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 종교, 철학, 사랑, 예술에 관한 낭시의 쉽고 친절한 네 개의 강의 카이로스총서 23
장 뤽 낭시 지음, 이영선 옮김 / 갈무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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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165~166 아이도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그 자체로, 즉 유일한 존재로 여기는 그 사랑에 대한, 다시 역으로, 엄마 아빠에게, 또는 자신을 위한 고유한 자리를 내어준 사람들에 대한 보답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이미 사랑의 관계에 놓여 있지만, 완전히 어린 아이는 사랑과 관계될 수 없습니다. 

(뒤에 7세부터 사리분별할 줄 아는 이성적 존재가 된다는 서술이 나온다. 완전히 어린 아이는 이성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사랑에 대한 보답을 할 수 없어서 '사랑과 관계될 수 없다'는 표현을 한 듯.)


인간은 인생의 모든 순간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제가 67세입니다만, 이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바로 그 시점에도, 우리는 여전히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을 뿐이며,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단계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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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 한길그레이트북스 90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임규정 옮김 / 한길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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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보편적 의무가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순간적 욕망에 지배되지 않는다. 자기는 하느님이 두 사람을 죽음으로 갈라놓을 때까지 배우자를 사랑하겠노라는 결혼 서약을 통해 통일성을 성취한다. 즉 자기는 더 이상 순간적인 기분과 다양한 가능성으로 분산되지 않는다. 키르케고르의 결혼에 대한 분석은 일반적으로 윤리적 의무에 적용될 수 있다. 욕망은 자기가 추구하는 윤리적 이상에 의해 통제된다. 자기는 윤리적 이상을 실행해야 한다는 의무를 따름으로써 욕망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단번에 성취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기가 윤리적 실존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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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항해술
화이트 리뷰 인터뷰, 정은주 옮김 / 유어마인드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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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 칼


불탄 침대를 사용한 것이 처음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전화를 걸어 ”하숙생이 네 침대에서 분신을 시도했지 뭐니!“라고 했다. 나는 그 침대의 사진을 찍었고, 침대가 폐기장으로 옮겨지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할 생각도 했었다.


조지프 코수스, 마르샬 레스, 로이 릭턴스타인, 사이 트웜블리, 크리스토, 듀에인 마이클스 등등. 이들의 작품은 내게 영향을 미쳤겠지만, 스타일이 아니라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가 그랬을 거다. 사실 내 문체가 성긴 것은 사람들이 서서 읽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서이기도 하다. 벽에 걸리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짧게 쓸 필요가 있었다.



보드리야르는 당시 칼이 작품의 대상과 어떤 관계를 발전시키거나, 우연한 만남이라는 만족스러운 결말을 그려내고 싶은 욕망에 이끌렸으리란 견해를 부정한다.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어떤 접촉이나 관계를 발생시키는 어떠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유혹의 대가다. 이야기가 시시해질 위험을 무릅쓰고 비밀이 누설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1983년에 칼은 길에서 우연히 누군가의 주소록을 줍는다. 그리고 이 버려진 흔적 혹은 단서를 출발점으로 삼아 범죄를 수사하듯 모르는 사람의 삶을 추적해보기로 한다.



그는 칼이 파리의 환락가 스트리퍼로 일하면서 그 과정을 기록한 책을 펴낸 사실이 있다는 걸 미처 몰랐던 모양이다. 그처럼 칼은 스스로를 관찰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1981년 4월에 그는 어머니에게 부탁해 자신을 미행할 사설탐정을 고용하고 “나의 존재에 대한 증거 사진을 제공”받는다. 그러고 그 ‘도촬’ 사진들을 모아 <미행(La Filature)>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진실과 허구를 수수께끼처럼 오가고 지리멸렬한 현실의 경험 속에 서사적 구조를 도입하는 이 예술가의 작업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작가와 이론가들을 매료시켰다. 폴 오스터는 1992년에 발표한 소설 <거대한 괴물(1992)>에 칼을 모델로 한 인물 ‘마리아’를 등장시킨다.



… 독특하고 개인적이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매체나 분야에 속한다고 보기가 어렵다… 예술을 하고자 하는 욕망에 기인하기보다는 자신의 강박을 충족시켜야 할 필요성에서, 말하자면 자신이 원하는 꼭 그대로 살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 칼의 프로젝트에 대해 무작위성과 우연성을 창조하는 게임의 전략에 따라 구상된다고 썼다. 그러나 예컨대 울리포 집단이나 윌리엄 버로스 … 우연적 사건을 고안한 몇몇 모더니즘 이후 예술가들과 달리 칼은 ‘우연성’이 무작위성의 암호를 풀고 숨겨진 의미를 폭로할 수 있다는 식의 어떤 명확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 … 겉보기엔 불가사의하지만,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덜 낭만적이다. 오히려 그는 우연성이라는 빈 공간이 실은 말 그대로 텅 비어있을 따름임을 폭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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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VS 철학 -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개정 완전판
강신주 지음 / 오월의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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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계의 한 일원으로서 인간 개체 자신도 신적인 위상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에게도 신처럼 항상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으며, 바로 이러한 능산적 자연이 스피노자가 말한 코나투스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코나투스는 타자와의 마주침을 통해 증가할 수도 있고, 혹은 감소할 수도 있다. 타자와 마주쳐서 쿠나투스가 증가하면 우리는 기쁨을 느끼지만

 

 

기독교에서처럼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이 새롭게 연결되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연결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가 과거의 연결관계를 잊어야만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자의식의 동일성을 망각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들뢰즈가 망각을 강조한 이유는 자의식이 강할수록 세계와의 새로운 연결이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자신을 강하게 의식하면 할수록, 우리가 세계와의 연결을 꺼리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기존의 자의식을 약화시킬 수 있다면, 그만큼 우리에게는 세계와 새롭게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확보될 것이다.

기억을 강조하는 사유에서는 망각을 일종의 무기력이라고, 혹은 수동적인 정서 상태라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망각은 타자와의 소통을 방해하는 의식의 자기동일성만을 잊으려는 것이지, 삶 자체의 능동성을 잊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망각은 우리의 삶을 가장 높은 긍정의 상태로 고양시킬 수 있는 중요한 한 가지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삶, 그리고 무의식적인 습관 체계를 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타자와 소통하여 새로운 주체로 생성될 수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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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번째 밤 :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도미노 총서 2
윤원화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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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 지혜 이외에 삶에서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 이들의 감각적 느림을 말이다.

 

그리하여 비포가 현재에 충실하면서 예기치 않은 시간의 노선이 싹틀 수 있는 불확정성의 씨앗을 뿌리자고 독려할 때, 젊음과 미래주의는 나란히 빛을 잃고 강물에 버려진다.

 

선배 작가들이 관심 있게 본 후배 작가들을 선정하고 직접 말을 붙이는 방식으로 구성된 이 전시에서, 젊은 미술가들은 일종의 카나리아처럼 배치된다.

 

17~18 이들은 미래가 소진된 시대의 낙인이 찍힌 자로서 사회적 모순에 휘말리고 미술 제도와 충돌한 개인적 경험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가시화한다. 전시작들은 대개 사적 개인으로서 경험하는 일상의 층위와 그보다 넓게 조감되는 현실의 층위, 그리고 미술가로서의 활동을 규정하는 미술 제도의 층위가 유의미하게 결합하지 못하고 서로 어긋나는 상황을 조금은 자조적으로 고백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백색 전시 공간의 서늘한 조명 아래서 사회 비판 또는 제도 비판이라는 미술 고유의 기능을 수행하는 어엿한 미술의 일원으로 회수된다.

 

19 제도화된 미술에 대항하기 위해 현대 민속 문화를 그 대척점으로 내세우는 것도 아니고, 기성세대의 미술이 추구했던 미학적 이상과 동시대 젊은 미술가들이 대면하는 헐벗은 현실을 대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무엇으로든 빈 공간을 메우고 고요한 시간을 가리면서 어떤 구멍과 대면하지 않으려는 불안의 심리이고, 그런 불안에 의해 빠글빠글하게 가득 채워진 세계에서도 기어코 재발견되고야 마는 구멍의 존재.




어떤 것은 변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어떤 것은 변할지도 모르지만, 그날 밤의 캄캄한 겨울 산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시간은 작가와 친구들이 만들어낸 공통의 작은 결과물로서, 제각기 알 수 없는 시간을 마주하게 될 서로에게 일종의 선물처럼 건네진다. 전시장에서 영상을 보는 관객은 관객을 통해 대표되는 미술 제도나 기성 사회를 향해 발화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영상의 후반부는 이들이 우리를 위해 그 산에 올랐던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런 작업들은 총체적인 시간의 흐름을 전제하고 이를 견인하는 세대의 수레바퀴를 그려 넣으려는 전시 기획과 약간 어긋나게 움직이면서 에워싼 시간을 주의 깊게 탐사하고 그 속에서 다른 시간의 실마리를 찾으려 시도한다. 확실히 미래주의적 태도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어딘가 먼 곳으로부터 신비로운 이방인처럼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나 벽력 같은 구원을 내려주기를 바란다면, 그런 것은 없다. … 지금 우리의 세계로부터 솟아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 전시를 조직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제도 내에서 순환되고 그럼으로써 제도를 부양하게 될 신선한 미술가를 확보하는 것이다. … 전시는 스스로 미술의 밝은 미래를 보여준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하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을 떠받칠 젊은 미술가들을 수급하지 못해 조바심 내는 미술이란 대체 무엇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미술가들이 수행적으로 발견해나가는 미술은 또 무엇인가? 여기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미술, 두 개의 시간이 중첩되어 있다. 이 시간들은 때로 동일한 전시에, 심지어 동일한 작업에 중복 투영되면서도 서로 마주치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이러한 미끄러짐 또는 시간의 탈구를 전면화하기 위해서는 조금 다른 시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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