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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과 보물 - 20세기 브랜드에 관한 명상, 증보판
윤준호 지음 / 난다 / 2015년 4월
평점 :
오래전 동네어귀에 가위소리 철걱거리며 '고물 삽니다'라고 외치는 아저씨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떨어진 고무신짝이며 아버지가 비워냈던 소주병에 구멍난 양은남비 등속들이 뽀얀 강냉이로 바꿔지던
시절이 있었다. 고물이 보물단지가 되어 내 손에 쥐어지던 그런 시절말이다.
나이가 들면 눈물샘도 헐거워지는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자주 울컥 거렸다.
돌아가기 싫은 지단했던 시간과 만나는 일들이 이렇게 가슴이 먹먹해질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과거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나 영화에서 오래전 덮개가 달린 TV가 나오고 등뒤에 커다란 밧데리를 짊어진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보이면 가슴속에 아지랑이가 몽골거리며 올라오는 것같이 간지럼이 느껴졌었다.
가난이 지긋지긋해서 다시는 돌아보기 싫었던 시간들이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어 내 앞에 불쑥 서있는 것만 같은 책이다.
표지에는 이제는 사라져버린 포니택시가 어디론가 달려가는 그림이 있고 딱 이글을 쓸수밖에 없을 것같은 저자가 청바지에 모자를 떡허니 쓴 모습이 뒤에 이어져 있다.
길을 가다가 시장하여 찾아든 소박한 식당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기가막힌 맛을 찾은 것처럼 보물같이 다가온 책이다.
지금의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어리버리하던 내 중학교 시절 나를 붙들어주었던 한 손에 잡혔던 그 책들.
'삼중당'이라는 말속에는 막 사춘기에 접어든 어린 여학생의 외로움과 방황이 묻어 있었다. 책은 사보는 것이 아니라 학교도서관에서나 빌려보는 것이라 여겼던 그 시절 간절하게 손에 넣고 싶었던 삼중당의 그 책들. 청계천 헌책방에 가면 혹시 만날 수 있으려나.
''삼중당문고'란 이름에 향수를 갖는 분이라면, 지금 어디서든 그 시절에 읽은 책값의 몇십 배, 아니 몇백 배를 진작 뽑아내며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는 분들일 것입니다.' -본문중에서
가슴이 덜컥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 누군가는 삼중당의 그 소중한 부가가치를 훌륭하게 소화해낸 삶을 살고 있겠지만 나는 어떠한 삶을 살아왔을까. 부끄러워진다.
학교가 파하면 쪼르륵 달려갔던 만화방에서 만났던 주인공들의 이름을 들으니 이리 반가울 수가 없다.
꺼벙이, 독고탁, 땡이...그리고 신문연재속에서 만났던 고바우영감이며 왈순아지매...아 너무도 그리운 이름들이다.
이런 토종만화도 있었지만 그 시절 만화의 대부분은 일본 것을 베낀 것이라는 것도 그 때는 몰랐었다.
내가 기억하는 엄희자나 권영섭이란 만화작가는 실제 존재했을까? 작가님 혹시 이글을 보시면 알려주시길..
책을 읽다보면 마치 나와 합체가 된 것같은 일체감이나 동화감에 휩싸이게 하는 작가가 있다.
'윤준호'라는 이름으로는 그의 나이가 검색되지 않더니 '윤제림'이란 이름으로 나온 그의 정보에서 나는 작가가 나와 한 살 터울의 동시대 사람임을 알아내었다. 어쩐지 나를 이렇게 온전히 아무런 저항없이 과거의 시간으로 끌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그 시간을 나와 함께 했을 것이란 짐작이 맞았다.
성냥공장이 즐비했다던 인천에서 성장한 탓일까. 작가는 유독 인천에 대한 기억이 많은 것 같다.
수인선 협궤열차며 유엔성냥이며 경인선에 어린 추억까지. 그의 첫사랑이 살았다던 당산동을 지나칠 때면 그도 나처럼 아련한 시간속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꼬름한 냄새가 나던 이명래고약을 성냥불로 그을려 녹인 후 종기에 붙였던 기억이며 빨간 이뿐이 비누로 양은냄비를 북북 문질러 광을 내던 기억, 그리고 많이 먹으면 똥이 나오지 않는다고 옷장위에 숨겨두었던 원기소를 동생을 엎드려 놓고 꺼내 내려 실컷 먹다가 며칠 변비로 고생했던 기억까지..이제는 가물가물해진 시간들이 마꾸 되살아났다.
단지 지나간 시간들과 만날 수 있게 해준 60가지의 카테고리를 골라낸 것도 예사롭지 않지만 덧붙인 그의 철학들도 대단하기만 하다. 성냥을 소지한다는 것은 어른이 된다는 상징이란 말, 신만이 가졌던 불씨를 갖는다는 것은 이제 어른이 되었다는 뜻...아 그렇지. 불씨가 열정이 되고 청춘을, 젊음을 불태우다가 언젠가는 사그러지는 그 순환의 법칙들.
하필이면 이 글을 쓰는 오늘은 붉은 글씨로 온 나라가 어린이를 추앙하는 어린이날.
어린이들이 들으면 기겁할 일이지만 일 년 열두달 모든 날이 어린이 날이 되어버린 요즘같은 시대에 어린이 날이야 없앨일은 아니지만 굳이 공휴일까지야...하는 저자의 말에 동감 한표!
그 어린이를 희생과 눈물로 길러낸 어버이날에 붉은 훈장을 씌우고 공휴일로 하자는 그의 말에 또 한표!
원기소라도 먹고 힘을 내야하는 요즘 어머니와 아버지들에게 보내는 그의 응원이겠지만 불쑥 이제 저자나 나나 그 요즘의 어머니나 아버지의 자리에 있고보니 슬며시 어린이를 밀어내고 붉은 공휴일이라도 차지하고픈 흑심으로 비춰질까 걱정스럽긴 하다.
글은 역시 마음으로 써야 제맛이다. 오래된 기억을 잊지 않고 떠올려 종이위에 살려낸 그의 기억력과
맛깔스런 철학들...그런 것들이 섞여 숙성되고 발효되어 지금 내 인생의 술상에 올라앉은 느낌이다.
잘 삭은 홍어회 한 접시에 그의 막걸리같은 이 책을 놓고 저자와 한잔 하고픈 생각이 간절했다.
대나무 소리가 사각거린다는 학교로 찾아가 불쑥 청하고 싶다.
"고물단지가 될뻔했던 시간들을 보물단지로 만들어 주었으니 한 잔 살게요. 시간 되시죠?"
한 오십년 쯤 후에 지금 내곁에 있는 어떤 것들이 보물이 되어 추억될 수 있을까.
스마트한 세상에 미처 골라낼 시간조차 없이 지나쳐버리는 수 많은 고물들중에 보물을 골라내는
안목을 키우지 못하는 아이들이 넘칠까...무조건 어린이를 추앙하는 오늘같은 날 이 책을 덮으면서
문득 쓸쓸함이 밀려왔다. 그래도 삼중당 책 읽고 그럭저럭 고단한 삶을 살아낸 스스로에게 술 한잔 권하는 오늘이 될 것같다. 수고 많았다.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