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삶의 개념이 완전히 변하고, 본질에 대한 삶의 관계도 완전히 변함에따라 비극 또한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삶에서의 의미의 내재성이 천재지변을 만난 듯 하나의 순수한 세계로부터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은, 이러한내재성이 마법에 걸린 듯 우주로부터 서서히 추방당한다는 것과는 약간 다른문제이다. 다시 말해 의미의 내재성을 다시 회복하려는 동경은 채워지지 않은채, 그러나 구제할 수 없을 정도의 절망상태에 빠지는 일도 결코 없이 그대로생생히 남게 되고, 또 사람들은 마냥 뒤얽혀 버린 모든 현상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잃어 버린 의미의 내재성을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은 삶이라는 숲에서 베어온 통나무를 가지고는 어떠한 비극의 무대도 세울 수 없고, 타락한 삶의 죽은 편린들을 모두 불태움으로써 짧은 불꽃과 같은 존재를 소생시키든가 아니면 이와 같은 모든 혼돈에 단호하게등을 돌려, 완전히 순수한 본질성이라는 추상적 영역으로 도피하지 않으면 안된다. 셰익스피어와 알피에리(Vittorio Alfieri, 1749~1803; 18세기 이탈리아의 최대 비극작가 역주)를 양극으로 하고 있는 현대 비극이 필연적으로 양식적 이원성을 갖게 되는 것은 이처럼 본질이 연극외적인 삶에 대해 갖는 관계때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