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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양장) - 개정증보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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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섬이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섬들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섬들은 바다 밑에선 서로 연결돼 있다.”
- 영화 About a Boy
우린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함께 살아가더라도 하나의 인간으로서 각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기에 그 누구도 똑같을 수 없으며, 그렇기에 다름에 대한 옳고 그름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 연결을 끊고 외롭게 떠 있는 섬은, 다수의 가치관에 위배되는 소수는 배제되고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누군가를 부정하는 순간, 나 역시도 언젠가는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긋남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익숙한 시선은, 서늘하게 다가오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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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알베르 카뮈의 첫 소설 <이방인>이 출간되었다. 1957년 이 소설로 그는 역대 최연소 노벨문학상을 타게 된다. 하지만 3년후, 그는 교통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일찍 생을 마감한 천재들에게 우리가 갖는 환상과 아쉬움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짙어지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그 긴 시간을 돌아 나에게도 이 소설이 다가오게 된 것 아닐까. 하지만 나에게 무엇보다 더 의미있고,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이방인>의 이때까지의 통상적인 번역을 뒤집어 원본에 가장 가깝게 번역되었다고 자부하는 책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방인>이 전세계 101개 국가에서 번역되고 수천만 부가 팔린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그 명성만큼 많은 번역가들을 통해 많은 언어들로 번역되며 오역으로 인해 망가진 원작을 자신있게 ‘더이상의 <이방인> 번역은 없다’라고 당당히 말하는 번역자의 자신감에 이때까지 간과하고 있던 번역의 중요성을 조금은 느낄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의 번역은 이 모든 것을 거세시킨 불구였던 것이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이 결코 카뮈의 <이방인>이 아닌 이유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유명한 소설의 첫 구절이다. 부모의 죽음을 알게 된 아들의 말이라기엔 뭔가 이상하다. 첫 문장부터 주인공이자 화자인 뫼르소에 대한 강한 인상을 심어주며 시작하는 소설은 어떻게 보면 부모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으며 커피를 마시고, 그리고 그 다음날 바로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재밌는 영화를 보며 웃을 수 있는 냉혈한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승진 제의도 거절하는 야망도 없고, 삶에 의욕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별다른 사건 없이 자신만의 작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던 뫼르소에게 레몽이란 친구가 생기고, 그로인해 아랍인과의 마찰에 함께 엮이며 그는 아랍인 한명을 죽이게 된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감옥에 간 뫼르소는 재판을 받게 되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는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항소를 하겠지만 뫼르소는 그 결과를 덤덤히 받아들인다. 자신이 죽어야 하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나는 땀과 햇볕을 떨쳐 버렸다. 나는 내가 한낮의 균형을, 스스로 행복감을 느꼈던 해변의 그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미동도 하지 않는 몸뚱이에 네 발을 더 쏘아 댔고 탄환은 흔적도 없이 박혀 버렸다. 그것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같은 것이었다.
뫼르소가 레몽, 마리와 함께 떠난 여행에서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아 레몽이 다치게 되고, 뫼르소는 다시 그들에게 찾아가 방아쇠를 당겨 한명을 죽이게 되고 그후에도 네 발을 더 쏘게 된다. 이런 상황만을 봤을땐 친구를 다치게 한 보복으로 아랍인을 죽이게 되었고, 완벽한 살인을 위해 확인사살까지 하는 다분히 고의적인 살인이라는 것이 명백해 보인다. 그렇기에 검사 역시 뫼르소에게 사형이라는 가혹한 형벌을 내리고자 하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사실 그것은 정당방위 였다고, 아랍인이 먼저 칼을 꺼냈기에 쏠 수 밖에 없었다고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뫼르소는 그저 ‘태양 때문에’라는 이유를 대며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를 반항 없이 그냥 받아들인다. 사형선고는 살인을 저질렀기에 내려지는 벌이라 생각되겠지만 사실 법정에서의 검사나 판사나 배심원들이 뫼르소에게 사형을 주는데는 그것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는 무정함을 보인 그의 모습,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아무렇지 않게 데이트를 하고 영화를 보는 그의 모습에 더욱 분노하며 벌을 내린다. 살인 역시 벌을 받아야 하는 죄에 해당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삭막한 세상의 규칙을 무시하고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사람의 운명을 결정해 버리는 법정의 모습에 뫼르소는 항소하지 않고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고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카뮈는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라고 자신의 작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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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의 상황이나 사형선고를 받은 후 사제와의 접견에서 보인 신을 부정하는 뫼르소의 모습은 모두 그당시 평범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용납되지 못할 모습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뫼르소를 이해하려고 생각하지도 않거니와 자신들의 생각과 사상에 따라 그를 판단하고 해석한다. 그런 세상의 모습에 대한 반항과 저항으로 뫼르소는 그렇게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된다. 비록 그들은 뫼르소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난 소설을 읽는내내 뫼르소에게서 지금 현재의 우리가 느끼고 있는 고독과 분노를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나이에 따라, 성별에 따라, 지위에 따라 사회가 규정한 모습과 정해진 순서대로 나아가야 하는 불문율이 존재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사람은 루저가 되고 낙오자가 되는 지금이, 뫼르소가 재판을 받던 그 시기보다 오랜시간이 흘렀음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쓰라리게 느껴졌다. 각자의 개성과 각자의 가치관에 맞게 살아가고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해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우린 왜그리도 모두 올바르다 인식되는 규범들에 들어맞는 똑같은 삶을 살길 바라는 걸까. 어떻게 보면 우린 모두 서로에게 이방인일 수 밖에 없음에도 말이다.
<이방인>을 처음 읽게된 것이 이 책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지 않은 내용의 소설이지만 카뮈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의미들이 글 곳곳에 담겨 있고, 나로서는 찾아내기 힘들었을 소설적 장치와 복선들을 번역자의 해설을 통해 알게 되며 카뮈가 <이방인>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순수하고도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통상 가장 많이 읽히는 다른 번역자의 <이방인>을 읽는 안타까운 시간을 줄일 수 있었던 나지만, 그간 그 내용이 진짜 카뮈의 <이방인>이라 믿었던 수많은 독자들이 꼭 다시 한번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다른 나라의 말을 우리의 말로 옮기며 원작과 100% 똑같은 내용으로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저자가 소설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것을 왜곡해서는 안된다. 기존의 권위있는 번역의 오역과 난해한 의역을 하나하나 짚어내는 그에게 굳이 단어 하나, 쉼표 하나까지도 따져야 하냐며 반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잘된 소설은 첫 문장에서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한 치의 오차도 용납 않고 하나의 주제로 이어져 가고 모아져 가는 것이고 그래야 진정으로 읽히는 것이라 말하는 번역자에게서 <이방인> 이라는 소설과 카뮈에 대한 진한 애정과 그가 원작을 읽으며 느낄 수 있었던 진짜 의미들을 우리에게도 필사적으로 전해주고자 하는 그의 간절함도 느낄 수 있었다. 잘못된 것을 다수의 권위에 짓눌려 말하지 못하고 그저 흘려보내고 그것에 편승하며 사는 것, 아마 카뮈 역시 자신의 소설이 그렇게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엄마는 종종 사람이 결코 전적으로 불행해지는 법은 없다고 말을 하곤 했다. 나는 감옥 안에서, 하늘이 물들고 새로운 날이 내 감방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면, 그 말에 동의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