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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 개정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이혜승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4월
평점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대표적인 다언어 작가로서 러시아 문학, 영문학 모두에서 큰 업적을 세운 작가로 인정받는다. 대표작으로는 『절망』, 『재능』, 『사형장으로의 초대』 등이 있으며, 특히 기념비적인 성공을 거둔 『롤리타』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소설을 쓰면서 웰즐리 칼리지, 코넬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문학 강의를 하였고 당시 그의 강의는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 책은 러시아 대표 작가 여섯 명, 열다섯 개의 작품에 대해 나보코프가 남긴 자필 원고, 메모 형태로 남아 있던 강의록을 한 권의 책에 담아 출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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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가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과거에 살았던 문학의 거장과 함께 러시아 문학을 재독해보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우리가 눈으로 빠르게 훑고 지나갔던 문장을 나보코프는 일시 정지시키거나 슬로모션을 걸어 글 속에 담긴 풍경, 색감, 온도, 분위기, 감정은 물론 작가의 의도, 함의를 온통 끄집어 내어 우리 눈앞에 배열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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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진정한 문학은 심장이나 뇌(영혼의 위라고 할 수 있는)에 좋다는 물약 삼키듯 단숨에 들이켜 버리면 안 된다. 문학은 손으로 잘게 쪼개고 으깨고 빻아야 한다. 그래야만 손바닥의 오목하게 파인 가운데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한 향을 음미할 수 있다. 그것은 아삭아삭 씹어서 조각난 상태로 혀 속에서 굴려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가진 진귀한 향기를 감상할 수 있다. __208p
위의 문장은 나보코프가 문학을 대하는 태도와 소화하는 방식을 가장 잘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하나의 문학 작품을 큰 덩어리로 다루기보다는 페이지, 문장 단위로 쪼개 들어가 가장 작은 단위에까지 접근하였다가 다시 그 조각들을 합쳐 전체를 조망한다. 그의 강의를 따라가다 보면 막혔던 생각의 길이 뚫리고 나보코프의 시선이 더해져 작품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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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비평이 꽤 신랄하다고 할 만큼 그의 주관적 견해가 짙게 묻어난다. 특히 도스토옙스키는 '문학적 진부함이라는 황량함을 지닌 평범한 작가에 불과하다'라고 했으며, 심지어 그의 이런 정체가 폭로되길 간절히 원하다고까지 말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 <가난한 사람들> 등 대표작을 나열하기도 버거운 대문호를 일말의 여지도 없이 비판하는 그의 날카로움이 이 책에 생생히 살아 있다.
어떤 대목에선 충분히 납득이 되고, 또 다른 부분에선 고개가 내저어지기도 한다. 그의 강의는 이렇듯, 뭉툭하기보다는 뾰족해서 책을 읽으면서 부지런히 질문과 답이 오가고 긍정과 비판을 주고받는다. 당시 강의실에 퍼져 나갔을 그의 말이, 이젠 책에 담겨있어도 여전히 '강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러시아 문학의 특수성은 무엇인지, 우리가 문학 작품을 어떻게 읽고 이해해야 하는지 깊이 있게 알려주는 책으로서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_____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