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1 (미니북)
제인 오스틴 지음 / 자화상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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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젊은 사람들에겐 연인, 때론 썸이며 남사친,여사친등 남녀간의 다양한 관계가 존재한다. 그것이 연인으로 발전될 수도, 또는 그냥 어영부영 끝나버릴 수도 있지만 그런것에 크게 괘념치 않는 듯 하다. 많은 관계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이어지고 끊어지며 그렇게 인연은 만들어 지니 말이다.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던 사랑은 언제나 우리 인생의 중심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미 결혼한 나에게 간질간질한 연애세포는 의미가 없고, 새로운 사랑의 설레임 또한 느낄 수 없다. 한때 울고 웃게 만들던 연애의 기억을 회상하는 것 말고는 없지만, 그럼에도 가끔 만나게 되는 로맨스 소설은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그 중에서도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시대의 사랑 이야기지만 수백년이 지나도 우리를 설레게 하는 <오만과 편견>은 읽고 또 읽어도 가슴 두근거리게 만드는 걸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든 자유롭게 사랑을 시작할 수는 있어. 처음에 약간의 호감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을 싹틔울 수는 있지. 하지만 애정이 더 커지도록 하지 않고 내버려뒀는데 상대방이 애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해오기를 바랄 수는 없어.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 중의 한명인 제인 오스틴은 영국의 국민작가라고도 할 수 있다. 목사 아버지를 두고 6남2녀중 일곱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문학 작품을 즐겨 읽던 집안 분위기 덕분에 당대의 유명한 희곡 작품뿐만 아니라 낭만주의 작품, 계몽주의 작품, 수많은 시편을 접하며 그녀의 나이 열 네살 때부터 단편을 쓰기 시작해 스물한 살때 첫 장편을 완성하게 된다. <오만과 편견>은 처음 익명으로 출간하였는데 친한 사람들에게 조차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한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물론 그녀에게도 사랑의 아픔은 있었지만 사랑 없는 결혼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제인 오스틴이 문학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독신이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오만과 편견>으로 작가로서 인정을 받고 그 이후로도 많은 작품을 발표했지만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엄청난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19세기 후반부터 많은 비평가들의 힘으로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명작의 반열에 들게 되고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이야기는 5명의 딸을 가진 베넷 집안의 이웃인 네더필드로 많은 재산을 가진 미혼 남자 빙리가 이사오며 시작된다. 베넷집안의 5딸은 모두 미혼이다. 돈 많은 이웃 총각에게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혈안이 된 베넷여사는 첫째인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제인과 빙리를 이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한편 빙리의 친구인 다아시 역시 엄청난 재산과 큰키에 수려한 외모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만 오만하고 까다로운 성격으로 인해 그의 인기는 시들해진다. 베넷 집안의 둘째인 엘리자베스는 파티에서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는 다아시의 말을 우연히 듣게 되고 처음부터 그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장난기 많은 활달한 성격에 다른 자매들과 달리 교양과 지식을 갖춘 엘리자베스에게 다아시는 점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교양없는 어머니와 게으르고 장교뒤만 쫓아다니는 동생들로 인해 제인과 엘리자베스의 평판 또한 나빠지게 된다. 결국 서로 사랑하지만 멀어지게 된 제인과 빙리, 그리고 다아시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쉽게 이어지지 않는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게다가 다아시에 대한 오해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다아시의 청혼을 거절한 엘리자베스는 그뒤 서서히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며 다아시에 대한 애정이 점점 커지게 된다. 서로 대립되는 세계와 가치관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에게 보이는 오만과 자만심, 그리고 그것을 더욱 뿌리깊게 만드는 편견. 그 모든 것을 초월하고 과연 둘은 같은 접점에서 마주할 수 있을까. 



이제 그녀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랑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이 순간에, 그녀는 자기가 그 사람을 사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라는 생각만 들었다.


 

 

 

결혼이 가지는 의미가 많이 바뀌었고 우리는 사랑이냐, 경제적 풍요로움이냐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선택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지만 이 소설이 쓰인 시대는 여성이 그런 선택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소설속 엘리자베스는 어머니가 바라고 집안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청혼을 단칼에 거절한다. 그 후폭풍을 감당하긴 해야 했지만, 어쨋든 자신의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의 청혼을 그렇게 거절한 것만으로도 대담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에겐 더 많은 선택지가 있지만 아직도 결혼 앞에서 사랑이냐 경제적 부유함이냐를 두고 고민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래서 엘리자베스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지금 우리에게도 많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로맨스소설이라고 보기엔 오만과 편견은 그 속에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그 당시의 시대상을 그녀만의 시선으로 풍자하고 소설 속 인물들의 감정을 광장히 세밀하게 표현한다. 특히 다이시의 오만함과 엘리자베스의 그에 대한 편견이 어떻게 쌓이고 또 그것이 어떻게 풀어지고 섞여지는지의 과정속에 그 당시의 시대상이 가장 잘 담겨져 있어, 나는 비록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했지만 그 속에 함께 동화되는 생생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무관심하지만 유머와 센스있는 베넷, 허영심이 가득한 베넷부인과 어린 동생들, 팔랑귀 빙리와 갈등을 야기하는 빙리의 동생 캐롤라인과 다아시의 이모 캐서린여사까지 정말 다양한 캐릭터들이 합쳐져 훨씬 더 이야기 속에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당한 엘리자베스가 쟁취해 나가는 자신만의 사랑과 인생에 대한 가치관은 그 당시를 살아가는 보수적인 여성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었겠지만 지금 우리에겐 동질감과 함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또 우리에게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이끌어나가라는 것을 다시금 떠올리게 해주는 그녀, 엘리자베스는 멋진 여성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전 그런 말씀은 드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여사님이건 누구건 저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의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제 행복을 위한 길을 제 생각에 따라 선택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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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을 법정에 세우다 - 영원한 내부고발자의 고백
신평 지음 / 새움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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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을 이루는 많은 사람들은 각자 다른 성향과 생각을 가진 모두 다른 존재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집단의식이 강한 사회에서는 누구나 각자의 가치와 판단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조직에 몸 담는 순간 자신이 속한 집단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모두 똑같은 생각과 가치를 주입 받으며 획일화 된다. 그렇기에 누군가 자신이 속한 조직에 흠집을 내려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내부고발자들이 그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큰 고통을 겪게 되는 이유다. 내부고발자들의 고통을 보며 남은 조직원들은 더욱 결속하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해나갈 수 밖에 없는 내부고발자의 삶은 점점 더 힘들어 지고, 조직은 그 치부를 더 철저히 감춘채 점점 더 병들어 간다. 게다가 그 뒤에 감춰진 검은 세력들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면 더욱 두려워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한편의 소설같은 이야기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사실이라는 것이 더욱 소름 끼치는 일이다. 



도저히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자랑하던 그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나에게 덮쳐오는 거대한 파도가 한 개인의 힘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고 보였다. 무언가 잘 짜놓은 각본에 따른 함정이 파여 있었고, 나는 그 속으로 떨어졌으며, 웬만해서는 혼자 힘으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적지 않은 젊은 법조인과 법학자들은 이 책의 저자를 ‘시대의 사표’라 부른다. 1993년 돈봉투가 오가는 부패한 사법부의 현실을 질타하며 ‘사법부의 정풍’을 주장한 저자는 그 후 가혹한 시련의 길을 걷는다. 현행 헌법 시행 후 최초로 법관 재임명에 탈락한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대법원은 그의 사생활에 관한 거짓의 흑색선전을 퍼뜨리며 앙갚음을 하였고 그로인해 저자와 가족들은 수십 년간에 걸쳐 큰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고초를 겪은 뒤로도 저자는 끊임없이 부조리한 사회와 자신이 속한 조직의 치부를 드러내고 비판하였다. 이 책은 경북대 로스쿨 교수로 사법개혁을 주장하고 로스쿨 교수의 비리를 고발하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하며 쓴 그 당시의 일기들을 통해 진실을 밝혀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원한 내부고발자’라 불리는 그의 외롭고 지난한 투쟁의 과정이 오롯이 담겨 있는 것이다. 



무엇을 두려워 하랴. 떳떳한 태도로 나아가자. 진실은 내게 있다. 나는 절대로 허위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법관 재임명에서 탈락된 후 잠깐의 변호사 생활을 거쳐 경북대 로스쿨 교수로 재직하던 중, 동료 교수의 성매매 비리에 대한 글로 인해 저자는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다. 진실을 말했을 뿐이지만 동료 교수의 그에 대한 공격은 무차별적이다. 성매매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물론이며 저자를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말도 안돼는 비방을 하며 궁지에 몰아 넣는다. 법조계에 함께 몸 담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비리와 치부를 들춰내고 개혁을 주장하는 저자는 언제나 눈엣 가시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일까, 진실을 말하는 저자의 편에서 그를 옹호해 주는 동료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더욱 똘똘 뭉쳐 배척하고 저자를 몰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검찰은 철저히 동료 교수의 편에서 일방적인 수사를 해나간다. 거짓말 탐지기나 저자가 제출한 증거와 자료는 누락되기 일쑤고 말도 안돼는 상대방의 억측과 거짓말들이 사실인냥 인정되는 것이다. 저자가 그의 뒤에 분명 거대한 세력이 있을 것이란 짐작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모두가 저자를 겨냥하고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지만, 판사로 일했고 법조계에서 일하는 저자이기에 재판을 철저히 준비하고 잘 대응해 극적으로 1심에선 무죄를 선고받지만, 결국 최종적으론 유죄가 되고 교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렇듯 그가 소송에 휘말리고 마지막 선고를 받기까지의 과정들이 일기 형식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어진다. 너무나도 불공평한 세상을 마주하며 저자가 해나가는 싸움은 외롭고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그는 신앙과 가족의 힘으로 굳건히 버텨낸다. 그래서 그 힘든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고, 그 과정 속에서 느끼는 수많은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개인이 사건의 본질이라는 안이한 분석으론 결코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의 사법부나 법조가 갖고 있는 구조적인 결함은 이런 부정을 항시 생겨나게 할 소지를 안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또 바깥으로 터져 나오건 그렇지 않건 간에 여전히 이런 일이 끊이지 않고 생겨나고 있다고 보면 확실하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속한 조직의 치부를 드러내고, 비리를 고발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양심적이고 정의로운 많은 내부고발자들이 힘든 싸움을 해나가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용기를 내기 두렵다. 대부분의 내부고발자들은 돈과 명예만 잃는 것이 아니라 건강까지 잃게 되고 결국 폐인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판사,변호사,로스쿨 교수를 거치고,거기에다 감사원장, 대법관으로 천거가 되고, 대한민국법률대상을 수상한 사람이다. 소위 말해 높은 위치에 오른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일지라도 조직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는 짓밟혀진다는 것은 만약 우리 일반 서민들이 그런 조직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경우를 생각하는 것은 소름이 끼칠정도로 무섭다. 이미 너무나 많은 이익과 권리를 누리고 있음에도 그것을 놓치 않기 위해 양심을 버리고 교활하고 비겁한 행동도 서슴치 않는 그들의 모습에선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아마 저자가 적절히 타협하고 넘어갔다면 훨씬 더 높은 위치와 더 많은 부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른척 넘어가라고 조언했지만 그는 그 조언을 무시했다. 해야 할 말은 반드시 했고, 학자로서의 자존심이 비겁한 행위를 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했다. 분명히 더 쉬운 길이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소신과 생각대로 행동했다. 공공연히 행해져 온 관례들과 조직의 이익에 반하는 그 어떤 행동도 용납하지 않는 사법부, 그리고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세력의 힘을 느끼며 마주했을 저자의 두려움이 일기의 형식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각자가 힘든 순간을 헤쳐 나가는 방법은 다르겠지만 저자는 신앙과 가족들을 버팀목으로 이겨낸다. 물론 그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들보단 훨씬 유리하게 소송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원한 내부고발자’라 불리는 그이기에 그런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겐 작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높은 위치에 이른 사람도 권력기관 앞에선 무력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법은 항상 강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 존재라는 생각을 했지만, 분명 우리들의 편에서 또 진실의 편에서 공정한 법의 수호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는 것을 저자를 보며 알 수 있었다. 나라면 도저히 내지 못했을 용기, 그리고 끝까지 자신의 생각과 소신을 지켜나가는 모습에서 그와 같은 양심적인 내부고발자들이 좀 더 보호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로 변화해 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역정을 힘겹게 달려온 한국사회가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갖기 위해서는 사회 전반에 걸쳐 기득권 구조를 청산하고 어느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판사로서, 변호사로서, 그리고 로스쿨 교수로서 그러한 사회를 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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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의 남자 치치스베오 - 18세기 이탈리아 귀족 계층의 성과 사랑 그리고 여성
로베르토 비조키 지음, 임동현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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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샹들리에와 풍성한 드레스, 한껏 높이 올린 가발에 달콤한 간식들. 근대 유럽의 귀족문화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잔상들은 화려함, 사교, 살롱과 같은 사치스러운 것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엄격해 보이는 규율의 뒷면에 자리잡은 그들의 사교장은 지금의 우리로선 낭비라고 생각될 만한 것들로 가득하다. 사실 유럽의 근대사하면 프랑스의 문화가 가장 강하게 기억되기에 이탈리아의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게다가 치치스베오라니 생전 처음 접하는 단어인데다 귀부인의 남자라니, 뭔가 은밀한 것을 품고 있을 것만 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그래서 18세기 이탈리아의 중요하고도 흥미진진한 문화 현상이었던 치치스베오! 그들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자유의지가 없는 정절은 부정과 별반 차이가 없는 거야.

 

 

 

이탈리아 피사대학교 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1981년 피사 고등사범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르네상스 연구센터와 런던 바르부르크 연구소 그리고 우디네 대학교를 거쳐 교회제도사와 지성사, 문화사 그리고 여성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와 방대한 자료조사를 해야 했을까. 저자는 역사서는 물론 희곡과 소설같은 문학작품과 그림, 주고 받은 편지와 일기나 여행자의 기록까지 다양한 사료를 통해 치치스베오의 흔적을 찾아낸다. 그로인해 단순히 치치스베오의 정의뿐만이 아니라 관련된 유럽의 문화를 두루 살펴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저자는 치치스베오라는 관습을 단순히 성적인 추문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아닌 이탈리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볼 수 있도록 노력했기에 치치스베오가 낯설지만 새로운 역사적 경험을 논의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치치스베오란 18세기에 발달했던 관습에 따라 남편이 부재중일 때 귀부인을 따라다니며 그녀의 모든 활동을 챙기고 돕는 시종기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치치스베오 혹은 시종기사는 18세기에 의도적으로 계획된 삼각관계의 틀 안에서 다른 누군가의 아내를 곁에서 수행하는 공인된 임무를 맡은 남성이었다. 남편이 있음에도 부인의 곁에서 시중을 들며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는 젊은 남자를 남편이 기꺼이 용인한다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겐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18세기 이탈리아에서 귀부인들에게 치치스베오란 극장방문과 같은 문화생활과 사교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선 필수적인 요소였다. 귀부인은 절대 남성의 도움 없이 혼자 외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치스베오는 단순히 번거로운 심부름을 해주기 위한 것이 아닌 여성들에게 바깥의 영역으로 나가기 위한 자유의 가장 1차적인 조건과도 같았다. 그렇다면 치치스베오는 귀부인들의 시중을 들어주고 외출을 도와주는 단순한 시종기사였을까? 치치스베오란 그저 귀부인들의 노리개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단순한 생각을 가졌었지만 그 문화를 깊이 들여다보면 성적이나 외도, 불륜과 같은 우리가 치치스베오라고 하면 떠올릴만한 것들과는 달리 귀부인을 어떠한 위험이나 타인의 모욕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 그리고 그녀가 남성의 보호망 안에 속해 있음을 물리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치치스베오는 자신이 수행하는 귀족집안의 유산 관리와 가문 구성원 사이의 관계를 안정시키고 보장해주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고 귀족 계급들을 한데 모으고 그들 사이의 연대를 형성하며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치치스베오를 그저 단순한 시중기사로 보는 것은 잘못된 편견임을 깨닫게 해준다. 게다가 치치스베오는 모두 귀족 신분으로, 단지 신분상승이나 귀부인의 재산과 부를 누리기 위해 하층민들이 접근하거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귀족의 자제들이 학교를 졸업한 후 잘못된 향락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귀족사회에서 연륜이 있는 귀부인에게 올바른 귀족의 생활과 문화를 배우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치치스베오란 18세기 이탈리아 귀족사회의 하나의 문화와 관습으로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치치스베이스모가 흥미로운 가장 큰 이유는 성적인 방종이나 외도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한 여성에게 다른 남성의 접근이 ‘공식적으로’ 허락됐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둘은 분명 서로 연관돼 있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아한 것은 대중적으로 널리 퍼졌던 치치스베오가 왜 한 세기만에 사라져버렸냐는 것이다. 치치스베오는 이탈리아만의 관습같지만 사실 그 발전과 확산 뒤에는 프랑스에서 생겨난 사교 문화가 전파된 것 또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그만큼 프랑스문화가 전체 유럽의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는 것인데, 치치스베오의 소멸 역시 시민혁명으로 프랑스의 사교 문화가 쇠퇴하며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그로인해 여성들은 다시 바깥 영역과의 단절이라는 힘든 시간을 겪게 된다. 비록 결혼을 하고 남편이 있음에도 시종기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에겐 잘 이해되지 않지만 그 시대 여성들은 좋든 싫든 집을 벗어나기 위해선 어쨋든 치치스베오를 둘 수 밖에 없었다. 치치스베오와 감정적으로, 성적으로 더 깊은 관계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정과도 같은 형태로 죽기전까지 유지되었다니 그들에게 기댈 수 밖에 없었던 그 시대의 귀부인들이 같은 여성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치치스베오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지만 대부분 그를 통해 귀부인이 불륜에 빠지는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남편들이 그를 용인했다는 것은 그 당시 여성들이 얼마나 갑갑하고 힘든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500페이지가 넘는 페이지의 압박과 방대한 사료들, 이해하기 어려운 곳곳의 단어들을 견뎌내고 읽어낸 치치스베오는 숨막히는 감옥과도 같은 여성들의 삶에서 잠시나마의 문화생활과 자유를 안겨주던, 하지만 한편으론 또 다른 구속을 의미하는, 그 당시 여성들의 숨통을 조금이나마 트이게 해주는 복합적인 존재였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사라진 문화가 되었지만 한 세기의 귀족사회에 깊숙히 자리했던 치치스베오를 통해 우리가 잘 모르던 그 당시 이탈리아의 귀족 문화와 시대적 배경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만일 남편이 있는 여성이 극장이나 사교 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산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아닌가? 혹은 결혼이 기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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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끝났고 여자는 탈무드를 들었다
일라나 쿠르샨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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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들이 있다. 너무나 다른 시대를 산 사람들이 우리에게 남긴 이야기지만, 지금 읽어도 감동적이고 공감되는 것들은 아마 먼 미래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감정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유대인들의 지혜가 담긴 탈무드이다. 내용은 모르더라도 탈무드라는 제목 정도는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유대교에 대해서도, 탈무드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사랑은 끝났고 여자는 탈무드를 들었다>라는 제목에서 풍기는 절망 앞에 선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져, 그 순간에 왜 여자는 수많은 책들 중에서도 탈무드를 들게 되었는지 호기심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한 챕터에서 다음 챕터로 넘어가고, 그다음으로 넘어가면 곧 주석집 한 권을 다 읽게 되리라. 이것은 시간을 나이 드는 흔적으로 보지 않고 지혜를 키울 기회로 보는 관점이었다. 그러니 시간과 건강하게 관계 맺는 방법이었다. 매일 한 장씩 익히면, 하루 더 나이 들었다고 체념하는 대신 하루 더 지혜로워졌다고 위안 삼을 수 있었다. 결국 이것이 유대인이 시간을 보는 관점임을 깨달았다.


 

 

 

일라나 쿠르샨은 하버드대와 케임브리지대학원을 졸업하고 뉴욕과 예루살렘의 출판계에서 번역자, 외국어 판권 담당자로 활동하는 달리기를 하고 책과 텍스트를 사랑하는 낭만적인 사람이다.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것을 계기로 <사랑은 끝났고 여자는 탈무드를 들었다>를 쓰기 시작했으며, 이 책의 핵심인 탈무드 프로젝트 ‘다프 요미’를 따라 자신의 삶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될 많은 독자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기를 바라며 지금은 남편, 네 아이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다. 7년 반이란 긴 시간동안 탈무드를 공부한 그녀는 시간의 흐름처럼 탈무드를 읽어나가며 순차적으로 찾아오는 절망과 사랑, 상실을 어떻게 극복해내게 되었는지를 이 책에 솔직하게 담아냈다. 



내가 텍스트를 좇아가는 게 아니라, 텍스트가 내 삶의 굽이굽이를 따라온 느낌이 든다. 유독 힘든 시기, 아침에 일어날 이유를 몰랐던 시절, 매일의 탈무드 공부는 구명정까진 아니어도 닻이 되어주었다.


 

 

 

첫번째 결혼을 하며 미국에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으로 오게되지만, 1년여의 짧은 결혼 생활은 고통만을 남긴채 끝나게 된다. 친구와 함께 조깅을 하다 하루 한장 씩 탈무드를 공부하며 도전의 짜릿함을 맛보고 불가능한 목표를 정해 천천히 실현해 나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자신도 탈무드를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다프 요미’란 매일 한 쪽이란 히브리어로 매일 한 장씩 탈무드를 공부하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이혼 후 힘든 시간을 보내던 그녀는 그후로 어디든 탈무드를 가지고 다니고 탈무드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귀 기울이고 조금씩 깨달으며 그녀의 삶 또한 서서히 바뀌게 된다. 탈무드가 비록 남성중심의 사고를 내비치며 페미니스트인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한장 한장 읽어나가는 탈무드를 통해 한발 더 나아가는 배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첫번째 결혼의 실패로 사랑과 결혼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던 그녀지만 7년 반 후 탈무드를 완독할 무렵의 그녀는 재혼해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된다. 자신의 인생을 확신할 수 없을 때 만나게 된 탈무드는 그녀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한 의지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용기 내서 영혼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토라 본문이 울리게 해야 한다. 그 구절이 내 영혼을 빛나게 하고, 그 답으로 내 영혼이 본문을 빛나게 하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명문대를 나와 좋은 회사에 다니는 소위 엘리트 였지만, 사랑을 좇아 머나먼 땅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 사랑이 1년이 채 못가 깨지며 그녀는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그 절망 속에서 만나게 된 탈무드를 통해 그녀가 다시 온전한 사랑을 찾아가고 행복을 찾아가게 된 회고록과도 같은 이 책은 탈무드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고 비록 유대교가 어떤 것인지, 유대인들의 삶이 무엇인지 모르더라도 한 인간이 배움을 통해 찾아가는 삶의 길을 함께 따라가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꼭 페미니스트까진 아니더라도 여성들이 읽는다면 특히 더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 다수이지만 성별에 상관없이 탈무드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그 이야기를 어떻게 우리 것으로 만들어 내 삶에 녹여낼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느낄 수 있다. 그저 탈무드란 무엇이고 어떤 내용이라는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탈무드의 그 구절, 그 챕터를 읽던 시기의 자신의 상황과 생각들이 그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변화하게 만들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기에 어렵지 않고 그녀의 삶에 함께 동화되어 탈무드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우여곡절 많았던 그녀의 인생 속에서 탈무드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찾아가는 이야기는 그래서 많은 여성들에게 공감과 지지를 받았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계속 토라와 함께하면서 그 비밀들을 찾으려 애쓴다. 밝힐 수 있는 것을 밝히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얻고 싶다. 그 길이 어둡고 고달플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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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살기 힘들까 - 삶이 괴롭기만 한 당신에게 건네는 위로
미나미 지키사이 지음, 김영식 옮김 / 샘터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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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언제나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이상하게 행복한 순간보다 힘들고 괴로운 순간이 훨씬 더 빈번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인생에서 고통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겉으로 행복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누구나 자신만의 고통이 있고, 그것을 잘 극복하고 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만의 지혜를 터득하는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잘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지혜를 익힐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아마 종교일 것이다. 어떤 종교이든 자신이 공감할 수 있고 자신이 처한 문제에 대한 답에 근접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종교가 있다면 삶을 살아가기에 훨씬 더 수월할 것이다. 각자가 처한 상황은 모두 다르겠지만 힘겨운 순간 내게 위로가 되는 존재, 용기를 주는 존재는 그래서 꼭 필요하다. 



인간은 의식의 저변에 삶보다도 죽음 쪽을 훨씬 사실적으로 느낀다고 한다면, 힘이 항상 부족하기 쉬운 삶에 ‘의미’나 ‘가치’를 주입함으로써 죽음에 대항하는 힘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 아닐까.


 

 

1958년 나가노현에서 태어난 저자는 와세다 대학 문학부(미술사학 전공)를 졸업한 후 대형 백화점에서 근무했다. 1984년 조동종에 출가하여 후쿠이현의 대본산 에헤지에서 2003년까지 약 20년간 수행 생활을 했다. 2005년 아오모리현 오소레산 보다이지의 주지 대리가 되었으며, 현재 후쿠이현 레이센지의 주지이다. TV 출연, 강연, 저술, 블로그 등으로 속세와 소통하고 있는 그는 여러 저서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불교를 깊이 공부한 저자이고 불교의 가르침 아래 있지만 이 책에선 불교용어를 사용하거나 불교의 사상을 전파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은 불교의 가르침을 토대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카운슬링과도 같은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 역시 스스로 삶이 괴로워, 자살하지 않기 위해 승려의 길을 택했다고 하니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그 이야기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렇게 터득한 지혜를 담은 책이 <왜 이렇게 살기 힘들까>이다. 

 

 

 

우린 왜 이렇게 사는게 힘들기만 할까. 분명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기 마련이지만 이상하게 우린 나쁜 일에 더 집착하곤 한다. 저자 역시 “인생에는 원래 즐겁고 기쁘고 좋은 일보다 괴롭고 안타깝고 슬픈 일이 더 많습니다.” 라고 말해주니 어느정도 위안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어쨋든 나말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때면, 훨씬 더 힘들고 괴로워진다. 칭찬 받고, 인정 받고 싶지만 지금 사회는 적자생존,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갈 수 밖에 없는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성취감보단 공허함을 더 많이 느끼게 되고, 그 고독은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사람들은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조차 제대로 정의할 수 없다. 그런 혼란은 부모와의 관계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틀어지게 만들고, 그렇게 고립된 자신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분명 죽은 뒤의 상황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뒤 행복하고 평온한 상태가 되는지도 모르지만 그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의미나 가치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극에 달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승려로서 종교가 그런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저자는 ‘확실한 것은 없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바탕에 두고 종교를 어떤 진리를 체득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인생을 잘 살아내기 위한 안내와 같은, 처세술이 아닌 처생술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힘든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삶의 자세나 사회적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인생에 정해진 정답은 없기에 힘들지만 살아가기로 선택했다면 그것만으로 훌륭하다고 말한다. 삶이 고귀한 것이 아니라 삶을 받아들이는 그 자세야말로 고귀한 것이다. 



내가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태어나버린’ 것으로 시작되어, 언어에 의한 사고, 직립 보행, 감정, 욕망에 이르기까지 주위 사람의 가르침을 통해 ‘사람’이 된다. 즉 ‘나’는 ‘타자’를 근거로 하여 타자와의 관계로 성립되는 존재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자살은 옳지 않은 선택이라고 여긴다. 소중한 삶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것을 두둔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승려인 저자가 이 책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자살을 대하는 태도는 사실 조금 놀랍다. 불교 신자라고는 하지만 그 깊은 가르침까지는 모르는 나이고, 일본과 한국의 불교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저자가 이해하고 있는 불교의 가르침을 바탕에 둔 이야기는 우리가 태어난 것부터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며 우리는 죽은 뒤의 상황 역시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알 수 없는 것들을 굳이 알려고, 정의 내리려고 노력하지 말고 알 수 없는 채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참 애매한 답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고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것들을 알아내려고 노력하며 괴로워하는 것보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자살에 대한 저자의 생각 역시 자살하는 사람이 나쁘다고도 자살이 악이라고도 생각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쪽을 택하는 사람에게 공감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죽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해주기도 했다. 힘든 시대를 살아가느라 힘들었다고, 삶의 괴로움에 대해 고뇌하느라 힘들었다고 위로해주는 저자가 알려주는 그래도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혜와 용기는 그간 인정하기 싫고 답을 찾을 수 없었던 삶의 많은 물음들에 괴로웠던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힘든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생각이 든다. 



물음’을 바꾼다. ‘나는 무엇인가’ 같은 것을 생각하지 말고, ‘내게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내게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한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소중히 하고,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배반하지 않고 살아가면 자연히 길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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