.

 

잘난 척하며 어쩌고저쩌고 많은 말을 했지만 나의 얄팍한 직관으로 이 책을

완벽하게 파악했을까 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런 글을 쓸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과연 잘 알고 떠들고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또 이렇게 뻔뻔하게 쓰는 이유는,

 

첫째, ‘에라 모르겠다‘ 정신이 투철하기 때문이고

 

둘째, 나의 무지를 드러내지 않으면 나는 결코 배우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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