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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ㅣ 새움 세계문학전집
다자이 오사무 지음, 장현주 옮김 / 새움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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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가져야 할 조건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별 생각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가끔 마주하게 되는 깊이 있는 생각들 속에선 이상하게도 어둡고 무거운 모습만을 바라보게 된다. 내가 내 인생을 되돌아 봤을 때, 아무 고민 없이 행복했고 만족스러웠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스스로를 책망하고 후회할 일 투성이의 과거를 떠올리며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때, 남들이 보는 나의 모습과 내가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나의 모습과의 거리가 크면 클수록 그 괴리감에 짓눌려 점점 더 진짜 나의 모습을 감추게 되곤 한다. 능수능란하게 행복을 연기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 속에 함께 동화되어 있는 나를 볼 때면 소름이 돋다가도, 이내 그것마저도 익숙해져 의미없는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에 대해, 언제나 공포로 부들부들 떨고, 또,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언동에 눈곱만큼의 자신감도 갖지 못한 채, 저 혼자의 고뇌는 가슴속 작은 상자에 감추고, 그 우울, 신경과민은 기를 쓰고 숨기며 오직 천진난만한 낙천성을 가장하여, 저는 익살스러운 괴짜로 서서히 완성되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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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일본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삶은 한 편의 영화보다 더 흥미롭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바쁜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 대신 이모와 유모의 손에 길러진 어린 시절, 명문 대학교에 입학하지만 졸업하지 못하고 중퇴, 술과 마약과 연애로 보낸 청춘, 하지만 소설가로 성공해 ‘천재 작가’이자 ‘일본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는 기성 문학 전반에 비판적이었던 무뢰파의 선두주자로 활동하였다. 반권위ㆍ반도덕을 내세우며 세상의 일반적 생각이나 생활 방식에 반대하는 무뢰파의 모습은 전후 허무주의가 팽배하던 분위기 속에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일생동안 네 번의 자살 미수를 거치며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되기도 하고 건강 또한 악하되는등 힘든 나날을 보내다 마지막 다섯 번째 자살시도로 세상을 떠났다. 그 시체가 발견된 것이 그의 서른 아홉번째 생일날 이었다고 한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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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요조는 겉으로 봤을 땐 모두의 부러움을 살 만한 인물이다. 부잣집의 막내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란 것 같지만 사실 요조는 겉으로는 익살을 부리며 다른 사람을 웃기고 행복을 연기하지만 그 속은 어둡고 참혹함으로 가득하다. 그렇게 사람들을 완벽하게 속이며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어느날 한 친구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간파당한다. 자신의 삶을 혐오하며 살아가는 요조는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잊기위해 술,담배,여자,마약등에 빠지며 점점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고 결국 자살시도로 이어진다. 사실 <인간실격>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요조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의 삶 또한 같은 모습으로 떠오르게 된다. 스스로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요조의 삶이 행복할 수 있을리가 없다. 남들의 눈에 더없이 행복해 보일 수 밖에 없는 많은 조건들도, 본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 그로인한 고뇌와 고통이 쌓여 점점 진짜 자신의 모습을 잃어간다면 살아가는 의미조차 느낄 수 없게 된다.
겁쟁이는 행복조차 두려워합니다. 솜에 상처를 입습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처입기 전에 빨리 이대로 헤어지고 싶은 마음에 초조해져 예의 익살로 연막을 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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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아픔과 시련은 있게 마련이다. 스스로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아픔은 더 멀리 가기 위한 디딤돌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자가 가진 아픔이 모두 같을 순 없다.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스스로가 인정하지 못하고 받이들이지 못한다면 점점 더 그것을 숨기고 남들과 같은 모습으로 왜곡되게 꾸미게 된다. 요조의 삶이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사실 난 <인간실격>을 읽으며 그간 내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도 비슷한 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항상 나 자신의 마음보다 상대방의 시선에 신경쓰고, 자신이 손해보더라도 상대방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고 싫을때도 많았다. 요조처럼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진 않았지만 스스로 항상 부족하다 느꼈고 자신감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가감없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모양은 모두 다르지만 각자만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요조의 모습을 조금씩은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요조의 삶이 공감되기도 하고 안타깝게도 느껴진다. 자신의 삶을 소설에 그대로 투영한 듯한 작가가 느꼈을 진짜 삶의 고뇌가 <인간실격>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지기에, 그저 소설로만 치부하며 읽을 순 없었다.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과, 나역시 이때까지 살아온 삶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드는, 평범하고 행복한 삶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지를 절실히 느낄 수 있게 해주었던 것 같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 세계에 있어서, 단 하나, 진리처럼 느껴진 것은, 그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