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스펙터클 문화정치 경성대문화총서 34
핼 포스터 지음, 조주연 옮김 / 경성대학교출판부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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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포스트 구조주의 이론들에 입각하여 저항적 포스트모더니즘의 구축에 동참했으나, 이후 포스트구조주의 계통의 포스트모더니즘이 표면상의 양식적, 정치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신보수주의 계통의 반동적 포스트모더니즘과 역사적으로 동일한 현상이 아닐까 하는 질문으로 나아갔다. … 최종적으로는 <<실재의 귀환>>에서 완결되었다(3. <기호의 수난>).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연원한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신보수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마찬가지로 후기 자본주의 아래서 훨씬 심화된 자본의 동력학, 즉 물화 및 파편화 과정의 동일한 산물로서, 주체와 재현, 언어와 역사적 서사성을 붕괴시키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신화파괴차용과 몽타주탈신화화공공연한 비난상징을 정화, 대상을 바꾸는, 기호를 탈구상징계

알레고리적 충동인용, 지시, 상투형

 

바르트가 1971년에 기표의 과학이라고 밝힌 것을 보드리야르는 1972년에  기표에 대한 물신숭배-약호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약호에 대한 열광-라고 진단했다.

 

많은 미술가들이 역사적인 미술과 현대 미술 양자로부터 닥치는 대로 빌려 댄다. … 이런 미술가는 과거를 환대하면서 자신은 현재의 절박함 너머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딜레탕트고, 망상을 품고 있기 때문에 얼간이며, 역사적 계기-우리의 문제적 현재-를 잃었기 때문에 어영부영 맴도는 떠돌이일 뿐이다.

 

현대 미술은 역사적인 형식들에 관여했는데, 이는 종종 그런 형식들을 해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는 새로운 미술은 역사적 형식들을 맥락에서 벗어나 물화된 형태로 취하는 경향이 있다. 패러디의 형태로든 아니면 곧이곧대로든, 이러한 인용은 새로운 미술의 중요성을, 심지어는 새로운 미술의 전통적인 지위를 간청한다. … “역사로의 복귀로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심하게 비역사적인 과업이며, 그 결과는 흔히 허위의식으로서의 미적 즐거움이거나 혹은 그 반대이곤 하다.

역사의 맥락이 무시되고, 역사의 연속이 부인되며, 상충하는 미술 형식들과 생산 양식들이 혼성모방으로 잘못 해소된다. 과거의 특수성도 현재의 필연성도 주의 깊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 하지만 미술 형식이 특수하다는 사실은 거의 자명하다. 미술 형식의 의미는 그것이 속한 시대의 본질적인 부분이며, 그래서 순수한 이항이 불가능하다. 다른 시대들을 우리 시대의 거울이라고 보는 것은 역사를 나르시시즘으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다른 양식들을 우리 시대에도 쓸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역사를 꿈으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다원주의자의 꿈이다. 그는 미술관 속을 헤매는 몽유병자와 같다.

역사적 또는 사회적 한계들을 모르는 것은 그러한 한계들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훨씬 더한 종속 상태에 놓이게 된다.


< 표현주의의 오류 >

이와 같은 즉물주의는 표현주의의 성심리학적 수사를 조롱한다. 하지만 여기 그치지 않고 이 즉물주의는 한 항-정신이라는 영원한 삶”-이 다른 항-신체라는 죽은 문자”-을 억누르는 대립항들에 기초한 형이상학적 질서를 간접적으로 폭로하기도 한다. 이 질서는 표현을 미술의 진리로서, 미술의 진정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증진하고, 표현주의에 내면의 삶에서 우러나온 미술이라는 특권을 준다. < 친구들을 잡아먹기 >에서 이 형이상학적 질서는 반전된다. 내면의 삶은 신체 부위들로 환원되고, “ex-pression”은 오류

 


이런 화상에서는 동일시가 소외와 함께 일어난다. “액체처럼 흐물흐물해진 개인은 관례들의 완전한 피상성을 체화하려는 열정에 불탄다.” 이는 셔먼의 <분홍 가운>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시리즈에서 셔먼은 그녀의 고유한 자아를 노출하려 하는 것 같지만, 실상 노출되는 것은 편안한 고백 투의 자세로 노출된 자아 유형이다. 사적인 상태에서도 여성은 내부의 응시, 고백투의 발언에 의해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고백과 양심을 우대하는 우리 사회-토크쇼에서부터 대화치료까지-가 지닌 훈육적 본성도 확인이 된다.) 여성의 종속은 여성을 기호로, 물신으로, 가장된 모습으로 조작하는 탓이기도 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 해체되는 것은 자연적인 여성이기보다 표현적인 인공물-인공물로서의 표현-이다.


리처드 프린스에게는 이런 시뮬레이션에-의한-통제가 기정 사실이다. 따라서 그는 여행--여가 광고, 나이트클럽과 영화 디스플레이를 다시 사진으로 찍는 작업을 해왔는데, 그런 광고나 디스플레이를 엄청나게 왜곡하는 방식을 취했다. … 숨어 있는 조작들을 폭로하려는 것이 아니라(이건 훈계조고, 더구나 조작들은 너무나 뻔하기도 하다), 그 행위 속의 유혹을 포착하려는 것, 그런 이미지들에 사로잡혀 있는 그 자신의 매혹을 음미하려는 것-비록 그런 이미지들이 암시된 욕망을 통해 그를 조종한다고 해도-이다. 그렇다면 프린스의 과업은 잘못된이미지에 대한 비판이기보다 시뮬레이션-재현(“좋은사본과 나쁜” “사본”)이라는 오래된 질서를 소멸시키는 수열적인 세계-에 대한 탐색이다. 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는, 자아가 어디에나 반영되어 있는 동시에 반영되어 있지 않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위치는 성과 계급과 인종에 의해서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그리고 프린스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여기 안에서일어나는 주체-효과가 아닌 저기 바깥의스펙터클이란 없다는 것, 즉 자아의 투사와 스펙터클의 구축은 동일한 공정이라는 것이다.


제임스 케이스비어는 이 시뮬레이트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숙고한다. 그가 직접 만든 타블로를 찍은 그의 사진은 마땅한 지시체가 없다. 객관적인 사본도 아니고 주관적인 상관물도 아닌 이 사진들은 재현(억압된 사건들의?)이 실재를 강탈한 환상과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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