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새움 세계문학전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장현주 옮김 / 새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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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 가는 것은 슬프다. 해가 지는 순간, 젊음이 저물어 가는 순간, 삶이 저물어 가는 순간... 사양길로 접어든 모습들에서 느껴지는 씁쓸함은 속이 절로 쓰려오게 만든다. 필사의 노력으로 물불 가리지 않으며 오른 정상에서 더이상 올라갈 곳이 없이 내려오는 일만이 남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 길이 조금이라도 힘들지 않을까. 아마 알고 있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손에 쥔 익숙한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저물어 가는 것은 슬프기만 하다. 붙잡고 싶은 마음, 그저 머물고 싶은 마음. 



아아, 돈이 없다는 것은, 이 얼마나 무섭고 비참하며 구원 없는 지옥인가, 라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깨닫는 기분에, 가슴이 벅차고 너무도 괴로워서 울고 싶어도 울지 못했다. 인생의 엄숙함이란 이런 때의 느낌을 말하는 것일까, 꼼짝할 수 없는 기분으로, 똑바로 누운 채, 나는 돌처럼 가만히 있었다.


 

이 작품은 초판 발행 부수만 1만 부, 2판 5천 부, 3판 5천 부, 4판 1만 부를 거듭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다자이 오사무를 일본의 대표 작가로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전쟁후 혼란스러운 시대적 상황에서 몰락해 가는 상류계급 사람들을 가리키는 ‘사양족’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고, 국어사전에 ‘몰락’이라는 의미를 더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생가인 기념관은 이 소설의 제목을 따서 ‘사양관’이라 이름 붙여지기도 할만큼 <사양>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사랑, 이라고 쓰고 나니, 뒤를 쓸 수 없게 되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아직도 귀족이라는 허울에 둘러싸여 귀부인으로 살다 죽어가는 어머니, 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민중으로 살아가고 싶었지만 결국 마약과 술에 절어 자살하는 나오지, 역시 마약과 술에 중독되어 퇴폐적인 생활을 하는 나오지가 따르는 소설가 우에하라, 그리고 사랑과 혁명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목표임을 인식하고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가즈코. 소설은 가즈코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풀어간다. 몰락한 귀족인 가즈코의 집안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도쿄의 저택을 팔고 하녀들도 모두 내보낸채 시골로 내려와 살게 된다. 귀부인의 자태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피는 가즈코지만 어머니는 병으로 결국 죽게 되고 나오지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채 스스로 자살하게 된다. 가즈코가 첫번째 만남에서 우에하라에게 사랑을 느끼고 두번째 만남에서 맺은 관계로 임신을 하지만, 우에하라 역시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홀로 남게 된 가즈코는 이혼녀에 미혼모라는 험난한 상황을 맞이하지만 그녀는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며 살아가고자 한다. 



6년 전 어느 날, 저의 가슴에 아련하고 희미한 무지개가 걸렸는데, 그것은 연애도 사랑도 아니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 무지개의 색채는 더욱 선명해져서,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것을 놓친 적이 없었습니다. 소나기가 걷힌 하늘에 걸린 무지개는 이윽고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만, 사람의 가슴에 걸린 무지개는 사라지지 않는 듯합니다.


 

가즈코의 생각이 처음엔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한번의 짧은 만남에 연정을 가지고 그 사랑으로 힘든 상황을 버텨내는 것이 가능할까 싶었다. 비록 약한 존재지만 의지하고 사랑했던 어머니의 죽음과 남동생의 자살, 게다가 몰락한 귀족으로 더이상 돈도 없어 물건을 팔아가며 연명해야 하는 상황. 가난이라는 높은 벽과 가족의 죽음이라는 절망속에서 가즈코가 버텨낼 수 있었던건 우에하라에 대한 사랑과 그로인해 가지게 된 아이였고, 이혼녀와 미혼모라는 지금 시대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상황이 되었음에도 그로인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힘을 얻게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래도 어쨋든 그녀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강한 의지를 보이며 소설이 끝나기에 비록 제목은 <사양>으로 저녁 때의 햇빛을 일컫는 말이지만 주인공인 그녀만은 저물어 가지 않는 떠오르는 희망의 빛을 찾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놓아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다.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추악한 짓들을 저지르면서까지 부와 명예를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런면에서 가즈코는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려 노력하고 목표와 대상을 분명시하여 자신만의 의지할 대상을 만들어내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만드는 당당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비록 우울한 소설속 상황과 시대속에서도 일말의 희망적인 메세지를 우리에게 던져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무언가 이 사람들은 잘못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내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내야만 한다면, 이 사람들의 이 살아내기 위한 모습도, 미워해서는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 살아 있는 것. 아아, 그것은, 그 얼마나 견딜 수 없고 숨도 곧 끊어질 것 같은 대사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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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새움 세계문학전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장현주 옮김 / 새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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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가져야 할 조건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별 생각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가끔 마주하게 되는 깊이 있는 생각들 속에선 이상하게도 어둡고 무거운 모습만을 바라보게 된다. 내가 내 인생을 되돌아 봤을 때, 아무 고민 없이 행복했고 만족스러웠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스스로를 책망하고 후회할 일 투성이의 과거를 떠올리며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때, 남들이 보는 나의 모습과 내가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나의 모습과의 거리가 크면 클수록 그 괴리감에 짓눌려 점점 더 진짜 나의 모습을 감추게 되곤 한다. 능수능란하게 행복을 연기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 속에 함께 동화되어 있는 나를 볼 때면 소름이 돋다가도, 이내 그것마저도 익숙해져 의미없는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에 대해, 언제나 공포로 부들부들 떨고, 또,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언동에 눈곱만큼의 자신감도 갖지 못한 채, 저 혼자의 고뇌는 가슴속 작은 상자에 감추고, 그 우울, 신경과민은 기를 쓰고 숨기며 오직 천진난만한 낙천성을 가장하여, 저는 익살스러운 괴짜로 서서히 완성되어 갔습니다.


 

20세기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삶은 한 편의 영화보다 더 흥미롭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바쁜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 대신 이모와 유모의 손에 길러진 어린 시절, 명문 대학교에 입학하지만 졸업하지 못하고 중퇴, 술과 마약과 연애로 보낸 청춘, 하지만 소설가로 성공해 ‘천재 작가’이자 ‘일본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는 기성 문학 전반에 비판적이었던 무뢰파의 선두주자로 활동하였다. 반권위ㆍ반도덕을 내세우며 세상의 일반적 생각이나 생활 방식에 반대하는 무뢰파의 모습은 전후 허무주의가 팽배하던 분위기 속에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일생동안 네 번의 자살 미수를 거치며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되기도 하고 건강 또한 악하되는등 힘든 나날을 보내다 마지막 다섯 번째 자살시도로 세상을 떠났다. 그 시체가 발견된 것이 그의 서른 아홉번째 생일날 이었다고 한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었다. 
 

 

주인공인 요조는 겉으로 봤을 땐 모두의 부러움을 살 만한 인물이다. 부잣집의 막내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란 것 같지만 사실 요조는 겉으로는 익살을 부리며 다른 사람을 웃기고 행복을 연기하지만 그 속은 어둡고 참혹함으로 가득하다. 그렇게 사람들을 완벽하게 속이며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어느날 한 친구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간파당한다. 자신의 삶을 혐오하며 살아가는 요조는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잊기위해 술,담배,여자,마약등에 빠지며 점점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고 결국 자살시도로 이어진다. 사실 <인간실격>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요조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의 삶 또한 같은 모습으로 떠오르게 된다.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요조의 삶이 행복할 수 있을리가 없다. 남들의 눈에 더없이 행복해 보일 수 밖에 없는 많은 조건들도, 본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 그로인한 고뇌와 고통이 쌓여 점점 진짜 자신의 모습을 잃어간다면 살아가는 의미조차 느낄 수 없게 된다. 



겁쟁이는 행복조차 두려워합니다. 솜에 상처를 입습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처입기 전에 빨리 이대로 헤어지고 싶은 마음에 초조해져 예의 익살로 연막을 쳤습니다.


 

 

 

누구에게나 아픔과 시련은 있게 마련이다. 스스로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아픔은 더 멀리 가기 위한 디딤돌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자가 가진 아픔이 모두 같을 순 없다.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스스로가 인정하지 못하고 받이들이지 못한다면 점점 더 그것을 숨기고 남들과 같은 모습으로 왜곡되게 꾸미게 된다. 요조의 삶이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사실 난 <인간실격>을 읽으며 그간 내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도 비슷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항상 나 자신의 마음보다 상대방의 시선에 신경쓰고, 자신이 손해보더라도 상대방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고 싫을때도 많았다. 요조처럼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진 않았지만 스스로 항상 부족하다 느꼈고 자신감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가감없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모양은 모두 다르지만 각자만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요조의 모습을 조금씩은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요조의 삶이 공감되기도 하고 안타깝게도 느껴진다. 자신의 삶을 소설에 그대로 투영한 듯한 작가가 느꼈을 진짜 삶의 고뇌가 <인간실격>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지기에, 그저 소설로만 치부하며 읽을 순 없었다.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과, 나역시 이때까지 살아온 삶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드는, 평범하고 행복한 삶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지를 절실히 느낄 수 있게 해주었던 것 같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 세계에 있어서, 단 하나, 진리처럼 느껴진 것은, 그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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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사랑하는 너에게 : 뻔하지만 이 말밖엔
그림에다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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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사랑이란 존재할까라는 의문을 예전엔 가졌던 것 같다. 사랑하는 연인과도, 친구와도, 동료와도 여차하면 돌아서 남남이 될 수 있기에 완벽한 사랑이란 없다고 생각했었다. 가족간의 사랑도 모두 똑같이 사랑하고 모두 영원할 순 없다. 사소한 돈 문제와 가치관 차이로 언제든 남처럼 멀어질 수 있는 것이 가족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사랑은 완벽하게 헌신하고 희생할 각오가 담긴 그 무엇보다 엄청난 힘과 무게를 지닌 사랑이다. 완벽한 부모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부족한 것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고 아이가 원하는 모든 것을 100% 들어줄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이 세상 가장 강력한 사랑의 형태를 꼽으라면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사랑이 아닐까. 



내가 누군가를 필요하다고 느낄 때, 누군가가 나를 필요하다고 느낄 때 존재 이유를 알게 된다고들 한다. 가족 안에 그 답이 있다는 걸 알기까지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느낌이다. 늘 그렇듯 답은 가까이에 있었다. 


 

저자는 14년 동안 지극히 평범한 회사 생활을 하다 육아 휴직을 했다. 이때 SNS에 ‘그림에다’라는 필명으로 아들과의 시간을 기록했고, 많은 부모들에게 공감을 얻어 《천천히 크렴》이라는 책을 냈다. 다시 회사에 복직하고, 회사원과 작가라는 이중 생활을 시작했다. 그래서 더 바빠지기도 했지만, 아들과의 깊어진 애착 관계를 통해 ‘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 답을 찾아 온 가족이 지구 반대편 핀란드로 떠났다. 그곳에서 직접 살아본 이야기들을 엮어 《똑똑똑! 핀란드 육아》라는 책을 냈고, 같은 고민을 하는 전국의 부모들에게 강연으로 그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아이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아빠가 필요한 순간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진정 아빠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겠구나 싶다.
나는 서서히 아빠라는 이름에 물들어 간다.

 

 

 

우리나라에서 아직 아빠가 육아휴직을 쓴다는 건 생소한 일이다. 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당연하고 아빠들은 늦게 퇴근해 아이의 잠든 얼굴만을 보아야 할 때가 많다. 하루종일 혼자 아이를 봐야 하는 엄마의 힘듦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아빠들은 아이와의 교감부족으로 점점 멀어지게 된다. 옛날 아빠는 돈만 잘 벌어와도 인정받고 아빠로서의 의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었지만 이젠 시대가 변했다. 육아는 혼자만의 일이 아니며 부부 공동의 일, 가족이 함께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의 저자는 아이와 아내를 위해 육아휴직을 하고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일을 분담하며 엄마에게도 자신만의 시간이 주어지며 아이는 아빠와 친밀해지고 아이의 성장과 가족의 성장을 함께 겪어나간다. 네이버 맘키즈 콘텐츠에서 베스트 인기 콘텐츠로 꼽히며 많은 부모들에게 공감을 얻은 건 아이의 성장 과정과 함께 부부의 성장 과정 또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육아에 대한 팁이나 고단함을 드러내기 보다 부부가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점점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걸어가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래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이를, 아내를, 가족을 간결한 그림과 담담한 문체로 기록한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저자의 가족에 대한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지기에 아이를 키우는 똑같은 상황의 수많은 부모들에게 큰 공감과 감동을 일으킨다. 



가족은 그렇게 잊혀질 수 없는 기억들로 연결되어 서로를 확인한다.


 

 

글도 그림도 모두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그 수수함과 단순함에서 그 무엇보다 깊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묻어난다. 그래서 더 큰 감동이 밀려오는 지도 모르겠다. 단숨에 읽어 나갔지만 격하게 고개 끄덕이기도 하고 진짜 우리집 사진을 찍어서 저자가 그려둔 것은 아닌지 순간 의심이 들기도 할 정도로 비슷한 상황들에선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중간중간 예고 없이 가슴에 훅 하고 날아드는 감동들에 눈물이 고여 억지로 참아내느라 혼나기도 했다. 나도 아이를 키우며 시간이 흐를수록 드는 생각이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란다는 것이다. 고된 육아의 시간이 그 당시엔 길게 느껴지지만 지나고 나면 그 시간이 얼마나 찰나와 같이 짧은 순간이었는지를 느끼는 순간 찾아오는 감정은 참으로 복잡하다. 그래서 아이의 사소한 작은 행동도 놓치고 싶지 않아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고 가득찬 사진함의 옛사진을 보며 추억과 그리움에 젖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육아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이고 힘든 순간도 많지만 혼자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버텨낼 수 있다. 남편의 작은 배려와 사소한 위로만으로도 지금보다 더 행복한 육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마 많은 엄마들이 말하고 있지만 남편들은 이상하게도 잘 알아차리질 못한다. 모쪼록 많은 남편들이 아빠의 시선에서 쓰인 이 책을 많이들 읽어 모든 가정에서 행복한 육아를 하고, 지금 아이와 함께하는 이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때는 힘들어도 지나고 나면
아쉬움이 남는 것 중에 하나가 육아 아닐까?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돌아가도
또 아쉬움이 남는다면
지금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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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달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윤동교 지음 / 레드우드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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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내 생활에도 여유가 생겼지만 막 첫째를 낳고 나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을 시기엔 정말 큰 멘붕의 시간을 보냈다. 내 한 몸 건사하는 것도 버거웠던 나인데 내 시간의 대부분을 아이에게 할애해야 했던 시간은 내게 버거웠다. 우울증까진 아니더라도 무기력한 기분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분명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정적이고 행복했지만 ‘나’라는 주체가 없어진 삶은 도저히 쉽게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다행히 지금은 어느정도의 여유가 생기며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며 삶의 밸런스를 어느정도 잘 맞춰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비는 언제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권태는 지독하고 무기력은 집요한데 의지는 엿 같았다. 의지란 마치 한 덩어리의 엿과 같아서 강할 땐 상대의 머리도 가차 없이 깨뜨려 버리지만, 약할 땐 흐물흐물 형체 없이 죽죽 늘어지기만 하는 법이다. 지금 내 상태가 딱 그랬다. 죽죽 늘어지는 엿. 아랫목에 올려놓은 엿. 언제 다시 단단해질지 정녕 알 수 없는 엿.


 

20대 때 만화책을 스승 삼아 그림을 독학한 저자는 대학교에서 대자보만 열심히 쓰다가 회의를 느낀 나머지 본격 그림을 그리겠다며 역사교육과를 중퇴하였다. 20대 중반 핸드메이드 장사에 덤벼들었다가 장렬히 망한 뒤, 장사는 자신의 길이 아니란 걸 확인하고, 이후 방송 그래픽, 플래시 애니메이션, 온라인 광고, 일러스트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하였다. 무기력과 권태에 짓눌려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버텨 내던 그녀는 어는 날, 딱 한 달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드러누워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 보자 결심하고 훌쩍 제주도로 떠났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깨달았다. 아무것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직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려면 완벽하게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혼자가 되려면 모든 것에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든 것에 거리를 두려면 정말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결혼 9년차 유부녀인 저자는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게 된다.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만사가 귀찮고 쉽게 짜증을 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점점 어두운 방으로만 들어가게 된다. 번아웃 증후군이 뭔지도 모르던 그녀는 우연히 자신의 증상을 모두 나열해 검색해 본 결과, 이 증상이 번아웃 증후군임을 알게 된다. 세상에 자신같이 힘들고 불행한 사람은 없을 거란 생각과 다르게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는 직장인이 10명 중 9명에, 국민의 70%는 무기력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제주도 한달 살기를 결심하게 된다. 
 

 

제주도 한달 살기를 계획하지만, 한달 살기는 의외로 이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져 있었다. 아픈 아이를 위해 내려오거나 은퇴후 노년을 제주도에서 보내기위해 긴시간 머무는 등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제주도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의 목적은 단 하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세상 그 누구의 간섭 없이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힘들게 구한 숙소에서 나가지 않은채 여태껏 가져보지 못한 여유를 누리며 처음엔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료함은 늘어나고 바쁘게 살아온 탓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며 또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 하지만 그로인해 자신을 깊게 돌아보게 되고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어 인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자아성찰의 시간까지 가진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철저히 혼자인 시간이 가져다 주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동안 달려오던 관성을 이겨 내야 하고, 내 안의 잔소리꾼을 잠재워야 하며, 생각과 감정의 늪에서 헤엄쳐 나와야 하고, 거대한 심심함의 무게를 견뎌 내야 하며, 1초가 1분 같은 시간의 왜곡에서 하루를 살아 내야 하는 엄청난 일이었다. 


 

모든 걸 뒤로한채 제주도로 내려왔지만 주변 사람들의 걱정, 참견은 끝이 없다. 예전 같으면 인간관계에 치여 자신의 진심은 뒤로한채 괜찮은 척, 행복한 척 연기하며 피곤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나의 결정에 쉽게 단정 짓고 선을 그어 비난하고 질책하곤 한다. 그 상처와 스트레스는 쉬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관계라는 끈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저자는 타인과 거리를 두고 누가 뭐라든 나로 사는 경험을 하며 남들의 시선과 기준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따라갔다. 자신을 최선에 두고 한 달 동안 진심을 다해 나와 마주한 것이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혼자 한달이라는 긴 시간을 떠날 용기와 여건이 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짧은 일주일이라도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내기에도 벅찬게 사실이다. 그러나 인생의 낭떠러지에 다다랐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다가오면 그저 떨어져 버릴 것이 아니라 뒤돌아 한걸음 한걸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보면 조급함이 생기기 마련이다. 시간을 헛되이 쓰는 것 같고, 뭔가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것 같고, 누군가 나를 비난할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저자의 제주도 한달살기의 결과를 보면 마음 놓고 모든 걸 놓아버리는 시간도 분명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선택까지의 큰 부담감을 떨쳐내고 좀 더 가뿐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길고 긴 인생에서 한달이란 시간은 절대 긴 시간이 아니다. 나를 위해 충분히 쓸 수 있는 시간이고, 많은 시행착오와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어도 저자에겐 그 시간속에서 진짜 자신을 찾을 수 있었기에 그 무엇보다 값진 시간이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 나를 응원해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무엇보다 나를 믿고 사랑하는 나 자신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떠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비록 저자처럼 긴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더라도 나를 돌아보는 시간은 삶에서 언제나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당장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고 생활을 잘 영위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생각해 보면 평생 방치하고 내버려 둔 ‘나’였다. 오랜 시간에 걸쳐 지금의 상황에 이른 만큼 해결되려면 많은 시건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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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늑대의 피
유즈키 유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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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대해 큰 신뢰를 가지고 있진 않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정경유착이나 그들이 말하는 정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시민의 안전과 보호보다는 자신들만의 영역을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우리가 기득권들에게서 받는 실망감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 늑대가 피 비린내를 맡고 흥분하며 이빨을 드러내듯, 돈이나 권력의 냄새를 맡고 흥분하며 달려드는 부패한 경찰들의 모습을 영화에서 너무 실감나게 자주 마주쳤기에 그런걸까. 아니면 더욱 잔혹한 현실세계에서 마주칠 수 있는 섬뜩한 우리들의 이야기 때문일까. 정의가 무엇이고 불의가 무엇인지, 선과 악이 불분명한 뒤죽박죽 세상에선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군도 없는 그저 진실만이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검은 개도 흰 개도 모두 개다.



 

 

저자는 2007년 야마가타신문에서 주최하는 ‘야마신문학상’ 대상을 수상하고, 2008년 <임상 진리>로 제7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을 수상하면서 마흔 살의 나이에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어린 시절 셜록 홈스를 읽으며 소설에 눈뜨고, 지역 생활정보지에서 취재 기자로 활동하다가 문예평론가 이케가미 후유키의 강좌를 수강한 것이 계기가 되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남자들의 세계에 관해 쓰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대로 2015년 작가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을 맞게 해준 <고독한 늑대의 피>를 발표하고 제69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았다. 


구레하라 동부서 수사 2과의 폭력단계 반장 오가미는 경찰 표창이 100회가 넘지만 그에 반해 징계 처분도 최고인 묘한 인물이다. 언뜻 보면 형사인지 야쿠자인지 구분이 힘들 정도다. 그래서 야쿠자와의 유착 관계를 의심 받는 오가미와 함께 일하게된 히오카는 히로시마 대학교를 졸업한 이른바 ‘학사님’인 정의와 원칙을 중요시하는 햇병아리 경찰이다. 처음부터 히오카는 오가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수사 과정에서 폭력, 금품갈취, 협박까지 서슴지 않는 오가미는 말한다. ‘야쿠자를 이해하려면 그들처럼 불합리한 세계에 살아야 하는 거야.’ 그러던 중 구레하라의 가코무라구미라는 폭력단계 불법 금융회사의 경리로 일하던 우에사와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단순한 가출이 아니라는 것을 오가미는 직감한다. 가재도구도 그대로 두고 야반도주 하듯 종적을 감춘 것과 가코무라구미가 혈안이 되어 우에사와를 찾고 있다는 것은 분명 단순한 가출이나 도주가 아닌 것이다. 우에사와의 실종으로 시작되어 서서히 드러나는 가코무라구미와 오다니구미의 세력 다툼이 개입된 총격전과 의문의 죽음들은 점점 늘어나 서로간 항쟁으로 번질 위험에 다다른다. 그와 함께 뒤늦게 14년 전 미결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오가미가 지목되고 그동안 야쿠자와의 유착 관계로 의심 받던 오가미에게 위기가 찾아 오게 되는데...



수사에 대한 오가미의 열정 앞에서는 머리가 숙여지지만, 그 모습은 마치 먹이를 찾아 헤매는 굶주린 늑대 같았다.

 

 

 

일본의 경찰과 야쿠자간의 대결이라는 소재는 강렬하지만 신선하지는 않다. 일본이 아닐지라도 한국의 느와르나 경찰 하드보일드를 표방하는 많은 영화들에서도 조폭과 경찰의 대립 구도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소재를 속도감 있고 정교하게 그려내며 그 안에서도 각각의 캐릭터들이 가진 개성이 살아있고 유머와 감동도 섞여 있어 읽는 내내 손에서 놓치 못하고 휘몰아치게 읽게 만드는 몰입감을 안겨 준다. 여성 작가가 소위 남자의 세계라고 일컬어지는 야쿠자의 세계를 써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아마 미리 작가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면 필히 남성 작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박력이 넘친다. 주인공인 오가미는 사실 처음엔 그저 사건 해결을 위해 제멋대로인 위압적인 인물 같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가진 상처와 정의를 지켜내기 위한 진심이 드러나며 그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히오카가 오가미를 통해 성장하고 결국엔 오가미의 뒤를 이어 진짜 경찰이 되어가는 모습 또한 흥미롭다. 게다가 예상치 못한 반전에 흠칫 놀라게도 해주니 내가 좋아하지 않는 소재임에도 푹 빠져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어른이 되어보니 정의라는 것을 확신하지도, 또 희망하지도 않게 되었다. 하지만 부조리한 현실에 불의가 넘쳐나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희망을 바라지 않을 때쯤 영웅처럼 짠하고 정의로운 누군가가 나타나 질서를 바로 잡아줄 때,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만 하다며 위안을 얻곤 한다. 비록 그 과정이 석연치 않더라도 오가미는 자신이 확신하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는 우직함, 거기에 누군가를 위하는 따뜻한 마음까지 실제 그런 경찰들을 많이 만나보진 못했지만 분명 그런 사람들이 이 사회에도 많이 존재할 것이다. 내가 믿고 있는 정의도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다. 가끔은 냉혹한 현실을 직시할 필요도 있다. 



법률은 사적 처벌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법률이 가네무라를 제대로 심판하지 못한다면 정의는 어떻게 되겠는가? 살해를 저지른 아키코와 살해를 당한 가네무라, 실체적 정의는 어느 쪽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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