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일, 모레 정도의 삶 - 〈빅이슈〉를 팔며 거리에서 보낸 52통의 편지
임상철 지음 / 생각의힘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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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 가혹한 운명은 그를 거리로 내몰았지만 당당히 거리 위에 우뚝 서다.
책 속 표현대로 민달팽이의 생활

얼마 전 온라인 서점에서 신간 홍보를 보다가 표지에 빨간 모자 하나만 떡 하니 그려져 있는 걸 봤어요.

이 책은 뭘까? 하는 호기심에 작가를 봤더니 홍대 앞에서 빅이슈를 판매하는 빅판 중에 한 분이었습니다. 빅이슈는 노숙인으로 증명된 사람만 판매할 수 있는 잡지예요.

노숙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고 잡지 판매 수익금으로 노숙인의 자립과 안정적인 주거지를 마련하는 것을 돕습니다.
사회구조적으로 빈곤한 분들에게 합법적으로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1991년 영국에서 창간한 대중문화잡지이며 유명인들의 재능기부로 만들어지며 현재 11개국에서 15개 종으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빅이슈 홈페이지 참고).

2018년 5월 45명의 빅이슈 판매원이 임대주택 거주, 25명이 재취업에 성공하셨다고 합니다.

빅이슈 판매원 임상철 작가님은 이번 책을 계기로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미술가, 조각가를 꿈꾸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임상철 작가님이 많은 판매원 중에 눈에 띄여 이렇게 책까지 낼 수 있었던 계기는 자신만의 창조성 때문입니다.
다른 판매원들은 잡지 안에 사탕이나 좋은 문구를 넣는데 작가님은 자신이 그린 그림과 짧은 글을 엽서처럼 끼워 판매했습니다.
그 내용은 자신이 살아온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한 장면에 그의 삶의 단면을 훔쳐보았을 때 독자들은 어떤 마음이 되었을까요?

저는 이 책을 읽고 무거워졌습니다.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저녁 때만 되면 젊은이들로 붐비는 홍대 입구역에서 어스름 저녁이 될 무렵이면 잡지들을 챙겨 그곳에서 말 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같이 서있을 그를 떠올리면..

동정심은 아닙니다.
하지만.. 뭐랄까 같은 사람으로 느끼는 애잔함, 동병상련이랄까요.

여름의 더운 저녁, 겨울의 추운 밤까지 거리에서 날씨와 사투하는 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었을 겁니다.

어느 블로거가 이 책의 리뷰에 써놓았듯, 저도 처음엔 빅이슈 판매가 좋은 사업이며 홈리스에게 적절한 일자리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야 근시안에 단편적인 사고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유복한 가정에서 많은 물질적인 것들을 누리고 자라는데요. 작가님은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무력하게 견디면서도 드문드문 노란 불빛처럼 느껴지는 좋은 추억이 잠시 비추다 8살 때 어머니는 지병으로 돌아가시자 노란 불빛마저 사라집니다.

삼남매가 며칠을 여관 방에 있는 동안 친척들, 모르는 사람들이 다녀가고 그렇게 형제는 보육원에 막내 여동생은 친척 집으로 갈 거라는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만 듣습니다.

이후의 19살까지의 보육원에서의 삶은 녹록치 않죠. 눈칫밥에 형들의 폭력, 가끔 다가오는 봉사하는 손길이 있더라도 그리 길고 따뜻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노곤하고 지친 심신이 되어 살아온 그에게 빅이슈라는 잡지를 팔게 되었으니 좋은 일자리라 여기고 열심히 하세요. 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에게 거리는 생존하기 위해 마땅히 있어야 할 잠자리이자, 먹기 위해 잠깐이라도 자리를 찾아야 하는 그야말로 정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 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나는 노숙인입니다! 라는 피켓과도 같은 빨간 조끼와 빨간 모자를 착용하고 잡지를 팔라.... 고 하기엔 가혹해 보이기도 합니다.

일생을 길 위에서 버티며 살아오며 어쩌면 길에서 벗어나려 그렇게도 애썼건만, 다시 길 위에서 생계를 구해야 한다면..

그렇게도 탈출하고 싶었던 길이 일터이자, 생존을 위해 꼭 있어야 할 장소라면.. 나라면 어떨까? 울며 겨자 먹기로 서있지 않을까 싶은데 작가님은 달랐습니다.

처음엔 어색하고 어려웠지만 담담히 자신의 일을 받아들이고 지금도 물론 사람들 시선이 낯설지만 그저 서있을 뿐입니다.

아니,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삶,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은 나만의 스토리이므로..

어릴 때 보육원 생활, 이곳 저곳을 거친 떠돌이 생활, 노숙인이 먹고 자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

어떤 땐 턱 하는 아픔으로
어떤 땐 안쓰러움으로
어떤 땐 안도감으로
그가 보내준 52통의 편지가 조그만 파문을 입니다.

예상했던 노숙인들의 삶보다 더 어렵네요.
노숙인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술에 취했고 몸에서 냄새가 나고 눈동자의 초점이 흐린 고정관념들
제가 영등포역에서 공중전화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는데 노숙인 아저씨 한 분이 뒤에서 두드리며 동전 몇 개 달라고 하셨을 때 저도 모르게 놀라 소리를 크게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은 가버리시더라고요.
왜 그렇게 놀랐을까, 소리를 안 질렀으면 어땠을까, 싶지만.. 이미 그 분은 사람에 대한 기대가 또 한풀 꺾였을 겁니다.
제가 서울역이나 영등포역에서 봤던 노숙인들은 알코올 중독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온 작가님처럼 알코올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빈곤, 가정과 학교 지지체계가 무너지고 저학력과 진로를 모색할 수 있는 직업훈련의 부족으로 떠돌아다니는 분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노숙인 하면 떠오르는 그런 이미지들을 지우고 그저 한 사람으로 봐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책에 나온 것처럼 그분들은 일용직 노동으로 번 돈으로 수입이 불규칙하고 매일 수중에 있는 액수가 다르기에 어느 날은 PC방, 어느 날은 사우나에서 주무신답니다. 식사는 되는대로 하고 일에 따라 거주지와 만나는 사람이 그때그때 다릅니다. 만날 때는 쉽게 친해지기도 하지만 헤어질 땐 말없이 각자 길을 간다고 합니다.

작가님에게 좋은 사람도 있었지만... 믿기 어려운, 믿음을 줬지만 그것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관계들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심신이 고달프고 체력은 달리다 보니 관계라는 것을 만들만한 심리적 여유가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꿈인 작가가 되기 위한 노력, 한 발자국씩 원하는 것을 이루어가는 모습이 큰 감동입니다.
작가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별 기대나 미련없이 짐을 꾸리고 떠나는 장면에서.. 자주 안타까웠습니다.

그냥... 거기에... 계시면 안 되는 거였는지... 누군가... 붙잡지 않았기에... 다시 떠다시는 거지만,,, 그저 머무르기엔 사람에 대한 희망이 없으셨는지..
기대했다 또 실망하면 이후에 어떤 사람에게도 말을 걸 수 없어 떠나셨겠지 싶습니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
맨 처음 엽서를 보고 첫 반응을 보여준 호주 건축가, 그리고 그 사람의 말을 통역해준 사람, 작가님 팬이라면서 수줍게 말을 건네고 간 여성, 신간이 나올 때맞춰 구입하며 자서전에 들어갈 표지 그림을 사가신 어르신
모두 고마운 분들이네요.

빅이슈는 서울, 부산만 판매
전국적으로 판매지가 늘어나면 좋겠고요.
온라인으로 구독신청하면 배달옵니다.

빅이슈 홈페이지
http://bigissue.kr

인터뷰 작가 임상철님
http://www.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5681

조소과

나는 슬그머니 전공이 무엇인데요? 하고 물었다.
조소과에 입학했네.
내가 볼 때 **이는 미술하고는 가까워 보이질 않던데요.
임 군, 내 딸이 꼭 미술에 재능이 있어서 간 건 아니고 나중에 결혼할 때를 생각해서도 있네.

나는 말없이 알코올만 들이켰다. 한 잔, 두 잔, 또 한 잔.... 취기에 시간은 흐르고 어느 순간 주위의 떠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혼자만 존재하는 듯했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처음엔 조용한 눈물이었는데 곧 모두가 알아버리게 울고 있었다. 창피한 일이지만 그쳐지지 않았다.

임 군아, 갑자기 왜 우니? 애가 취해서 센티멘탈해지나 보네.
사모님 목소리가 꿈에선 듯 들려오고 있었다.

꿈은 이루어집니다.

75p.

고급 아파트

아파트를 나와 길가에서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찢어버리면서 지금의 내 삶은 현재 진행형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너희 아버지, 나한테 이틀 밤은 맞아야 돼. 하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아마 저의 재능을 아까워한 듯합니다.
151p.

형편없는 삶

형! 오랜만이네. 어떻게 살고 있어? 하는 말이 들려왔다. 나는 자랑스런 말이 없어 과거와 현재를 되는대로 이야기하다 보니 결국에는 홈리스 삶을 살다 쉼터에 있다는 이야기까지 하게 됐다. 그러자 실망했는데 형, 인생을 왜 그렇게 형편없이 살아?라며 경멸스럽게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어버린 나는 그 통화 이후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모자를 눌러쓴 자가 되어서 지인들 보기에 괴로운 공허한 나날을 보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쉼터를 나왔고, 그 이후로 <빅이슈>를 판매하게 됐습니다.
1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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