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애니에서 과학이 보인다
류상진 지음 / 도도서가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서평은 #북유럽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서적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덕업일치, 신조어입니다. 자주 쓰이는 단어는 아니지만, 오타쿠가 하는 '덕질'이 직업이 되는 것이지요. 무척이나 부러운(?) 그런 내용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일로 한다는 말이니까요.

덕업일치를 실천하고 있는 공학교수가 이런 책을 냈습니다.


강백호를 모르는 오타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슬램덩크라고 하면 일반인들도 다 아시겠지요. 책 내용은 이런 오타쿠적인? 질문을 과학적으로 해석합니다. 장풍으로 모기를 잡는다? 장풍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스트리트파이터로 기억합니다. 이런 걸 다 아는 저도 일반적이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책에 흥미가 있다는 말은 이미 어느 정도는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읽는다고 생각하기에, 이 책을 보시려는 분들이라면 대부분의 단어는 이해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우선 저자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프로페서 오타쿠... 교수 오타쿠이겠지요. 류상진 교수는 서울대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에서 기계공학을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그런데 소개를 읽어보면 학력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을 좋아했고, 로봇 이름과 설정을 외우고, 틈만 나면 그림을 그리고, 낡은 기계를 분해했다고 합니다. 좋아하던 것이 결국 직업으로 이어진 경우입니다. ‘덕업일치’라는 말이 이렇게 깔끔하게 들어맞는 사람도 드물겠다 싶었습니다. 저는 그저 부럽기만 합니다. 본인이 이렇게 선언하는 오타쿠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로봇 애니메이션의 경우 언제나 박사나 교수가 등장합니다. 로봇을 만들고, 조종법을 알려주고, 위기 때마다 설명을 해주는 그분들 말입니다. 아니, 저것은 ~~가 아닌가!!! 하면서 친절하게 해설해주시지요. 저자는 그 계보에 본인도 슬쩍 이름을 올립니다. 우리의 도우미로서요. 그런데 허세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책 전체를 읽어보면 아실 수 있겠지만, 좋아하는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진짜라는게 느껴집니다. '진짜'입니다. 전공자가 억지로 대중문화 소재를 빌려온 책과, 원래 덕후였던 사람(현재도 덕후이시겠지요?)이 자기 전공을 살려서 만든 책은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저도 느낌이 오더라구요.


슬램덩크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강백호가 농구공을 던지는 장면을 가지고 궤적, 초기속도, 중력, 항력 같은 개념을 설명합니다. 도대체 이게 뭔소린가 싶긴 합니다. 문과의 슬픔이란... 그래서 ‘수평으로 움직이는 농구공의 동역학’이라고 제목만 봤으면 약간 긴장했을 텐데, 이미 머릿속에 농구공이 날아가는 모습이 있으니 이야기가 훨씬 쉽습니다. 우리는 슬램덩크를 몇 번 봤을까요. 강백호가 몇 번 던지는 걸 보았을까요? 그려집니다. 공이 손을 떠난 뒤 어떤 힘이 작용하는지, 속도가 왜 줄어드는지를 그림으로 보니 예전에 배웠던 포물선 운동이 갑자기 살아납니다. 공식이 먼저가 아니라 장면이 먼저라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일단 예시가 확보되니까요.


그렇게 상상할 수 있다고 해서 내용이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항력과 점성, 압력, 양력처럼 뒤로 갈수록 제법 본격적인 개념이 나옵니다. 전공자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상당히 거부감이 들 수 있는 수준입니다. 다만 저자는 곧장 수식부터 들이대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을 꺼내고, 그림을 붙이고, 애니메이션 장면을 다시 불러옵니다. ‘이걸 꼭 여기까지 따져봐야 하나’ 싶은 순간도 있는데, 그 집요함이 바로 이 책의 재미입니다. 역시 오타쿠일까요. 그런 본성이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오타쿠의 기본은 좋아하는 걸 쓸데없이 자세히 아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은 그 ‘쓸데없음’을 공학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오타쿠는 오타쿠가 알아본다고하는데, 저는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었던 건 역시 모기입니다. 원펀맨의 모기입니다. 사이타마는 어지간한 적은 한 방에 끝내면서 모기 한 마리 때문에 성질을 냅니다. 애니에서 보면 그냥 웃긴 장면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모기를 손으로 잡는 건 정말 쉬운가?”라고 묻습니다. 여기서부터 책의 소재거리가 됩니다. 손바닥이 움직이는 거리와 애니메이션 프레임 사이 시간을 추정하고, 그걸로 손의 속도를 계산합니다. 장면을 캡처하고 자를 대고 계산하는 프로페서 오타쿠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교수인데 오타쿠입니다. 책에서는 두 프레임 사이의 시간을 약 1/18초로 잡고, 손바닥이 대략 40cm 움직였다고 보고 속도를 계산합니다. 결과만 보면 모기의 이동속도보다 훨씬 빠릅니다. 그런데도 못 잡습니다. 여기서 끝내지 않고 반응시간과 공기의 흐름, 모기의 움직임을 다시 생각합니다. ‘사이타마가 왜 모기를 못 잡았는가’라는 쓸데없어 보이는 질문 하나가 순식간에 물리 문제로 변합니다. 이런 장면에서 이 책의 성격이 가장 분명해집니다. 과학을 설명하기 위해 애니를 끌어오는 게 아니라, 애니를 너무 좋아해서 과학까지 끌고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진성 오타쿠가 맞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생각까지 파고드는 사람이 있을까 싶네요. 그래서 재밌습니다...


재미있는 부분도 있고 상당히 심도있는 내용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공학 지식 부족이 통탄스럽게 느껴질 때가 이럴 때인 것 같습니다. . 타이거 모스 같은 비행체가 실제로 날 수 있는지를 따져보면서 질량과 무게, 밀도와 부력, 속도와 압력, 양력까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 장은 공학 수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교수의 덕업일치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아마 신나게 글을 쓰셨겠지요. 제 머리는 터지구요. 그런데 미야자키 하야오의 기계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여기서 더 집중해서 보지 않을까나? 하고 생각합니다. ‘멋있다’고만 생각했던 비행체를 실제 공학의 눈으로 다시 보는 경험이 꽤 재미집니다. 그 누더기 같으면서도 멋있는, 마법과도 같은 기계를 이런 눈으로도 볼 수 있구나, 역시는 역시나구나. 합니다.

심도있는 오타쿠 내용 뿐만 아니라, 귀멸의 칼날이나 원피스 같은 작품도 등장하여 분석 당합(?)니다. 작품 속 오류를 잡아내면서 지적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지에 대한 생각하며 해결책을 찾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의 상상력을 파괴하기보다는, 이 상상력을 현실의 물리법칙과 대결해보게 만듭니다.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과학이 시험 문제 속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농구공이 날아가는 궤적, 모기를 잡으려 내려치는 손바닥, 하늘을 나는 비행선 모두 결국 같은 물리법칙 안에 있습니다만 평소 그냥 보고 지나갈 뿐이었지요. 그런데 저자는 그 순간을 붙잡고 “왜?”를 계속 이야기합니다. 그 질문이 한 번, 두 번 이어지면 어느새 실험이 되고 계산이 되고 공학이 됩니다. 그렇게 파고들어가서 오타쿠가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반대일까요? 오타쿠이기 때문에 파고들면서 알아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오타쿠'라는 말에는 좋아하는 것을 오래 붙들고 파고든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과학자와 오타쿠가 의외로 비슷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 다 남들이 그냥 지나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궁금하면 끝까지 따라갑니다. 앞으로 애니를 보다가 말도 안 되는 점프가 나오거나 거대한 기계가 하늘로 뜨면 예전처럼 감탄만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미 이 책을 알아버렸으니까요. ‘저거 속도 얼마지?’, ‘저 무게로 뜰 수 있나?’ 같은 분석적인 사고를 먼저 할 수도 있겠습니다. 좋아하는 걸 더 깊게 보다 보니 과학이 따라오는 책, 그리고 과학을 알고 나니 좋아하던 애니를 한 번 더 재미있게 보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오늘은 어느 애니를 한 편 볼까, 생각이 드네요. 보면서 열심히 분석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