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괴담
온다 리쿠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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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네이버북유럽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서적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어릴 적에는 무서운 것이 참 많았고 학교에서만 해도 다양한 괴담이 존재했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세상에서 정말 무서운 것은 귀신이나 요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히려 불투명한 노후, 자식들의 미래, 혹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건강의 적신호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이 우리를 더 옥죄어 오곤 합니다. 그래서인 한동안 소설, 그중에서도 '공포 소설'은 손이 잘 가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현실도 벅찬데 굳이 가상의 공포까지 소비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온다 리쿠의 커피 괴담은 조금 달랐습니다. 이 책은 자극적인 비명이나 선혈이 낭자한 장면으로 독자를 겁주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매일 마시는 커피 향기 속에,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의 풍경 속에 아주 얇고 예리한 칼날 같은 공포를 숨겨놓았습니다. 데뷔 30주년을 맞은 작가의 관록이 느껴지는 이 작품집을 읽으며, 오랜만에 기분 좋은 서늘함을 느꼈습니다. 오늘은 이 기묘한 책과 함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사실 최근 출퇴근 시간에 온다 리쿠의 꿀벌과 천둥을 읽고 나서 작가의 작품을 더 읽어보려고 했는데, 마침 #북유럽카페 에서 서평을 진행했기에 타이밍 좋게 이 책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펼치는 작가라고 생각됩니다.



소설의 설정은 저와 같은 나이대의 남성들의 등장인물에게서 오는 묘한 대리만족과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각자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네 명의 친구들이 등장합니다. 영화 프로듀서, 작곡가, 의사, 그리고 작가. 겉보기엔 번듯한 직함을 가진 이들이지만, 속내는 다들 비슷합니다. 업무의 중압감, 반복되는 일상, 그리고 문득 찾아오는 인생의 허무함 같은 것들이지요.

이들은 바쁜 시간을 쪼개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습니다. 교토, 요코하마, 도쿄 등지의 유서 깊은 카페를 찾아가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이 모임의 유일한 규칙입니다. 술을 마시며 신세 한탄을 하는 것도 아니고, 골프를 치며 비즈니스를 논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이야기'를 위해 모인다는 점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들의 여유가 부러웠습니다. 사회적 체면이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어린 시절처럼 둘러앉아 시시콜콜하면서도 으스스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시간을 허락하는 삶의 여유가 있다는 것.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판타지 같은 요소는 괴담 그 자체가 아니라, 이 네 남자의 우아한 모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을 어떻게 맞춰서 어떻게 모이는지 부러울 정도였습니다.



작가가 그려내는 공포의 방식은 '잠식'입니다. 쾅 하고 터지는 것이 아니라, 잉크가 물에 번지듯 서서히 일상을 물들입니다. 책에 실린 에피소드들은 대부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들을 다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여행지에서 묵게 된 낡은 호텔 방의 벽지 얼룩이 사람 얼굴처럼 보인다거나, 산책길에 마주친 기묘한 분위기의 집, 혹은 오래전 헤어진 친구에 대한 찝찝한 기억 같은 것들입니다. 작가는 이러한 평범한 소재를 비틀어, 독자로 하여금 "어? 나도 이런 적 있는데?" 하는 기시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특히 인간의 인지 본능인 '파레이돌리아'를 공포의 도구로 사용하는 대목은 탁월합니다. 점 세 개만 찍혀 있어도 사람의 얼굴로 인식하려는 뇌의 본능. 작가는 묻습니다. "우리가 보는 그 얼굴이 정말 착각일까? 만약 착각이 아니라면?" 이 질문은 책을 덮고 난 뒤에도 꽤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무심코 천장의 무늬나 옷장의 그림자를 유심히 살피게 만들더군요. 혹시? 혹시? 하면서 이미 무뎌진 공포의 감정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작가의 필력에 감탄을 많이 했었습니다.



말그대로 계속해서 진행되는 중년 남성들의 커피 괴담들입니다. 사실 나이를 먹을수록 과거의 기억은 미화되거나, 혹은 왜곡되기 마련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화자의 '과거 기억'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때 내가 겪은 일이 정말이었을까?"라는 의구심은 이야기 전반에 짙게 깔려 있습니다.

작가는 기억의 불완전성을 파고듭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기억하고, 믿고 싶은 대로 과거를 재구성합니다. 하지만 그 기억의 틈새에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끼어든다면 어떨까요? 작가는 그런 점을 잘 이용합니다. 그 아련한 향수를 순식간에 섬뜩한 악몽으로 바꿔놓는 솜씨를 발휘합니다.

젊은 시절의 여행담, 잊고 지냈던 동창생 이야기 등 중년 독자라면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 묻어두었을 법한 소재들이 괴담으로 바뀔 때, 그 공포의 무게감은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지나온 삶의 궤적 어딘가에 나 또한 이런 '구멍'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서늘한 자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 그때? 설마? 하면서 되짚어보게 되지요.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실화와 허구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서문에서 작가는 이것이 자신이 겪거나 들은 이야기임을 암시합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작가 캐릭터 또한 온다 리쿠 본인을 투영한 듯 보입니다.

구체적인 지명과 실존하는 카페 이름들이 거론될 때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소설을 넘어 현실 세계로 침범해 들어옵니다. '혹시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 카페에서도?'라는 상상은 독서의 몰입도를 극대화합니다. 픽션이라는 안전장치를 살짝 풀어헤침으로써, 독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작가의 노련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실제 가게라는 점이 마치 영화에서 '실화를 기반으로 제작되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방식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살다 보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마주하곤 합니다. 20대 때에는 모든 것에 인과관계가 명확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세상에는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사주라던지 점집에 기웃거리게 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 점을 『커피 괴담』은 바로 그 '설명되지 않는 영역'을 우아하게 다루면서 저에게 파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무더운 여름날의 납량특집으로 읽기 보다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나 스산한 바람이 부는 가을 저녁에 보면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진하게 내린 커피 한 잔을 곁들인다면 더욱 몰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일상의 권태가 느껴지거나, 머리 식힐 무언가가 필요하신 분들이 읽으시면 좋겠습니다만 혼자 있는 밤에 읽으실 때는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책을 읽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익숙했던 집안 풍경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니까요. 파레이돌리아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온다 리쿠가 건넨 이 씁쓸하고도 기묘한 커피 한 잔이, 팍팍한 일상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휴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커피가 어떻게 느껴질지는 읽는 분들에 따라 다 다르겠지만요.

이 서평은 북유럽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서적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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