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달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윤동교 지음 / 레드우드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은 내 생활에도 여유가 생겼지만 막 첫째를 낳고 나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을 시기엔 정말 큰 멘붕의 시간을 보냈다. 내 한 몸 건사하는 것도 버거웠던 나인데 내 시간의 대부분을 아이에게 할애해야 했던 시간은 내게 버거웠다. 우울증까진 아니더라도 무기력한 기분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분명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정적이고 행복했지만 ‘나’라는 주체가 없어진 삶은 도저히 쉽게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다행히 지금은 어느정도의 여유가 생기며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며 삶의 밸런스를 어느정도 잘 맞춰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비는 언제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권태는 지독하고 무기력은 집요한데 의지는 엿 같았다. 의지란 마치 한 덩어리의 엿과 같아서 강할 땐 상대의 머리도 가차 없이 깨뜨려 버리지만, 약할 땐 흐물흐물 형체 없이 죽죽 늘어지기만 하는 법이다. 지금 내 상태가 딱 그랬다. 죽죽 늘어지는 엿. 아랫목에 올려놓은 엿. 언제 다시 단단해질지 정녕 알 수 없는 엿.


 

20대 때 만화책을 스승 삼아 그림을 독학한 저자는 대학교에서 대자보만 열심히 쓰다가 회의를 느낀 나머지 본격 그림을 그리겠다며 역사교육과를 중퇴하였다. 20대 중반 핸드메이드 장사에 덤벼들었다가 장렬히 망한 뒤, 장사는 자신의 길이 아니란 걸 확인하고, 이후 방송 그래픽, 플래시 애니메이션, 온라인 광고, 일러스트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하였다. 무기력과 권태에 짓눌려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버텨 내던 그녀는 어는 날, 딱 한 달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드러누워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 보자 결심하고 훌쩍 제주도로 떠났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깨달았다. 아무것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직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려면 완벽하게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혼자가 되려면 모든 것에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든 것에 거리를 두려면 정말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결혼 9년차 유부녀인 저자는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게 된다.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만사가 귀찮고 쉽게 짜증을 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점점 어두운 방으로만 들어가게 된다. 번아웃 증후군이 뭔지도 모르던 그녀는 우연히 자신의 증상을 모두 나열해 검색해 본 결과, 이 증상이 번아웃 증후군임을 알게 된다. 세상에 자신같이 힘들고 불행한 사람은 없을 거란 생각과 다르게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는 직장인이 10명 중 9명에, 국민의 70%는 무기력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제주도 한달 살기를 결심하게 된다. 
 

 

제주도 한달 살기를 계획하지만, 한달 살기는 의외로 이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져 있었다. 아픈 아이를 위해 내려오거나 은퇴후 노년을 제주도에서 보내기위해 긴시간 머무는 등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제주도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의 목적은 단 하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세상 그 누구의 간섭 없이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힘들게 구한 숙소에서 나가지 않은채 여태껏 가져보지 못한 여유를 누리며 처음엔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료함은 늘어나고 바쁘게 살아온 탓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며 또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 하지만 그로인해 자신을 깊게 돌아보게 되고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어 인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자아성찰의 시간까지 가진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철저히 혼자인 시간이 가져다 주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동안 달려오던 관성을 이겨 내야 하고, 내 안의 잔소리꾼을 잠재워야 하며, 생각과 감정의 늪에서 헤엄쳐 나와야 하고, 거대한 심심함의 무게를 견뎌 내야 하며, 1초가 1분 같은 시간의 왜곡에서 하루를 살아 내야 하는 엄청난 일이었다. 


 

모든 걸 뒤로한채 제주도로 내려왔지만 주변 사람들의 걱정, 참견은 끝이 없다. 예전 같으면 인간관계에 치여 자신의 진심은 뒤로한채 괜찮은 척, 행복한 척 연기하며 피곤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나의 결정에 쉽게 단정 짓고 선을 그어 비난하고 질책하곤 한다. 그 상처와 스트레스는 쉬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관계라는 끈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저자는 타인과 거리를 두고 누가 뭐라든 나로 사는 경험을 하며 남들의 시선과 기준에 따르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따라갔다. 자신을 최선에 두고 한 달 동안 진심을 다해 나와 마주한 것이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혼자 한달이라는 긴 시간을 떠날 용기와 여건이 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짧은 일주일이라도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내기에도 벅찬게 사실이다. 그러나 인생의 낭떠러지에 다다랐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다가오면 그저 떨어져 버릴 것이 아니라 뒤돌아 한걸음 한걸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보면 조급함이 생기기 마련이다. 시간을 헛되이 쓰는 것 같고, 뭔가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것 같고, 누군가 나를 비난할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저자의 제주도 한달살기의 결과를 보면 마음 놓고 모든 걸 놓아버리는 시간도 분명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선택까지의 큰 부담감을 떨쳐내고 좀 더 가뿐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길고 긴 인생에서 한달이란 시간은 절대 긴 시간이 아니다. 나를 위해 충분히 쓸 수 있는 시간이고, 많은 시행착오와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어도 저자에겐 그 시간속에서 진짜 자신을 찾을 수 있었기에 그 무엇보다 값진 시간이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 나를 응원해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무엇보다 나를 믿고 사랑하는 나 자신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떠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비록 저자처럼 긴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더라도 나를 돌아보는 시간은 삶에서 언제나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당장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고 생활을 잘 영위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생각해 보면 평생 방치하고 내버려 둔 ‘나’였다. 오랜 시간에 걸쳐 지금의 상황에 이른 만큼 해결되려면 많은 시건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