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적 열정 이산의 책 29
레이 초우 지음, 정재서 옮김 / 이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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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에 의해서 매개된 이런 경험과 혈연적인 친밀감이라는 특이한 혼합이 최근 수년간 나를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를 연구하게 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더 생각을 해보아야겠지만 몇 가지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어머니의 경력과, 그것이 우리(어머니와 나)의 삶에 가져다준 일군의 사람들과의 교류 덕분에 나는 어려서부터 근대에 있어서는 창조적 글쓰기가 상품화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또 영화와 텔레비전이 우위를 과시하는 뉴미디어 문화에서는 글쓰기가 어떤 경쟁에 직면해 있는지도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우리는 홍콩에 살고 있었으므로-식민화된 언어, 즉 중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는 사회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비록 ‘문학’이 나의 전문영역이기는 하지만, 근대/모더니즘적인 문학이 ‘혁명적’(혹은 ‘전복적’)인 동시에, 내가 이 책에서 검증하는 시각이미지 같은 대중문화의 형식들보다 높은 서열에 있다고 보는 그런 유의 학문적 낭만주의를 믿지 않는다. 



영사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힘에 의해 영화는 잔혹함이 주는 충격을 공격이라는 형태로 증강시킨다. 희생자를 불시에 내리치는 참수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그 영상은 루쉰에게 한 방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주었다. 본다는 그 자신의 행위를 통해, 루쉰이 직면한 것은 첫째, 마치 매개 없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은 영화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투명성이었고, 둘째 이 새로운 미디어의 힘과 처형 그 자체의 폭력성 사이의 친연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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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전쟁 - 미화와 추모 사이에서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지음, 이재원 외 / 휴머니스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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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극장에서처럼 의례를 주재하는 자와 이를 지켜보는 자 사이의 시선의 교차를 통해 보는 자와 보이는 자 모두가 동질적 시공간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환기시켰다.


이와 같은 국가의 표현성에 대해 클리포드 기어츠는 ‘극장국가’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기어츠에 따르면, 극장국가란 힘이나 정통성보다 형식과 의례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국가형태를 의미한다. ... 정치적 지배는 권력의 집중을 통해서가 아니라 왕이나 군주와 같은 모범적 중앙의 의례를 화려하고 대대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 하지만 극장국가 개념이 국가권력의 의례적 표상을 분석하는 데 비판적으로 적용된다면, 국가 만들기에서 문화적 기획의 문제를 고찰하는 데 상당히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제1공화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그 제도와 의례를 서구의 민주주의체제와 군주제, 그리고 과거 조선왕조의 유교주의와 일제 식민지 시기의 흔적과 영향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제도들을 혼합적으로 모방해 만들어냈는데, 이러한 모방을 통해 구축된 대한민국의 국가의례들은 국가기획의 결과라기보다 하나의 과정으로 의미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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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된 생각들 - 어느 날, 그림 속에서 피터가 말을 걸었다
전현선 글.그림 / 열림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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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대화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대화는 결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두 개의 절벽 사이에 튼튼한 다리를 놓아준다.


비밀스럽고도 진실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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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 르네상스, 매너리즘, 바로끄, 개정2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반성완.백낙청 옮김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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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 >

 

26 지금까지 보아온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심미주의적, 관능주의적 르네상스 개념의 특징들 중 어떤 것은 전혀 르네상스에 적용되지 않으며, 어떤 것은 르네상스와 중세 말기에 똑같이 해당하는 것들이다.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는 순전히 역사의 경계에 의해서보다도 오히려 지리적, 국민적 경계에 의해 갈리는 듯하다. 예를 들면 삐사넬로와 판에이크 형제 같이 중세 말기와 르네상스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가 문제가 되는 경우에는 대체로 남쪽 이딸리아에서 일어난 현상은 르네상스에, 유럽 북쪽 지역에서 일어난 현상은 중세에 속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인물들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장면들이 하나의 통일체로 보이며 이 인물과 장면이 넓은 공간에서 묘사되는 삐사넬로의 이딸리아 예술은 르네상스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 인물들이 자유롭지 못하고 어딘가 어색하며 겨우겨우 끼워맞춰놓은 듯한 인상을 주는 장면들이 좁은 공간에서 미니아뛰르 (중세 사본의 채색 삽화) 기법으로 묘사되는 전통적인 네덜란드 예술은 중세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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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스펙터클 문화정치 경성대문화총서 34
핼 포스터 지음, 조주연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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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구조주의 이론들에 입각하여 저항적 포스트모더니즘의 구축에 동참했으나, 이후 포스트구조주의 계통의 포스트모더니즘이 표면상의 양식적, 정치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신보수주의 계통의 반동적 포스트모더니즘과 역사적으로 동일한 현상이 아닐까 하는 질문으로 나아갔다. … 최종적으로는 <<실재의 귀환>>에서 완결되었다(3. <기호의 수난>).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연원한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신보수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마찬가지로 후기 자본주의 아래서 훨씬 심화된 자본의 동력학, 즉 물화 및 파편화 과정의 동일한 산물로서, 주체와 재현, 언어와 역사적 서사성을 붕괴시키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신화파괴차용과 몽타주탈신화화공공연한 비난상징을 정화, 대상을 바꾸는, 기호를 탈구상징계

알레고리적 충동인용, 지시, 상투형

 

바르트가 1971년에 기표의 과학이라고 밝힌 것을 보드리야르는 1972년에  기표에 대한 물신숭배-약호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약호에 대한 열광-라고 진단했다.

 

많은 미술가들이 역사적인 미술과 현대 미술 양자로부터 닥치는 대로 빌려 댄다. … 이런 미술가는 과거를 환대하면서 자신은 현재의 절박함 너머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딜레탕트고, 망상을 품고 있기 때문에 얼간이며, 역사적 계기-우리의 문제적 현재-를 잃었기 때문에 어영부영 맴도는 떠돌이일 뿐이다.

 

현대 미술은 역사적인 형식들에 관여했는데, 이는 종종 그런 형식들을 해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는 새로운 미술은 역사적 형식들을 맥락에서 벗어나 물화된 형태로 취하는 경향이 있다. 패러디의 형태로든 아니면 곧이곧대로든, 이러한 인용은 새로운 미술의 중요성을, 심지어는 새로운 미술의 전통적인 지위를 간청한다. … “역사로의 복귀로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심하게 비역사적인 과업이며, 그 결과는 흔히 허위의식으로서의 미적 즐거움이거나 혹은 그 반대이곤 하다.

역사의 맥락이 무시되고, 역사의 연속이 부인되며, 상충하는 미술 형식들과 생산 양식들이 혼성모방으로 잘못 해소된다. 과거의 특수성도 현재의 필연성도 주의 깊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 하지만 미술 형식이 특수하다는 사실은 거의 자명하다. 미술 형식의 의미는 그것이 속한 시대의 본질적인 부분이며, 그래서 순수한 이항이 불가능하다. 다른 시대들을 우리 시대의 거울이라고 보는 것은 역사를 나르시시즘으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다른 양식들을 우리 시대에도 쓸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역사를 꿈으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다원주의자의 꿈이다. 그는 미술관 속을 헤매는 몽유병자와 같다.

역사적 또는 사회적 한계들을 모르는 것은 그러한 한계들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훨씬 더한 종속 상태에 놓이게 된다.


< 표현주의의 오류 >

이와 같은 즉물주의는 표현주의의 성심리학적 수사를 조롱한다. 하지만 여기 그치지 않고 이 즉물주의는 한 항-정신이라는 영원한 삶”-이 다른 항-신체라는 죽은 문자”-을 억누르는 대립항들에 기초한 형이상학적 질서를 간접적으로 폭로하기도 한다. 이 질서는 표현을 미술의 진리로서, 미술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증진하고, 표현주의에 내면의 삶에서 우러나온 미술이라는 특권을 준다. < 친구들을 잡아먹기 >에서 이 형이상학적 질서는 반전된다. 내면의 삶은 신체 부위들로 환원되고, “ex-pression”은 오류

 


이런 화상에서는 동일시가 소외와 함께 일어난다. “액체처럼 흐물흐물해진 개인은 관례들의 완전한 피상성을 체화하려는 열정에 불탄다.” 이는 셔먼의 <분홍 가운>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시리즈에서 셔먼은 그녀의 고유한 자아를 노출하려 하는 것 같지만, 실상 노출되는 것은 편안한 고백 투의 자세로 노출된 자아 유형이다. 사적인 상태에서도 여성은 내부의 응시, 고백투의 발언에 의해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고백과 양심을 우대하는 우리 사회-토크쇼에서부터 대화치료까지-가 지닌 훈육적 본성도 확인이 된다.) 여성의 종속은 여성을 기호로, 물신으로, 가장된 모습으로 조작하는 탓이기도 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 해체되는 것은 자연적인 여성이기보다 표현적인 인공물-인공물로서의 표현-이다.


리처드 프린스에게는 이런 시뮬레이션에-의한-통제가 기정 사실이다. 따라서 그는 여행--여가 광고, 나이트클럽과 영화 디스플레이를 다시 사진으로 찍는 작업을 해왔는데, 그런 광고나 디스플레이를 엄청나게 왜곡하는 방식을 취했다. … 숨어 있는 조작들을 폭로하려는 것이 아니라(이건 훈계조고, 더구나 조작들은 너무나 뻔하기도 하다), 그 행위 속의 유혹을 포착하려는 것, 그런 이미지들에 사로잡혀 있는 그 자신의 매혹을 음미하려는 것-비록 그런 이미지들이 암시된 욕망을 통해 그를 조종한다고 해도-이다. 그렇다면 프린스의 과업은 잘못된이미지에 대한 비판이기보다 시뮬레이션-재현(“좋은사본과 나쁜” “사본”)이라는 오래된 질서를 소멸시키는 수열적인 세계-에 대한 탐색이다. 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는, 자아가 어디에나 반영되어 있는 동시에 반영되어 있지 않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위치는 성과 계급과 인종에 의해서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그리고 프린스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여기 안에서일어나는 주체-효과가 아닌 저기 바깥의스펙터클이란 없다는 것, 즉 자아의 투사와 스펙터클의 구축은 동일한 공정이라는 것이다.


제임스 케이스비어는 이 시뮬레이트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숙고한다. 그가 직접 만든 타블로를 찍은 그의 사진은 마땅한 지시체가 없다. 객관적인 사본도 아니고 주관적인 상관물도 아닌 이 사진들은 재현(억압된 사건들의?)이 실재를 강탈한 환상과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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