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부인의 남자 치치스베오 - 18세기 이탈리아 귀족 계층의 성과 사랑 그리고 여성
로베르토 비조키 지음, 임동현 옮김 / 서해문집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화려한 샹들리에와 풍성한 드레스, 한껏 높이 올린 가발에 달콤한 간식들. 근대 유럽의 귀족문화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잔상들은 화려함, 사교, 살롱과 같은 사치스러운 것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엄격해 보이는 규율의 뒷면에 자리잡은 그들의 사교장은 지금의 우리로선 낭비라고 생각될 만한 것들로 가득하다. 사실 유럽의 근대사하면 프랑스의 문화가 가장 강하게 기억되기에 이탈리아의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게다가 치치스베오라니 생전 처음 접하는 단어인데다 귀부인의 남자라니, 뭔가 은밀한 것을 품고 있을 것만 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그래서 18세기 이탈리아의 중요하고도 흥미진진한 문화 현상이었던 치치스베오! 그들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자유의지가 없는 정절은 부정과 별반 차이가 없는 거야.

 

 

 

이탈리아 피사대학교 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1981년 피사 고등사범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르네상스 연구센터와 런던 바르부르크 연구소 그리고 우디네 대학교를 거쳐 교회제도사와 지성사, 문화사 그리고 여성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와 방대한 자료조사를 해야 했을까. 저자는 역사서는 물론 희곡과 소설같은 문학작품과 그림, 주고 받은 편지와 일기나 여행자의 기록까지 다양한 사료를 통해 치치스베오의 흔적을 찾아낸다. 그로인해 단순히 치치스베오의 정의뿐만이 아니라 관련된 유럽의 문화를 두루 살펴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저자는 치치스베오라는 관습을 단순히 성적인 추문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 아닌 이탈리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볼 수 있도록 노력했기에 치치스베오가 낯설지만 새로운 역사적 경험을 논의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치치스베오란 18세기에 발달했던 관습에 따라 남편이 부재중일 때 귀부인을 따라다니며 그녀의 모든 활동을 챙기고 돕는 시종기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치치스베오 혹은 시종기사는 18세기에 의도적으로 계획된 삼각관계의 틀 안에서 다른 누군가의 아내를 곁에서 수행하는 공인된 임무를 맡은 남성이었다. 남편이 있음에도 부인의 곁에서 시중을 들며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는 젊은 남자를 남편이 기꺼이 용인한다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겐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18세기 이탈리아에서 귀부인들에게 치치스베오란 극장방문과 같은 문화생활과 사교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선 필수적인 요소였다. 귀부인은 절대 남성의 도움 없이 혼자 외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치스베오는 단순히 번거로운 심부름을 해주기 위한 것이 아닌 여성들에게 바깥의 영역으로 나가기 위한 자유의 가장 1차적인 조건과도 같았다. 그렇다면 치치스베오는 귀부인들의 시중을 들어주고 외출을 도와주는 단순한 시종기사였을까? 치치스베오란 그저 귀부인들의 노리개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단순한 생각을 가졌었지만 그 문화를 깊이 들여다보면 성적이나 외도, 불륜과 같은 우리가 치치스베오라고 하면 떠올릴만한 것들과는 달리 귀부인을 어떠한 위험이나 타인의 모욕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 그리고 그녀가 남성의 보호망 안에 속해 있음을 물리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치치스베오는 자신이 수행하는 귀족집안의 유산 관리와 가문 구성원 사이의 관계를 안정시키고 보장해주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고 귀족 계급들을 한데 모으고 그들 사이의 연대를 형성하며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치치스베오를 그저 단순한 시중기사로 보는 것은 잘못된 편견임을 깨닫게 해준다. 게다가 치치스베오는 모두 귀족 신분으로, 단지 신분상승이나 귀부인의 재산과 부를 누리기 위해 하층민들이 접근하거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귀족의 자제들이 학교를 졸업한 후 잘못된 향락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귀족사회에서 연륜이 있는 귀부인에게 올바른 귀족의 생활과 문화를 배우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치치스베오란 18세기 이탈리아 귀족사회의 하나의 문화와 관습으로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치치스베이스모가 흥미로운 가장 큰 이유는 성적인 방종이나 외도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한 여성에게 다른 남성의 접근이 ‘공식적으로’ 허락됐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둘은 분명 서로 연관돼 있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아한 것은 대중적으로 널리 퍼졌던 치치스베오가 왜 한 세기만에 사라져버렸냐는 것이다. 치치스베오는 이탈리아만의 관습같지만 사실 그 발전과 확산 뒤에는 프랑스에서 생겨난 사교 문화가 전파된 것 또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그만큼 프랑스문화가 전체 유럽의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는 것인데, 치치스베오의 소멸 역시 시민혁명으로 프랑스의 사교 문화가 쇠퇴하며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그로인해 여성들은 다시 바깥 영역과의 단절이라는 힘든 시간을 겪게 된다. 비록 결혼을 하고 남편이 있음에도 시종기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에겐 잘 이해되지 않지만 그 시대 여성들은 좋든 싫든 집을 벗어나기 위해선 어쨋든 치치스베오를 둘 수 밖에 없었다. 치치스베오와 감정적으로, 성적으로 더 깊은 관계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정과도 같은 형태로 죽기전까지 유지되었다니 그들에게 기댈 수 밖에 없었던 그 시대의 귀부인들이 같은 여성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치치스베오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지만 대부분 그를 통해 귀부인이 불륜에 빠지는 것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남편들이 그를 용인했다는 것은 그 당시 여성들이 얼마나 갑갑하고 힘든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500페이지가 넘는 페이지의 압박과 방대한 사료들, 이해하기 어려운 곳곳의 단어들을 견뎌내고 읽어낸 치치스베오는 숨막히는 감옥과도 같은 여성들의 삶에서 잠시나마의 문화생활과 자유를 안겨주던, 하지만 한편으론 또 다른 구속을 의미하는, 그 당시 여성들의 숨통을 조금이나마 트이게 해주는 복합적인 존재였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사라진 문화가 되었지만 한 세기의 귀족사회에 깊숙히 자리했던 치치스베오를 통해 우리가 잘 모르던 그 당시 이탈리아의 귀족 문화와 시대적 배경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만일 남편이 있는 여성이 극장이나 사교 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산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아닌가? 혹은 결혼이 기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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