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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남자
앨프리드 베스터 지음, 해도연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8월
평점 :
이 서평은 네이버 #컬처블룸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서적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소설이 끌리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진득하게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책들을 이것저것 찾아보던 중, SF소설 작가 중에 앨프리드 베스터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타이거! 타이거! 라는 작품과 함께 '파괴된 남자' 라는 제목의 책으로 유명한 작가더군요. 마침 서평을 할 기회가 있어 후다닥 신청했는데, 운이 좋게 당첨이 되어 읽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읽고 나서의 느낌은 '와, 이런 빠른 전개로 숨돌릴 틈도 없이 몰아치다니' 하는 것이었습니다.

책의 내용부터 이야기하자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내용입니다.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편하겠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겁니다. 그런데 내 생각까지 들킨다면 이야기는 완전 달라집니다. 잠깐 욱해서 떠올린 말까지 남이 알아버리면 조용히 산다는 것도 쉽지 않겠습니다. 앨프리드 베스터의 소설은 그런 세상에서 완전범죄를 시도하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좀 이해가 안되는 논리이긴 합니다. 마음을 들키는데, 범죄를 시도하다니요.

책 속의 세상에는 사람의 생각을 읽는 ‘에스퍼’가 있습니다. 무려 79년 동안 살인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회인데, 거대 기업의 총수 벤 라이히는 경쟁자인 드코트니를 없앨 생각을 합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감추고 맞추게 하는 그런 소설이 아닙니다. 오히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상황에서 무슨 수로 범죄를 저지를지가 궁금해집니다. 꽤나 독특한 발상이지요. 그래서 재밌었습니다.
첫 장에서는 자신을 유일하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고 믿는 인간의 오만을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범죄 이야기 앞에 왜 이런 말이 나올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라이히를 보면 조금 알겠습니다. 남들은 못 해도 자신은 해낼 수 있다는 사람이니까요. 자신감이 이 정도면 무섭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생각이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라이히가 드코트니를 찾아가는 장면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거대한 난초 속처럼 꾸며진 방인데, 황금빛 장식은 낡고 바닥은 갈라져 있습니다. 화려한 곳인데도 전혀 편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분노를 터뜨리는 라이히를 보니, 미래 사회라고 욕심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겠더군요. 상당히 과거에 쓴 책에서 미래(지금 시점도 미래긴 합니다)를 보는 관점도 흥미로웠네요.

주인공을 쫓는 사람은 에스퍼 경찰 링컨 파월입니다. 남의 생각을 읽는 경찰이면 수사가 금방 끝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누가 범인인지 알아차리는 것과 증거로 입증하는 일은 별개니까요. 라이히가 빠져나갈 길을 만들면 파월은 다시 그 틈을 좁힙니다. 범인을 알고 읽어도 재미가 생기는 이유입니다. 언제 잡히려나? 하고 읽게 됩니다. 마치 헬리콥터를 타고 도망가고 있는 범죄자를 내려다 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에스퍼들이 전부 같은 방식으로 능력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의사 샘 @킨스는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치료하고, 텔레파시 능력을 일깨우는 교육도 돕습니다. 남의 마음을 읽는 힘이 누군가에게는 수사 도구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람을 돕는 수단인 겁니다. 이런 장면 덕분에 에스퍼가 그저 범인을 잡기 위해 등장한 초능력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같은 느낌이 강했습니다.

텔레파시를 글로 보여주는 방식도 재미있습니다. 이름에 @ 같은 기호가 들어가고, 생각이 오가는 대목에서는 글자의 크기와 배열도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어디부터 읽어야 하나 싶다가도, 여러 생각이 한꺼번에 끼어드는 모습을 글자로 옮기려 했구나 싶었습니다. 조용한 대화인데 눈으로 읽기는 꽤 바쁩니다. 순식간에 몰아치는 전개, 라는 느낌을 받는 게 이런 부분에서도 있었습니다.
책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짧은 노래도 소설의 분위기를 느끼는데 도움이 됩니다.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닌데도 같은 문구가 다시 나오니 자꾸 머리 속에서 재생되는 느낌입니다. 저자의 독특한 서술 방식인 것 같습니다. 이런 장치가 더해져서 단순히 사건의 순서만 따라 읽는 게 아니고 . 라이히가 호감 가는 사람은 아니긴 합니다. 그래도 다음에는 무슨 수를 쓸지 궁금해서 그의 행동에 관심을 갖고 읽어나가게 됩니다.
결국 완전범죄가 가능한 것일까요? 아니면 불가능한 걸까요? 쫓고 쫓기는 관계의 묘사가 맛깔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금 옛날 문체라고 할만한 표현들이 보입니다만, 그래서 더 SF의 맛이 납니다. 다른 시대의 말투도 느껴지구요.

라이히를 응원한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금방 잡혀버리기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수를 쓸까, 파월은 그걸 어떻게 알아챌까 하는 재미가 있었거든요. 범인을 처음부터 알고도 이렇게 따라 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저자의 필력을 느낄 수 있었던 부분입니다.
제목의 ‘파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책을 읽다보면 알게 됩니다. 저에게는 유명한 SF 고전을 읽었다는 뿌듯함보다, 재미있는 작가 한 명을 새로 알게 됐다는 반가움이 더 컸습니다. 처음 작가를 찾아볼 때 함께 눈에 들어왔던 타이거! 타이거!도 읽어봐야겠습니다. 이 정도로 이야기를 몰아가는 작가라면 다른 책도 궁금해질 수밖에 없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