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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 이야기
마크 트웨인 지음, 차영지 옮김 / 내로라 / 2021년 8월
평점 :
"단숨에 읽고 깊어지자."라는 <내로라>의 모토처럼 이번 『어느 개 이야기』는 아주 짧은 단편이지만 막상 책을 읽고 난 뒤 쉽사리 책을 덮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강아지 에일린 마보닌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에일린 마보닌은 아빠 세인트버나드와 엄마 콜리의 혼종견으로, 엄마는 에일린에게 그녀가 프레스비테리언 종이라고 말해주었다. 의미는 알지 못했지만 뭔가 거창하게 들리는 단어였다.
에일린의 엄마는 다소 경박하고 허영과 허풍이 심한 편으로 자신조차 의미를 모르는 주워들은 거창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단어를 사용할 때면 다른 개들은 놀라움과 부러움의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어차피 그 거창한 단어의 뜻을 아는 개는 아무도 없으니, 간혹 단어의 뜻을 묻는 개가 있어도 엄마가 어떤 식으로 설명하든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어뿐만이 아니라 문장을 이야기할 때도 똑같았다. 주인 가족들에게 주워들은 이야기를 짜깁기해서 맥락 없이 들려주며 혼자 자지러지게 웃어도, 다른 개들은 자신들의 무지함이 드러날까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엄마를 따라 웃고 이해하는 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단점들을 전부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엄마는 멋지고 매력 있었다. 그녀는 친절하고 온화하며 용감하고 훌륭했다. 그녀는 자신조차 제대로 이해 못 하는 거창한 단어나 문장으로 에일린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하는 자신의 삶을 본보기로 보여주며 가르쳤다.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아도 원한을 품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위험이 닥친 순간 용기를 내 최선을 다해 위험에 닥친 이들을 도와주라고 가르쳤다.
그런 엄마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에일린은 얼마 후 다른 집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엄마와의 헤어짐이 슬퍼 우는 동안에도 엄마는 에일린을 위로하며, 세상으로 나가게 된 데에는 큰 뜻이 있을 테니 운명을 받아들이고, 대가를 계산하지 말고 다른 이들을 위해 노력하며 살라고 했다.
그렇게 그레이 부부 집으로 간 에일린은 비록 주인 그레이 씨는 무심하고 냉철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상냥한 그레이 부인과 딸 새디의 귀여움을 받으며 행복하게 지낸다.
시간이 흘러 에일린도 작은 강아지의 엄마가 되었고 영원히 행복한 나날이 계속될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레이 부부의 돌이 지난 아기와 잠을 자고 있던 에일린은 벽난로의 불이 침대에 옮겨붙어 불이 난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화상을 입어가며 아기를 구해낸다. 하지만 에일린이 아기를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을 본 그레이 씨는 에일린이 아기를 위험하게 하는 줄 알고 지팡이를 들어 에일린의 앞다리를 내리치는데….
마크 트웨인은 일찍 아버지를 여읜 고된 삶 속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작가로 성공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내세우진 않았다. 그저 다른 이들이 겪는 부당함과 부조리에 연민하고 공감하며 그들이 누려야 할 권리와 회복에 고심했다.
그것을 위해 그는 그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분야인 문학을 통해 공감을 이끌어내며 세상을 움직였다.
이 이야기는 혹자는 당시 동물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았던 흑인 노예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풍자로 해석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프랑스 과학자 클로드 베르나르와 아내 마리 프랑세즈 마틴의 일화를 반영한 이야기라고도 한다.
나는 이 소설이 마크 트웨인의 작품을 관통하는 풍자와 해학에 초점을 두어 흑인 노예제도를 풍자한 글이라는 것보다, 소설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의 동물실험에 대한 윤리에 관해서만 생각해 보았다.
소설 속 그레이 씨는 클로드 베르나르처럼 아내와 딸이 집을 비운 사이 그들의 은인인 에일린의 강아지로 동물 실험을 한다. 그것은 과연 무엇을 위한 실험이었던 것일까?
인류의 역사를 보면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반인륜적 생체실험도 있었지만 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은 훨씬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흔히 윤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 실험을 최초로 했다는 게 믿기는가?
이후 별다른 비판의식 없이 동물 실험은 계속되었고,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생명 과학과 의학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활발해진 동물 실험에 저항하는 동물 실험 반대 운동이 나타나게 되었다.
역대 과학자들은 인간에게 직접 실험하는 대신 거리낌 없이 동물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고, 그 행위를 인류의 번영을 위한 대의라는 포장지로 곱게 포장했다.
하지만 과거 '탈리도마이드 사건'이라는 일례에서 볼 수 있듯이 동물 실험으로 안전성이 확보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도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동물과 인간과의 생물학적 차이를 간과한 데서 나온 오류이며 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병의 치료 방법이 다양한 경우가 많기에 동물 실험을 인류를 위한 최선책이라고 할 수 없다.
더군다나 동물 실험 자체가 그들의 고통과 죽음이 가치로울 만큼 인간에게 유의미한 경우는 많지 않다. 그것은 이 소설에서 보여지듯 단지 인간의 이기심 충족에서 나온 것이며 단순한 동물 학대에 지나지 않는 행위인 것이다.
『어느 개 이야기』를 통해 단순히 '실험을 당하는 동물이 불쌍하다'가 아닌 동물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고, 다른 어떤 책을 읽었을 때보다 더욱 깊이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마크 트웨인의 "인간을 알게 될수록, 내 개가 좋아진다."라는 말에 진정으로 공감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