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 2018.7
샘터 편집부 지음 / 샘터사(잡지)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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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말 여름이다. 후덥한 바람의 온도를 느끼며 여름이 온 걸 느낀다. 어린시절 여름엔 시골 할머니댁에 가서 집 앞 개울가에 신나게 몸을 던지곤 했는데, 이젠 더이상 갈 수 없는 그곳을 생각나게 해주는 아련한 7월호 샘터의 표지다. 이번달 특집은 ‘국경을 넘은 인연’이다. 같은 한국 안에서도 마음 맞는 이를 만나기 힘든데 국경을 초월한 우정과 인연이란 얼마나 다양할지 기대가 된다. 
 

 

 

 

생명의 탄생은 언제나 경이롭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도 따르기에 임신중에 어떤 주치의를 만나게 되는지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렇기에 이번호에 소개된 산부인과 의사인 이종민님과 같은 의사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의사가 받아주는 아이들과 산모는 그 기운을 고스란히 받아 더 행복한 출산과 삶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대나무 꽃이 피는데 육십 년이나 걸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보니 대나무 꽃을 본 기억은 없는 것 같다. 사람이 평생을 바쳐도 보기 어려운 꽃이라니, 도대체 어떤 꽃일지 궁금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듯, 흔한 식물 하나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기에, 자연의 경이로움과 위대함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자국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만 낯선 타국에서 받은 도움의 손길은 훨씬 더 고맙고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소중한 인연으로 이어지고, 그 나라와 국민에 대한 좋은 인상으로 남게 된다. 국적도 성별도 나이도 상관없이 이어지는 인연은 참 신기하기도 하고 훨씬 더 소중하게 기억된다는 것을 소개 된 사연들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동물원에서 본 코뿔소는 그 크기와 커다란 뿔이 달린 외모로 천적이 없는 천하무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코뿔소의 천적은 인간이지 않을까 싶다. 뿔을 얻기위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밀렵으로 코뿔소는 멸종 위기의 동물이 되었고 2026년엔 코뿔소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니 인간의 이기심과 잔인함에 몸서리가 쳐진다. 모두 함께 살아갈 순 없는 것일까. 
 

 

 

부모의 가치관과 교육 방향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누구나 공감하는 바일 것이다. 퀴리가의 평등한 교육과 아인슈타인가의 비극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리 두 딸들을 어떻게 키우고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글이었다. 
 

 

부모가 되어보니 아이가 아프다는 건 그 무엇보다 견뎌내기 힘든 일이다. 대신 아파 줄 수도, 그렇다고 당장 낫게 해주지도 못하는 부모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간다. 이 사연의 주인공은 고모이지만 조카를 생각하는 마음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겉모습만으로 평가하고 판단내려 비난당하는 내 가족을 보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다. 고모의 용기있고 깊은 사랑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번데기,귀뚜라미등 우리나라는 곤충을 먹는다는 것이 그리 놀랄일은 아니지만 서양사람들에겐 충격과 공포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식량부족을 극복하게 해 주는 키워드가 곤충이라니, 그들도 어쩔 수 없이 곤충을 받아들이고 먹을 수 있도록 연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귀뚜라미빵이라니 뭔가 생소하지만 고소한 맛에 먹을만하다니 앞으로도 여러가지 독특한 재료를 품은 새로운 음식들이 많이 생기지 않을까. 
 

 

 

남편과 연애를 꽤 오래하고 결혼했기에 연애시절의 추억이 적지 않다. 나도 가끔 서랍이나 물건들을 정리하며 연애시절 주고 받았던 편지나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하면 추억 속으로 빠지곤 하는데, 우리가 아이를 둘이나 낳고 4명의 가족이 될꺼란 상상을 해본적도 없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느새 한명만 없어도 너무나 허전한 가족이 되었다니 시간의 흐름과 변화에 새삼 놀라곤 한다. 앞으로 우리 가족의 이야기도 차곡차곡 쌓아가게 되겠지. 
 

 

 

 

우린 극성수기에 휴가 가는걸 좋아하지 않아서 9월로 휴가 날짜를 잡아뒀다. 일주일간 해외로 나갈 예정인데  다른나라에 가면 마음이 풀리고 들뜨며 많은 것들에 소홀해 지기도 한다. 그래서 글에서 소개된 공정여행의 규칙과 방법들을 마음속에 익히고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여행자로서의 윤리와 책임감도 캐리어에 함께 담아가야 겠다. 
 

 

 

 

페퍼톤스의 노래를 좋아하는데 4년만에 컴백했다니 너무나 반갑다. 볼빨간 사춘기는 요즘 가장 핫한 그룹이라 생각하는데 노래를 들어보진 못했지만 휴가철을 앞두고 여행에 대해 노래하는 두 앨범 모두 마음을 설레게 하기엔 충분할 것 같다. 



마음을 울리는 감동과 또 부모로서 가슴 아픈 이야기, 새롭고 흥미로운 이야기와 우리 이웃들의 소소한 이야기까지 너무나 다양한 많은 글들을 접할 수 있는 샘터는 이번호 역시 읽고나니 마음속이 훈훈하고 미소 짓게 하는 긍정적인 힘을 우리에게 전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더위에 점점 지치고 짜증만 나는 계절이지만 그것을 날려주는 시원한 물놀이처럼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  샘터 네이버 공식 포스트  http://post.naver.com/isamt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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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중력 - 누군가 손을 잡아준다면 참 좋겠습니다
이은재 지음 / 베네북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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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물체를 잡아당기는 힘을 중력이라 한다. 중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공중에 떠 다니지 않고 지표면에서 생활할 수 있듯이, 사랑이 우리의 삶을 정상 궤도로 잡아당기며 그 힘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우린 온전한 인생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사랑때문에 울고, 웃고, 아파하며 인생의 의미도 알게 되고 또 사랑의 힘 덕분에 많은 것들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랑이란 단순한 것 같지만 그 속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담고 있기에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쉬운 사랑은,
장담할 수 있는 사랑은,
내 마음처럼 흘러가는 사랑은,
없습니다. 



 

 

 

방송작가인 저자는 MBC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로 첫 방송을 시작한 이후 라디오와 TV를 넘나들며 다수의 프로그램을 집필했다. 사실 TV 작가 보단 라디오 작가들의 감성을 더 좋아한다. 보고 즐기는 TV 보다는 연예인이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를 음악과 함께 들을 수 있는 라디오라는 매체는 지금도 참 매력적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고, 목소리만을 통해 전달되는 글의 감정과 힘은 훨씬 깊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방송은 일회성이라 전파를 타는 순간 글은 허공에 흩어지기에 방송이 아닌, 기록으로 남겨지는 글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가슴으로 읽는 글, 쉽게 읽히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따뜻한 글로 소통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사명이라 믿는 저자의 글은 그래서 읽는내내 한지에 먹이 스며들듯 천천히, 하지만 짙게 마음속에 스며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근했던 기억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건
비단 세월이 변했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흐르는 세월 속에 어찌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애써 지우려 했기 때문일 테죠. 




사랑이란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각자의 모습과 개성처럼 사랑 역시 너무나도 다양하고 모두 다른 형태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그로인한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각자의 마음속에 다르게 기억되고 그것을 느끼는 것도, 견뎌내는 것도 모두 다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던가, 비슷한 느낌과 공감으로 다가오는 타인의 사랑은 가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큰 위로가 되어서,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았고 다신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에게 버텨내고 이겨낼 힘을 준다. 담담하고 부드럽지만 그 속에 담긴 작가로서의 강한 내공이 느껴지는 저자의 글은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닐까. 비록 더이상 새로운 사랑을 할 일은 없는 나지만, 연인간의 사랑 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와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어느 특정한 세대가 아닌 지금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모든 사람들에게 그 아픔과 슬픔의 시간을 잘 버텨내고 다시 힘차게 일어설 수 있길 간절히 바라는 저자의 따뜻한 마음이 글 속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시련과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찾아와 인생에 변곡점을 만들어냅니다. 지금 당신과 내가 이 자리에 무사히 서 있다는 건 우리가 그만큼 잘 버텨냈다는 뜻이겠지요. 

 

 

책을 읽으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나의 삶에서 행복했던 기억들을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어서 단지 그것만으로도 순간의 힐링이 되는 기분을 느꼈다. 어린시절의 아련한 기억을 더듬어 보기도 하고, 어리숙하지만 열렬했던 첫사랑 생각에 저릿한 마음을 느끼기도 하고, 부모님을 생각하며 코 끝 찡한 아릿한 감정을 되새기며 내 인생에서의 사랑이란 이렇게도 다양하고 아름답고 행복했다는 생각에 지금의 힘들고 걱정되는 일들도 언젠가는 추억이 되어 켜켜이 쌓이게 될 것이기에 무덤덤하게 보내는 하루하루를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길지 않은 한편 한편의 글에서 이 책을 읽을 많은 사람들에 대한 진심을 느낄 수 있고 우리 모두 비슷하게, 별반 다를바 없는 인생을 살며 아프고 힘든 일에도 다시 용기를 내어 살아가고 있다는 위안을 받으며 고통을 받아들이고 내려놓는 그 순간 그곳이 다시 시작점이 되기에 절대 무너지지 말라는 저자의 진심이 많은 사람들의 차갑게 식은 마음을 다시 따뜻하게 데워주기 위한 작은 불씨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세상의 기쁨은 너무 평이해서 아무도 시선 주지 않는
그런 일상의 풍경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요. 
오늘 회색빛 커튼 틈을 엿보며
들어올까 말까 한참 망설이는 아침 햇살이
나를 웃음 짓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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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양장) - 개정증보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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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섬이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섬들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섬들은 바다 밑에선 서로 연결돼 있다.”
- 영화 About a Boy
우린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함께 살아가더라도 하나의 인간으로서 각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그 누구도 똑같을 수 없으며, 그렇기에 다름에 대한 옳고 그름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 연결을 끊고 외롭게 떠 있는 섬은, 다수의 가치관에 위배되는 소수는 배제되고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누군가를 부정하는 순간, 나 역시도 언젠가는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긋남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익숙한 시선은, 서늘하게 다가오곤 하니까. 

 

1942년, 알베르 카뮈의 첫 소설 <이방인>이 출간되었다. 1957년 이 소설로 그는 역대 최연소 노벨문학상을 타게 된다. 하지만 3년후, 그는 교통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일찍 생을 마감한 천재들에게 우리가 갖는 환상과 아쉬움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짙어지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그 긴 시간을 돌아 나에게도 이 소설이 다가오게 된 것 아닐까. 하지만 나에게 무엇보다 더 의미있고,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방인>의 이때까지의 통상적인 번역을 뒤집어 원본에 가장 가깝게 번역되었다고 자부하는 책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방인>이 전세계 101개 국가에서 번역되고 수천만 부가 팔린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 명성만큼 많은 번역가들을 통해 많은 언어들로 번역되며 오역으로 인해 망가진 원작을 자신있게 ‘더이상의 <이방인> 번역은 없다’라고 당당히 말하는 번역자의 자신감에 이때까지 간과하고 있던 번역의 중요성을 조금은 느낄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의 번역은 이 모든 것을 거세시킨 불구였던 것이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이 결코 카뮈의 <이방인>이 아닌 이유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유명한 소설의 첫 구절이다. 부모의 죽음을 알게 된 아들의 말이라기엔 뭔가 이상하다. 첫 문장부터 주인공이자 화자인 뫼르소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며 시작하는 소설은 어떻게 보면 부모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으며 커피를 마시고, 그리고 그 다음날 바로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재밌는 영화를 보며 웃을 수 있는 냉혈한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승진 제의도 거절하는 야망도 없고, 삶에 의욕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별다른 사건 없이 자신만의 작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던 뫼르소에게 레몽이란 친구가 생기고, 그로인해 아랍인과의 마찰에 함께 엮이며 그는 아랍인 한명을 죽이게 된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감옥에 간 뫼르소는 재판을 받게 되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는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항소를 하겠지만 뫼르소는 그 결과를 덤덤히 받아들인다. 자신이 죽어야 하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나는 땀과 햇볕을 떨쳐 버렸다. 나는 내가 한낮의 균형을, 스스로 행복감을 느꼈던 해변의 그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미동도 하지 않는 몸뚱이에 네 발을 더 쏘아 댔고 탄환은 흔적도 없이 박혀 버렸다. 그것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같은 것이었다. 



뫼르소가 레몽, 마리와 함께 떠난 여행에서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아 레몽이 다치게 되고, 뫼르소는 다시 그들에게 찾아가 방아쇠를 당겨 한명을 죽이게 되고 그후에도 네 발을 더 쏘게 된다. 이런 상황만을 봤을땐 친구를 다치게 한 보복으로 아랍인을 죽이게 되었고, 완벽한 살인을 위해 확인사살까지 하는 다분히 고의적인 살인이라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그렇기에 검사 역시 뫼르소에게 사형이라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자 하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사실 그것은 정당방위 였다고, 아랍인이 먼저 칼을 꺼냈기에 쏠 수 밖에 없었다고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뫼르소는 그저 ‘태양 때문에’라는 이유를 대며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를 반항 없이 그냥 받아들인다. 사형선고는 살인을 저질렀기에 내려지는 벌이라 생각되겠지만 사실 법정에서의 검사나 판사나 배심원들이 뫼르소에게 사형을 주는데는 그것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 무정함을 보인 그의 모습,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아무렇지 않게 데이트를 하고 영화를 보는 그의 모습에 더욱 분노하며 벌을 내린다. 살인 역시 벌을 받아야 하는 죄에 해당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삭막한 세상의 규칙을 무시하고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사람의 운명을 결정해 버리는 법정의 모습에 뫼르소는 항소하지 않고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고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카뮈는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라고 자신의 작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 아닐까. 

 


법정에서의 상황이나 사형선고를 받은 후 사제와의 접견에서 보인 신을 부정하는 뫼르소의 모습은 모두 그당시 평범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용납되지 못할 모습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뫼르소를 이해하려고 생각하지도 않거니와 자신들의 생각과 사상에 따라 그를 판단하고 해석한다. 그런 세상의 모습에 대한 반항과 저항으로 뫼르소는 그렇게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된다. 비록 그들은 뫼르소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난 소설을 읽는내내 뫼르소에게서 지금 현재의 우리가 느끼고 있는 고독과 분노를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나이에 따라, 성별에 따라, 지위에 따라 사회가 규정한 모습과 정해진 순서대로 나아가야 하는 불문율이 존재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사람은 루저가 되고 낙오자가 되는 지금이, 뫼르소가 재판을 받던 그 시기보다 오랜시간이 흘렀음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쓰라리게 느껴졌다. 각자의 개성과 각자의 가치관에 맞게 살아가고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해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우린 왜그리도 모두 올바르다 인식되는 규범들에 들어맞는 똑같은 삶을 살길 바라는 걸까. 어떻게 보면 우린 모두 서로에게 이방인일 수 밖에 없음에도 말이다. 


<이방인>을 처음 읽게된 것이 이 책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지 않은 내용의 소설이지만 카뮈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의미들이 글 곳곳에 담겨 있고, 나로서는 찾아내기 힘들었을 소설적 장치와 복선들을 번역자의 해설을 통해 알게 되며 카뮈가 <이방인>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순수하고도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통상 가장 많이 읽히는 다른 번역자의 <이방인>을 읽는 안타까운 시간을 줄일 수 있었던 나지만, 그간 그 내용이 진짜 카뮈의 <이방인>이라 믿었던 수많은 독자들이 꼭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다른 나라의 말을 우리의 말로 옮기며 원작과 100% 똑같은 내용으로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저자가 소설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것을 왜곡해서는 안된다. 기존의 권위있는 번역의 오역과 난해한 의역을 하나하나 짚어내는 그에게 굳이 단어 하나, 쉼표 하나까지도 따져야 하냐며 반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잘된 소설은 첫 문장에서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한 치의 오차도 용납 않고 하나의 주제로 이어져 가고 모아져 가는 것이고 그래야 진정으로 읽히는 것이라 말하는 번역자에게서 <이방인> 이라는 소설과 카뮈에 대한 진한 애정과 그가 원작을 읽으며 느낄 수 있었던 진짜 의미들을 우리에게도 필사적으로 전해주고자 하는 그의 간절함도 느낄 수 있었다. 잘못된 것을 다수의 권위에 짓눌려 말하지 못하고 그저 흘려보내고 그것에 편승하며 사는 것, 아마 카뮈 역시 자신의 소설이 그렇게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엄마는 종종 사람이 결코 전적으로 불행해지는 법은 없다고 말을 하곤 했다. 나는 감옥 안에서, 하늘이 물들고 새로운 날이 내 감방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면, 그 말에 동의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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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 가자고요
김종광 지음 / 작가정신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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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 도시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지금도 살고 있지만 농촌 역시 나에겐 익숙한 곳이다. 아버지도 시골 출신이시라 어린시절부터 멀고 먼 골짜기 할머니집을 다녔기에 농촌의 풍경은 낯설지 않았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며 혼자 사시던 시골에 내려갈 일이 없어졌고, 다신 시골에 갈 일이 없을 줄 알았지만 시골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우리 남편을 만나고 또 시부모님들은 아직 시골에서 살고 계시며 밭농사, 논농사를 지으신다. 그렇기에 어찌보면 비록 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농촌은 내게도 적지 않은 인생의 바탕으로 깔려있어 낯설거나 어색하기는 커녕, 소똥 냄새나 퇴비 냄새, 아궁이를 짚이는 땔깜 타는 냄새나 벌레 소리, 새벽녘 암탉소리마저 내겐 너무나 익숙하기만 하다. 

 

 

하지만 티비에서 그려지는 한적한 시골의 풍경이나 깨끗한 자연환경만이 농촌의 전부는 아니다. 도시 못지 않게 많은 이해관계와 상황들이 얽히고 설킨 곳이 농촌이다. 도시는 언뜻 복잡해 보이지만 어찌보면 도시처럼 간단명료하고 명확하게 짜여지고 단순한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아마 농촌에서의 삶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알고,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그런 농촌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는 소설이 바로 <놀러 가자고요>다. 충남 보령 출신으로 자신의 부모님 역시 아직도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짓는 농촌 사람이기에 저자는 그 누구보다도 그들의 삶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저자의 삶의 바탕속에 새겨진 농촌의 모습은 단순히 농사를 지으며 단순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맞아요. 촌사람은 다 억울해요. 진정 원해서 평생 농사꾼으로 산이가 몇이나 되겠어요. 다들 불쌍해요. 가진 재주가 뭔지 알지도 못하고 안다 한들 펼쳐보지도 못하고. 

9개의 단편 소설들로 구성된 이 소설집은 주된 배경이 되는 범골을 중심으로 어찌보면 9편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서술되는 형식이 다르기도 하고, 그 주체도 모두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있다. ‘범골사 해설’과 ‘범골 달인 열전’으로 소개된 범골의 히스토리와 각각의 인물들의 소개가 이어지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오지랖댁과 노인회장의 이야기로 자세히 이어진다. 노인회장인 남편을 대신해 마을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며 놀러가자 설득하는 오지랖댁의 전화통화 형식으로 된 ‘놀라 가자고요’에서는 오지랖댁과 마을 인물들의 짦은 전화통화 만으로도 각자가 가진 사연들이 전해지며 이제 놀러갈 시간과 기회가 생겼음에도 젊은 시절 혹사하며 이미 고장나 버린 몸을 이끌고 갈 수 없는 많은 농촌 노인들의 상황이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산후조리’에선 소를 키우는 일이 어떤 일인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욕을 하고 불평을 해도 소들을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우고 죽어가는 소들을 살리기 위한 오지랖댁의 정성이 소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며 그녀는 보람을 느끼지만, 못지않게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알 수 있다. ‘만병통치 욕조기’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멀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4백만원이나 하는, 반신욕만으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욕조기를 사고 싶은 부모와, 마음만은 당장 사드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식의 속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부모의 입장도, 자식의 입장도 모두 공감이 되고 자식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자신의 일기장을 놔두고선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써두는 부모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자식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준다. 농촌을 구성하고 있는 대부분이 노인들이고, 자식을 키워 독립시키고 부부내외 또는 사별을 하고 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기에 외롭고 고립된 상황인 노인들의 삶과 시골과 도시라는 물리적인 거리만큼 멀어진 부모와 자식이란 관계에 대해서도 내밀히 살펴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도시의 직장을 다니는 삶에서 보람과 성취를 느끼긴 쉽지 않은 시대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해야하고, 돈 한푼이 아쉬워 버텨내는 직장생활에서 과연 책임감을 가지고 내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일하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있을까. 그냥저냥 시간 떼우고, 적절히 농땡이도 치며 그저 하루하루를 버틸뿐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농사는 그럴 수 없다. 옛날말로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 농사이고 딱 내가 노력한만큼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농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농촌에서의 삶을 시작한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몸을 혹사시켜서라도 더 일하고 더 수확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나이 들어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 늙은 몸밖에 남은 것이 없다. 농사일이 쉽지 않다는 것, 농촌에서의 삶이 절대 녹록치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내가 기억하던 옛날의 농촌과 지금의 농촌은 또 다른 종류의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을 읽으며 느낄 수 있었다. 농촌의 고연령화 같은 고전적인 문제점 뿐만 아닌 지금 현재 농촌의 모습과 갈등을 생생하게 담고 있기에 마치 소설의 배경인 범골 속에서 그 캐릭터들 하나하나가 모두 실존할 것만 같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투박하지만 정겹게 느껴지는 사투리와 찰진 욕들, 곳곳에 녹아 있는 유머들이 잘 어우러져 가장 생생하게 농촌의 모습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해 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촌과 도시라는 너무나도 다르게 느껴지는 두 공간이지만 사실 사람 사는 곳은 자세히 바라보면 어디든 별반 다를바 없다. 하지만 지금의 농촌은 농사로 힘겹게 젊은 시절을 보낸 나이든 노인들만이 남아 힘겹게 명맥을 이어가며 삶의 끝자락을 보내고 있지만 그들에게도 나름의 희망과 욕망이 아직 존재하고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이런저런 사건이 발생하는 도시와 다를바 없는 곳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농촌의 이야기를 조명하고 또 그것을 생동감 있고 재밌게 풀어내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어찌보면 소외된 많은 농촌의 실상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와! 솔직히 저는 얘들이 못 살 거라고 봤슈. 워칙히 살았지? 살라는 의지들이 강했구만. 그려, 참 보기 좋다. 조금만 거시기하면 못 살겠다고 살기 싫다고 확 가버리는 인간들보다 너희들이 훨씬 낫다. 안 그러냐? 누구는 뭐 희망이 넘쳐서 사냐? 열심히 사는게 사람의 운명이니께 그냥저냥 사는 거지. 사는 게 희망 아니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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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문학자의 걷기 예찬
아널드 홀테인 지음, 성립 그림, 서영찬 옮김 / 프로젝트A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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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내뿜는 상쾌하고도 깨끗한 공기, 바람이 불어 소리내는 나뭇잎 흩날리는 소리, 걸을때 느껴지는 흙의 보드라운 촉감. 그리고 시선을 돌려 위를 바라보면 초록 나무 사이로 보이는 청명한 하늘. 미세먼지와 소음공해로 가득한 도시에서 늘 그리운 것들이다. 목적지 없이 그저 걷다 보면 어지럽던 생각들이 하나씩 정리되고, 또 힘겹게 느껴지던 일들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지기도 하는, 자연과 걷기의 시너지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그렇기에 도시에서도 둘레길을 조성하여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 아닐까. 



회반죽이 덧칠된 천장과 카펫이 깔린 바닥, 벽지가 발라진 사면의 벽 안에 갇혀 있는 당신은 구름이 덧칠된 하늘을 결코 알지 못한다. 머리 위에서 지평선까지 무한대로 뻗은 그 하늘을 보며 내가 알게 된 것을 당신은 알 리 없다. 


 

 

 

저자는 19세기와 20세기를 걸쳐 살며 신화, 문학, 음악 등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자연을 사색한 인문학자였다. 아마 그 바탕엔 영국군 장교인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을 인도에서 보낸 것이 사색을 즐기는데 큰 영향을 줬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저자는 36권의 책을 남겼음에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진 않다. 이 책은 1903~1904년 미국에서 발행된 잡지에 연재된 글을 묶은 것으로 자연에서 걷고 사색하며 느끼고 깨달은 것들이 담겨 있다. 사실 꽤 오래전에 쓰인 책임에도 지금 우리에게 유행하는 자연과 함께 걷기에 대한 중요성과 의미를 이야기하기에 큰 괴리감 없이 다가온다. 아마 저자가 살았던 시기에 걷기란 별다른 의미 없는 행위였을 것이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걷기란 그저 일상의 한부분일뿐 그것이 운동이나 여가생활로서 인식되지 않았을 텐데 저자는 걷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발견한다. 하지만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그저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함께 걷고 그 걷기속에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고 삶에 대해 사색하는 자세를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방대함과 숭고함을 마주하며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렇기에 평소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풀 한포기, 이름모를 벌레 한마리에도 감탄하며 자연의 위대함을 깨닫는 저자의 걷기는 그저 두 발로 딸을 딛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세상을 향해 내딛는 행위인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도 유행인 둘레길이나 제주의 올레길, 트래킹이 그저 자연의 경치를 즐기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많은 변화와 발전을 겪으며 잊고 지냈던 것들을 다시금 찾아가고 있지만 저자는 그전에 이미 걷기를 통해 깨달음의 길을 찾고 자신의 삶을 넘어선 자연과 우주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으로까지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곧잘 무한대로 변화무쌍한 이 세계를 우리집, 우리 서식지, 우리 것이라 부른다. 또한 이 세계에서 우리는 주인이나 영주 노릇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계가 결국은 진정한 대영주가 관할하는 영지의 코딱지만 한 땅뙈기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주 간과한다. 


 

 

 

 

 

도시에서 나고 자랐고, 도시의 편리함과 익숙함에 물들어 시골과 자연이 낯설기만 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일상이기에 하루에 걷는 시간은 길지 않다. 운동 삼아 억지로 걸을때도 있지만 자연을 벗삼아 걸을 환경은 되지도 않거니와 마음에서 우러나 사색하며 걸었던 기억은 최근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젊은시절엔 가끔 등산을 하면 좋은 공기와 눈이 정화되는 초록잎을 가득 보며 싱그러운 기운을 느끼곤 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갈 수 없으니 정말 자연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는동안 저자가 걷기를 통해 만난 자연의 모습이 아름답고도 서정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그것만으로도 눈앞에 그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기도 했다. 게다가 저자는 그 길에서 작은 풀 한포기, 벌레 한마리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것을 통해 위대한 자연과 나아가 우주의 의미까지 생각하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가 얼마나 걷기를 사랑했고 그로인해 자연의 숭고함을 예찬하게 되고 자연과의 내밀한 만남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실 도시에서 살다보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고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간다. 그런 환경에서 자신의 생각을 비우고 깊은 사색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억지로라도 그런 환경속으로 들어가 비우고,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몸으로 하는 산책이지만 사실 그로인해 자신의 마음을 산책할 수 있는 시간으로 이어지기에 저자가 살았던 그 시대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던 시대나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쁘게 살다보면 많은 것을 놓치고, 또 자만하며 살아갈 때가 많다. 그럴때 자연과 함께 걸으며 자신 역시 자연 앞에 미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 한 인간일 뿐이라는 겸손함을 마주한다면, 인생을 좀 더 소중하고 더 가치있게 여기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해본다. 



이른 아침의 걷기는 금세 끝나버렸다. 하지만 나는 이날 아침 걸었던 길을 쾌청한 하늘 아래 걸었던 수많은 다른 길과 결코 맞바꾸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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