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생각하기 - 손과 몸을 쓰며 사는 삶이 주는 그 풍요로움에 대하여
매튜 크로포드 지음, 윤영호 옮김 / 사이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손으로, 생각하기

매튜 B.크로포드 / 사이

 

- 손과 몸을 쓰며 사는 삶이 주는 그 풍요로움에 대하여

 

이 책에 관심이 갔던 것은 머리로 하는 일들에 대한 지겨움 때문이었다. 저자는 실제로 철학자이면서 모터사이클 정비사이다. 자신만의 샵이 있고 그 곳에서 고객을 상대로 모터사이큰 수리를 한다. 그 스스로 느꼈던 지식노동자로서의 삶에 대한 기대와 실망 속에서 스스로 찾아낸 삶을 생생하게 만드는 방법이 솔직하게 적혀있다. 다만 내용 속에 모터사이클 부품에 대한 이야기는 나 같은 문외한에게는 마치 외국어처럼 들렸고 문장이 가끔 너무 꼬여있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평소 관심이 많던 나였기에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p.8 도구의 사용이 줄어든 것은 물건에 대한 우리의 성향이 더 수동적이고 의존적으로 변했다는 징후인 듯 하다. 실제로 우리가 직접 손으로 물건을 고치거나 만드는 순간에 생겨나는 활기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직접 물건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만들어진 물건을 구입한다.

 

P.21 학교에서 우리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인위적인 학습환경을 조성한다. 아이들도 그것이 인위적으로 조성되었고 자신들의 온전한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 손을 쓰면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다면 세계는 여전히 추상적이고 우리와 동떨어진 상태로 남게 되고 학습에 대한 열정은 타오르지 않을 것이다.

- 더그 스토우, 20061116, 손의 지혜(블로그)

 

요사이 나는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생각해 본적이 있다. 그런데 일시적인 체험이 아니라 실제가 함께 돌아가는 공간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동물도 기르고 농작물도 돌보고 수확해서 식사 준비와 정리도 하고 만들고 싶은 공간도 만들고 놀이도 하고... 어떤 정해진 프로그램은 최소화 하고 실제와 부딪혀 보는 경험이 많은 공간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인위적인 학습환경을 최소화하는 경험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위의 이야기는 내가 지금하고 있는 생각과 많은 부분에서 연결되었다.

P.26 손으로 작업하는 능력을 통해 세상에 자신을 구체적으로 표출하는 만족감을 느끼면 사람이 차분하고 느긋해진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런 만족감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자질구레한 설명을 해야 하는 수고를 덜어내는 듯하다. 그저 자신이 만든 건물, 자동차, 조명을 가리키기만 하면 된다.

 

P.26 가구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수지가 맞지 않아도 계속 가구를 만들겠다고 말할 것이다. 서로 공유하는 기억이 삶의 기념물 속에 고스란히 간직될 뿐 아니라 그런 물건을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물론 미래와의 일종의 교감이기 때문이다.

 

P.27 한나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만들어 오래 사용하는 물건들은 이 세계의 이치를 일깨우고 인간과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물 간에 교류하는 관습을 생성한다.” “인간세계의 현실성과 신뢰성은 우리가 어떤 물건을 만드는 행위, 그리고 그 물건을 만든 작자들보다 더 오래 존속하는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다.”

 

요사이 손으로 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이 생겼다. 요리, 바느질, 목공, 농사 등 손으로 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 오신 분들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으셔서 그런지 담백한 느낌이 있으시다. 나도 앞으로 손으로 하는 일을 하고 싶다. 만약 그것만 하기어렵다면 반반이라도 하고 싶다. 경제적 가치를 뛰어넘는 교감속에서 만나게 되는 경험들이 참 소중하다. 오늘도 공용텃밭에서 옥수수를 수확했다. 그 옥수수는 돈을 주고 가게에서 산 옥수수와는 다른 느낌이다. 옥수수밭을 매고 물을 주었던 시간과 정성이 함께 했기에 그런 것이겠지. 이런 소중한 기분을 느끼고 공유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

 

p.30 장인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유행이 아닌 자기 기술의 객관적인 기준을 따른다. 아무리 적용이 제한적이라고 해도 그런 정신(물건에 대한 사심 없고 철저하고 확고한 신념)은 현대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강력한 존재론은 산자본주의 첨단기관들은 물론 그런 기관들에 적합한 노동자들(하나의 기술에 얽매이지 않는 순응적이고 다재다능한 인력)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의 교육제도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p.51 이런 경우에 정비사는 자신을 믿고 그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이해의 과정에는 종종 문제해결이 아닌 <문제 발견>이 수반되어야 한다. 수학교과서 한 챕터의 끝부분에 있는 문제를 풀 때 학생들은 문제 해결을 하는 것이다. 만약 그 챕터의 제목이 <두 개의 미지수가 있는 연립방정식>이라면 학생들은 어떤 공식을 사용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이처럼 한정된 상황에서는 문제를 바라보는 적절한 맥락이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해석을 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실제 세계에서는 문제가 이처럼 이해하기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대체로 정보가 너무 많은 탓에 무엇이 적절한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 것이지 알기가 어렵다. 당면한 문제가 어떤 유형의 문제인지 안다는 것은 그 상황의 어떤 특징을 무시해도 되는지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그 상황의 범위조차 애매모호할 수 있다. 적절성을 구분하는 것은 규칙을 적용한다고 실현되는 것이 아니며 경험이 뒷받침된 판단이 필요하다.

 

p.60 하지만 이 시점에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간단해 보이는 한 공정을 수행하기 위해 단순한 장비를 모두 체결했을 때 그 재료에서 끊임없는 변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 두꺼운 부분들과 얇은 부분들이 계속 새로운 상황을 만들거나 이전의 해법들을 허사로 만드는데, 그러면 몇 분마다 한 번씩 새로운 문제가 작업자의 창의성을 시험한다. 그는 띠톱도 없이(당시는 1923년이다.) 저항이 생길 때마다 우직하게 힘으로 밀어붙인다. 묵재는 결코 호락호락하게 기계의 먹잇감이나 무력한 희생양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목재는 자신을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 자신만의 특별한 가치를 내준다.

 

이 부분의 설명은 신선했다. 유행을 따르기보다 객관적으로 주어진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 안에서의 최선을 찾아나가는 사람이 장인이라는 설명이 그랬다. 나는 장인은 뭔가 경지에 올라서 자기마음대로 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단순한 사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인의 의미가 수행자의 의미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어떤 일을 하던 간에 문제를 스스로 발견하고 그 안의 무궁무진한 정보를 정리해서 적용하며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것!! 그것은 어쩌면 모든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마스터키 일지도 모르겠다.

 

p.65 전문가들의 판단을 배제하는 이유가 항상 이익을 필요로 하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다. 이따금 그것은 공공정책의 문제이기도 하다. 표준화된 시험은 교과과정에서 교사들의 자유재량을 빼앗고, 엄격한 판결지침은 판사들의 판단을 위축시킨다. 이처럼 집중화된 권력으로 우리를 이끄는 동력은 바로 우리의 자유로운 정치적 본능인 듯하다. 우리는 개인들의 수중에 있는 권력을 신뢰하지 않는다. 중립적 절차를 존중하는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무책임의 정치다. 그것은 선의(권력의 남용으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보호하려는 취지)에서 시작하지만 개인들, 특히 공공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행위주체성을 먹어치우는 괴물이 되었다. 민간부문에서 괴물은 권력에 대한 불신이 아닌 이윤의 극대화에 의해 생겨나지만 어차피 먹이는 비슷하다.

 

p.73 물론 창조성은 오랜 연습을 통해 숙달된 전문기술의 부산물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 기술은 복종 submission을 통해 축적된다. (음계를 익히는 음악가나 텐서 수학을 배우는 아인슈타인을 생각해보라.) 창조성과 자유를 동일시하는 것은 신자본주의 문화와 아주 잘 어울리는데, 신자본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융통성은 모든 업무에 대해 진정한 능력을 개발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생각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표준화되고 계량된 시험과 지침이 사람들의 창의성을 감소시킨다는 말에 백분 동의한다. 항상 새로운 상황속에서 자꾸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식의 적용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해결책이니까. 모든 공무원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공무원의 업무태도를 보면서 느끼는 답답함이 이런 것은 아닐지.... 창조성은 복종을 통해 축적된다는 말. 그리고 신자본주의가 오래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참 안타깝게 느껴진다.

p.74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직업적 조언을 할 때 정말로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내 생각에 가장 믿을만한 대답은 <인간적 가치에 주목하면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는 피하라>는 것뿐이다.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 인간적이고 상식적인 대답은 생각과 행동을 철저히 구분하는 자본주의 핵심요건에는 어긋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p.76 사무실에 틀어박혀 정보시스템의 조작자나 창조성이 떨어지는 단순한 일꾼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자립적인 기능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더 만족스러울 것이다. 이런 조언을 반아들일 수 있으려면 다른 사람들이 의무적이고 필수적이라고 정해주는 삶의 진로를 거부할 줄 아는 반골기질을 지녀야 한다.

 

<인간적 가치에 주목하면서 유토피아적 이상주의는 피하라> 멋진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의무적이고 필수적이라고 정해주는 삶의 진로를 거부하는 반골기질로 즐겁게 살아가리라!! !!!!!

p.85 초기 모터사이클은 그다지 편리하지 않았다. 아마도 말보다는 편리했을지 모르지만 아주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현재의 바이크보다도 더 탑승자의 지적, 도덕적 자질을 문제 삼았다. 건망증과 소심함은 탑승자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오일의 양을 주입할 때 드러난다. 어떤 사람은 묘하게 애증을 느끼면서 노새처럼 결코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사물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반면 어떤 사람은 차라리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물리학의 특정한 외인적 사실에 맞춰야 했다. 구식 바이크들은 탑승자를 칭찬하지 않고 호되게 가르친다.

 

p.86 모든 면에서 우리는 구세대들이 바이크를 타면서 필요로 했던 것 같은 <자신의 판단을 실행할 기회>가 적어졌다. 그런 판단의 필요성은 인간의 우수성을 이끌어낸다. 일단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지적능력은 후천적으로 훈련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현실과 거리를 둔 사색의 산물이 아니다.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얻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기기의 반동 같은 힘겨운 현실에서의 육체적 몰입을 통해 생겨나는 일종의 <흥미>. 그런 몰입의 결과로 아도덕적 亞道德的 가치가 발달된다. 사용자는 외부적 현실에 책임을 져야 하며 그 현실에서 혹독한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을 감수한다. 결국 노동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기술교육은 도덕교육에도 기여한다.

p.92 예를 들어 내가 러시아어를 배우고 있다면 존중해야 할 권위적인 체계를 접하게 된다. 러시아어를 배우는 것이 어렵고 목표는 아득해서 어쩌면 완전히 달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가 할 일은 나와 별개로 존재하는 무언가를 서서히 밝혀내는 것이다. 관심은 실제 지식으로 보상을 받는다. 나는 러시아어에 대한 애정 때문에 내게 맞지 않는 무언가, 내 의식이 장악하고 흡수하고 부정하거나 꾸며낼 수 없는 무언가에 열중하게 된다.

 

p.94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능동적인 참여와 무분별한 소비 간의 차이를 어느 정도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 p.96 베티 크로커는 케이크 믹스를 아주 완벽한 상태로 만들지 않는 편이 사업성이 더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빵을 만드는 사람들은 케이크믹스에 자신이 직접 달걀을 첨가할 경우에 케이크를 완성한 후 더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여기면서 살아왔다. 동전을 넣으면 음료수가 나오듯이 어떤 현상이든 아주 단선적으로 사고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불편함 속에서 얻게 되는 경험들은 우리에게 호되게 가르친다. 그런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마 바이크를 다루면서 필자가 느끼는 것은 천연염색을 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목공을 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손으로 하는 일이 우리에게 <나의 판단을 실행하고 또 그 실행을 바탕으로 고민하고 또 실행하는 경험>을 주는 것이다. 그를 통해 나는 자판기에서 뽐은 음료수에 대해 느꼈던 감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주인됨의 느낌, 애정, 만족감을 갖게 된다. 어디서든 주인이다.

 

隨處作主 立處皆眞(수처작주 입처개진)

 

있는 곳에서 주인이 되면 그 자리가 진리가 된다.

 

p.116 자동차든 인간의 육체든 간에 무언가를 고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언가를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르다. 정비사와 의사는 비록 전문가일지라도 매일 실패에 직면하지만 시공자는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그들이 고치는 물건들이 그들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닌 탓에 완벽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실패의 경험은 숙달된 전문기술에 대한 자만심을 누그러뜨린다. 의사와 정비사는 날마다 별개의 개상으로서 세계와 소통하고 자아와 비자기 간의 차이를 뚜렷하게 인식한다. 무언가를 고친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도취의 치유책일지도 모른다.

 

p.130 훌륭한 미술품은 평이한 환상의 형태를 거부하기 때문에 종종 우리에게 신비감을 준곤 하는 반면, 조악한 미술품은 인식이 가능한 익숙한 형태의 자기중심적 몽상이기 때문에 전혀 신비감이 없다. 훌륭한 미술품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세계가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지를 나타냄으로서 객관성을 지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증명한다.

 

p.139 엄격하고 독자적인 현실을 다루는 모든 분야는 <정직함><겸손함>을 필요로 한다. 나는 특히 우리가 직접 만들지 않은 것들을 치료하거나 수리하는 행위 같은 무언가를 고치는 추계적 기술에 반드시 이런 요건이 적용된다고 믿는다.

p.224 하이데거는 우리가 눈으로 쳐다봄으로써가 아니라 직접 손에 쥐고 사용함으로써 망치를 알게 된다는 유명한 격언을 남겼다.

 

무언가를 고친다는 행위. 그것이 바이크가 되었던 사람이 되었던 간에 매일 실패에 직면한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만들지 않았으므로 내가 다 알지 못한다는 것과 또 그를 바탕으로 내 노력에 부족함은 없음을 전제한 접근은 <정직함><겸손함>을 동반할 수 밖에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당당함과 겸손함과도 일맥한다. 실상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같은 원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두 가지 태도로 대한다면 어떤 일이든 조금씩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머리가 아닌 손으로 해 나가면서 진짜 그 것을 만나가는 것이리라. 비록 오늘 실패한다고 해도 그것은 끝이 아니니까 말이다.

 

p.225 만약 사고thinking가 행동doing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면, 세계를 지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세계 속에서 우리가 하는 일에 의해 좌우된다. 실제로 신발끈을 제대로 알려면 신발끈으로 신발을 묶어 보아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p.264 토머스 홉스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동물은 일단 기대하는 결과에서 시작해 요건을 충족하는 도구를 찾아내는 반면, 인간은 만물을 잠재적인 도구로 여기면서 전혀 다른 목적에 따라 도구가 초래하는 모든 결과를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고 주장했다.

 

p.264 그는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행위를 동반하고 추진하는 예리한 가치 식별력이 있으며 그런 행위를 즐겁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가치평가적 주의력이라고 적고 있다. “어떤 행위를 즐긴다는 것은 그 행위를 유익하거나 가치있게 만드는 모든 것에 대해 기울이는 진지하고 날카로운 주의력에서 비롯된다. ....... 만약 누군가 그 행위의 도구적 가치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그의 가치평가적 주의력은 그 행위 자체가 아닌 기대하는 결과, 즉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아닌 다른 것을 향하게 된다. 이런 부류의 주의력을 지니게 되면....... 아무 생각 없이 행위를 하게 되고 그 행위가 부담스러워진다.”

이런 브루어의 주장을 입증하는 듯한 유명한 심리실험이 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매직을 주고 그림을 그리며 놀게 해주었다. 일부 아이들에겐 사전에 약속을 하고 그림을 그리면 금장과 리본으로 장식된 상장을 주면서 보성을 했던 반면 다른 아이들에겐 아예 그런 보상에 대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몇 주일 후에 보상을 받은 아이들은 그림 그리기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 아이들의 그림은 수준도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반면, 보상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여전히 그 활동을 즐겼고 높은 수준의 그림을 그렸다.

 

우리는 무엇을 통해 지속가능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 행위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 만족감이리라. 결과에 대한 앞선 생각들은 현재 내 손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도리어 흥미를 떨어뜨린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흥미롭다. 학교라는 공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배움이라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알려주는 것 같다. 교사나 부모의 앞선 욕심은 도리어 아이들의 추진력을 방해할 뿐이다. 시간과 공간을 열어두고 아이들 스스로 마음껏 즐기게 하자.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과 만날 수 있도록 하자.

 

p.281 자발적인 행위는 대체로 기분에 따라 선택되는 자아의 의지에 의해 실행되는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대립은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목적과 자아가 결정하는 목적 간에 일어난다. 전자에 근거한 노동은 소외되는 반면 후자에 근거한 노동은 자기실현이나 성취를 이룬다.

 

p. 283 따라서 기술자의 개성은 공동의 세계에 반응하며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는 행위에서 표출된다.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그가 응대하는 고객들과 그가 수행한 작업의 우수성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다른 기술자들이다. 이런 사교적인 개성은 스스로 법칙을 부여하는 자율의 개념에 내포된 자기페쇄와 대비된다. 자율의 개념은 우리가 우리에 앞서 존재하는 세계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그 개념은 본질적인 고립을 가정한다. 자율적인 존재가 자유롭다는 것은 다른 모든 존재들에게 시중을 받는 존재가 자유롭다는 의미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을 이런 식으로 여기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게 입은 근본적인 은혜를 져버리는 것이며 배은망덕한 도덕적인 과오를 저지르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의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하며 모든 개인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닌 세상에 의존한다.

 

p,284 깨어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처한 상황을 충분히 의식하며 산다는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상황에 맞게 적응하고 무엇이든 자신의 우수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p.286 내가 극기주의라고 부르고자 하는 혁신의 대안은 단연코 현재의 삶에 대한 것이다. 극기주의는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영속적이고 국지적인 실행력을 요구한다. 실제로 이것은 개인의 행위주체성과 지식에 대한 애정이 지금 당장 한 사람의 삶에서 실현될 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잘 살아보자!! 우리 스스로 상황에 맞게 적응하고 무엇이든 나의 우수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보자.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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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동굴에서 10여일을 갇혀 있었던 태국 유소년 축구팀 선수들이 무사히 구조되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의식주에 있어서의 괴로움이 많았을 그 상황 속에서 소년들의 코치는 명상과 마음수련으로 소년들을 다독였다고 한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익숙한 속담이 떠오른다. 여기서 나오는 호랑이는 진짜 호랑이라기보다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어려움이다. 그러면 이 속담의 숨은 의미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깨어만 있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비가 오든 오지 않던 자유로운,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은 우산이 준비된 자이다. 즉 해탈한 사람이다. 우산이 준비되어 있다면 비가와도 오지 않아도 괴롭지 않다. 요즘 열심히 듣고 있는 즉문즉설에서 법륜스님께서 해주신 말씀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최악의 상황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나치 치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상황이 아닌 마음가짐의 힘으로 그 상황을 통과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서가의 목록으로 남겨두는지 알겠다.

 

 

“ ‘’why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니체가 한 말을 프랭클 박사는 인용한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한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 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사람의 길과 동물의 길, 공존의 길과 욕망의 길 사이에서 우리는 매번 고민하고 갈등하고 결정한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결정의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평범하고 의욕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

 

가장 큰 두려움은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지나고 나면 그 언덕이 생각보다 작게 느껴진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상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머리만으로 하는 것의 한계!!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 삶 속에서의 결정과 실행만이 의미가 있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법륜 스님의 말씀처럼 고와 락은 하나이고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 질 수 없다. 각자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마음가짐을 잘 정하는 것만이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라는 말이 정말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실존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각 개인에게 부과된 임무는 거기에 부가되어 찾아오는 특정한 기회만큼이나 유일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로고테라피 치료라는 각도에서 보면, 의미와 그 의미에 대한 인식은 허공에 떠 있가거나 상아탑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된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일이 행해져야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

 

빅터 플랭크는 정신과의사로써 자신의 지식과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근거로 로고테라피라는 치료법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이 이론의 가장 큰 매력은 철저하게 현실안에서 내가 더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실천을 결정하고 실행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인생을 두 번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 많이 듣는 말이 엄마는 엄마가 처음이라서’, ‘사장님은 사장님이 처음이시잖아요.’라는 말인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두 번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두 번 사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

 

여러분은 우리가 굳이 성자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저 훌륭한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소수인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소수의 반열에 합류하려는 도전의지를 본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지금 아주 좋지 않은 상태에 있고, 우리 각자가 최선을 다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더욱 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경계심을 갖자. 두 가지 측면에서의 경계심을.

아우슈비츠 이후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히로시마 이후로 우리는 무엇이 위험한지를 알게 되었다.

 

성자들은 우리랑 전혀 다른 사람이겠거니 하는 마음이 들때도 있다. 하지만 플랭크의 말처럼 우리는 도전의지가 있는 사람들이다. 법륜스님 말씀처럼 그냥 하자’. 그리고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끄달리지 말고 계속 나아가자. 이전의 세상도, 지금의 세상도, 앞으로의 세상도 어려움은 있고 그 안에서 시지프스처럼 돌을 밀어올리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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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에서 지는 법
조엘 H. 코언 지음, 김민수 옮김 / 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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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달리기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5km를 달리면서도 헉헉대곤 했는데 지금은 그래도 10km까지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다 박코치 덕분이다. 땡큐!!!

 

그래서 신간코너에 있는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언젠가는(올해 가을쯤?) 하프마라톤에 도전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참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책날개를 열어보고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지은이가 [심슨 가족]의 작가이자 프로듀서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심슨 가족]의 적당한 유머와 삶에 대한 생각들을 좋아한다. 기대가 되었다.

 

지은이는 세련되게 시작하지도, 연습하지도, 마라톤대회 참가도 못했다. 하면서 느낀 어려움과 고민들도 솔직하게 자신의 비겁함이나 찌질함도 가리지 않고 솔직하고 명확하게 적어주었다. 그렇고 그런 자랑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담담하게 엄청난 순위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보잘 것 없는 성적도 아닌 자신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또 내노라하는 마라토너들 앞에서도 꿀리지 않았다. 나도 그 모습에 용기가 났다. 또 실질적으로 꼭 필요한 마라톤 용품이나 프로그램 이용에 대해서도 자세히 적어두었다. 그는 가성비내지는 합리적 소비자라서 절대 과도한 장비빨을 추천하지도 않았고 본인도 마라톤에 적절한 수준의 준비를 하고서 참가하였다. 그 부분도 마음에 들었다.

 

평범한 사람인 그의 담담하고 유쾌한 마라톤 도전기를 읽어 보면서 나도 마라톤 완주에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지은이의 기록인 4:26정도를 해내려면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 지금 10km를 달린 정도의 속도면 5:30은 걸릴 듯 @.@ )

      

그는 마라톤에서 졌다. 그런데 하나도 부끄럽거나 쪽팔리지 않다. 그의 담담한 도전과 성취가 아름답다. 그냥 하는 것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달린 것이다. 나도 지고 싶다. 그처럼 담백하게 져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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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 할아버지의 낡은 여행 가방 - 인생을 바꿔 주는
앤디 앤드루스 지음, 강주헌 옮김 / 뜨인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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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해변가 마을에서 마음 속 고민으로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홀연히 나타나 가르침을 주고 사라지는 산신령(?)같은 존스 할아버지의 이야기 이다.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살피고 더 나은 선택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그의 방식이 참 따뜻하다. 나도 그런 스승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 스스로가 나의 스승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스 할아버지의 조언 중 기억에 남는 이야기로는

 

우리는 남들에 대해서는 행동으로 판단하면서 정작 우리자신은 의도만으로 판단하는 습관이 있지.”

 

라는 말이었다. 그렇다. 나는 나의 의도와 행동을 모두 알고 있기에 내가 하려고 했던 것까지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 남은 행동 밖에 볼 수 없으니 행동으로만 판단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어떨 때는 억울해 하기도 하면서..... 이제는 그래서 거꾸로 읽어 보려고 애써보려 한다. 나에 대해서는 행동으로 판단하고 남들에 대해서는 행동에 숨겨진 의도가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보리라 애써야겠다.

 

한 가지 더!!!

퀴즈~

‘5마리 갈매기 중 한 마리가 저리로 날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면 몇 마리 남았나?’

정답은 4마리가 아닌 5마리!! 왜냐하면 결심만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심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부끄러워진다.

 

가방 하나 남기고 떠나신 존스 할아버지처럼 언젠가 우리도 사라져 가겠지. 그때까지 남은 나날은 행복하게 잘 살아가야겠다. 눈앞의 문제들에 집중하기 보다는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존스 아저씨가 나타나기도 사라지기도 했던 노을 지는 해변에 서서 마음을 데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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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콜로지스트 가이드 푸드 에콜로지스트 가이드 1
앤드류 웨이슬리 지음, 최윤희 옮김 / 가지출판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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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콜로지스트 가이드 푸드-

앤드류 웨이슬리

 

이 책은 세계적인 환경잡지 <더 에콜로지스트>에 소개되었던 윤리적 소비에 대한 정리도서이다. 매일매일 우리가 피할 수 없는 먹는다는 일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문제들은 알면 알수록 더 어렵게 느껴진다. 정말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외면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닌데..... 그래서 그런가 이 책은 계속 읽으려다가 말고 읽으려다가 머뭇거리게 되기도 했었다.

 

먼저 과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대규모 바나나 농장이나 망고 농장으로 인한 인권문제들 환경문제들이 구체적인 사례로 설명된다. 사실 과테말라나 페루에서 이런 농장을 지은 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미국이나 서유럽 같은 나라들에서 소비가 증가함에 따라 경제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곳으로 여기가 선정된 것이라고나 할까? 결국 환경과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피해는 생산지에게만 오롯히 남겨진다. 그 내용을 모르는 소위 선진국 사람들은 싸고 많아진 외국 과일들을 즐기기만 할 뿐....

이 잡지의 기자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소비자에게 해외에서 수입한 과일을 먹지 말고(혹은 덜 구입하고) 자국에서 제철에 생산된 것을 사먹으라고 잘려하는 운동이 가장 단순한 해답이 아닐까요?’라고 물어본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바나나링크라는 단체의 책임자인 재키 맥케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과연 단순한 답이 있을까요? 소비자가 어디에서 생산된 과일을 선택할지는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열대 과일이 아닌 인근 지역에서 난 먹거리를 선택하는 것이 더 지속가능한 해답이겠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당장 내일부터 파인애플을 구입하지 않는다면 파인애플 수출무역에 의존해 살아가는 수많은 현지 노동자들에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그 전에 그들 삶에서 수출무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도록 책임있게 지원해 주고, 한편으로는 각 지역 시장에 맞는 먹거리를 생산하는 데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두 번째는 채소 이야기이다. 유럽도 여러 가지 인력 수급과 관련하여 현재 농업 생산 인력의 대부분이 타국에서 온 노동자들이라고 한다. 우리의 현실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가속화 되고 있는 농촌인구의 고령화는 이 부분에 더 빠른 흐름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이 장에서는 누가 우리의 식량을 수확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농장의 제품관리자는 이렇게 대답해 준다. 농업에 있어서 여전히 필요한 핵심 자원은 두 가지뿐이라고 말한다. 하나는 비옥한 토양이고 또 하나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데 꼭 필요한 사람이다. 그는 사람이 없다면 결코 이 사업을 운영할 수 없다고 거듭 강조한다. “회사가 직원들을 보살피지 않는다면 노동력이라는 자원도 결국 고갈되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이 분은 불법 외국인 노동자를 값싸게 공급하던 유럽의 체계에 대해 말씀하시는 거였지만 나는 현재 우리나라 농촌에서의 농민에 대한 대우, 외국에서 오신 근로자들에 대한 대우가 생각났다. 물론 좋은 대우를 해주는 곳들도 많지만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일터에 대한 이야기도 듣곤 한다. 우리 농촌, 아니 우리 나라의 미래도 결국 사람의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세 번째는 육류 이야기였는데 우리에게는 낯선 사냥용 꿩이나 새들을 공장식으로 사육하고 사냥으로 잡아서 수렵육이라는 이름으로 둔갑시키는 이야기, 공장식 축산시설이야기, 그 축산으로 위해 과다하게 자행되는 제3세계 콩재배 이야기(유전자조작, 농약, 제초제, 대량생산), 연어 양식을 위해 남획되는 멸치이야기, 산양유와 우유에 대한 우리의 환상과 현실이야기 등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이쯤 되면 이런 공간들은 농장이 아닌 공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다른 어떤 것들도 고려되지 않는 너무나 근시안적인 현 인류의 모습이 참 안타깝다. 또 그 다양한 식재료에 대한 탐미로 그 대열에 내가 함께 해왔다는 사실이 너무나 미안하다. 소규모 낙농업으로 더 이상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분들이 안타깝다.

존이라는 이름의 농민은 말한다. “우리는 전 세계를 먹여 살리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저 우리 지역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그런데 결국 이런 움직임이 값싼 먹거리의 시대를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아닐까?

 

다음 장은 토마토 가공이나 오렌지 과즙 농장의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여건과 임금, 계란 생산으로 위해 죽임을 당하는 수평아리들, 화학적인 것들을 첨가해야만 하는 공장생산 빵, 올리브유, 설탕, 후추, 커피(공정무역) 과열 생산에 따른 땅의 황폐화, 차 생산지의 인권유린, 농약이나 첨가물과 섞인 사과주와 와인 등 결국 돈 앞에서 무릎 꿇은 우리의 씁쓸한 모습들이 가득하다.

 

우리는 알고 먹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먹거리 지형이 변화해 나갈 수 있도록 계속 점검하고 함께 고민하며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농업을 생략한 문명이란 있을 수 없는데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면서 정말 지켜야 할 것들을 잊어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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