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리스트의 파라솔
후지와라 이오리 지음, 민현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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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어느 토요일, 평소처럼 10시가 지나 잠에서 깬 시마무라는 날이 화창한 것을 확인하고는 위스키 병과 플라스틱 컵을 봉투로 감싸 안고 햇볕이 잘 드는 신주쿠의 공원으로 걸어가 술을 마셨다. 부드러운 가을 햇살 속의 토요일 오전 공원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햇볕 속에서 술을 마시며 생각에 잠긴 그에게 대여섯 살 정도의 빨간색 코트를 입고 있는 여자아이가 다가와 말을 걸었고 둘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다. 여자아이의 아빠가 나타나 여자아이와 자리를 떠난 후에는 갈색 머리의 젊은 남자가 그에게 말을 걸며 종교를 포교하려 시도하는 등 평온하기 그지없는 날이었다. 그런 평화롭고 일상적 분위기에서 술을 마신 시마무라는 졸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비명소리와 함께 묵직한 폭발음이 전해졌다.


시마무라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피신하는 사람들과는 반대 방향인 폭발음이 난 쪽으로 달려갔고, 달리면서 부서진 공사현장과 끔찍하게 찢긴 시체, 떨어져 나간 신체의 일부, 살점과 피 등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가 속으로 생각했던 타임 리미트에 가까워져 몸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이 찾고자 했던 것을 찾았다.

빨간색 코트.

여자아이는 정신을 잃고 있었지만 다행히 겉으로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시마무라는 여자애를 구해 마침 주변에서 폭발로 정신줄을 놓고 있던 갈색 머리 포교자를 발견하고 그에게 여자아이를 건네주며 구조를 당부하고는 그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공원으로 몰려드는 경찰들을 보며 불현듯 자신이 위스키 병과 컵을 그대로 공원에 두고 온 것을 떠올렸다. 거기에 남은 지문을 통해 곧 경찰이 자신을 추적해 올 것이다.


오후에 문을 연 가게에 첫 손님으로 흰 정장과 파란 정장을 입은 남자 둘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전형적인 폭력단 조직원처럼 보였다. 그들은 작은 폭력단의 일원들이었고 흰 정장을 입은 사람은 자신을 아사이 시로라고 소개하며, 시마무라에게 폭력단 쪽에서 오늘 오후부터 시마무라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그리고 중앙공원에서 일어난 폭발 사건으로 폭력단 대책반뿐만 아니라 공안도 움직일 거라는 충고를 해준다.

다음날 새벽 1시가 지나 가게 문을 닫으려고 할 때 시마무라에게 갑작스런 공격이 가해졌고, 큰 폭력단의 일원으로 보이는 이들은 시마무라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한 뒤 모든 것을 다 잊으라는 경고를 하고 떠난다.


폭력의 여파로 기절했다가 아침에 깨어난 시마무라는 가게에서 나와 역으로 걸어가 신문을 산 뒤 근처 식당에서 음식을 먹으며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읽고는 가게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가게를 비운 사이 어떤 손님이 멋대로 가게에 들어와 있었다. 키가 시마무라와 비슷한 20대 초반의 여자아이로 그녀는 자신을 한때 시마무라와 동거했던 여자, 엔도 유코의 딸 마쓰시타 도코라고 소개했다. 20여 년 전의 친구이자 동거인의 딸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았지만 시마무라는 태연했다. 그러나 곧이어 유코가 중앙 공원 폭발 사건으로 죽었다는 도코의 말에 시마무라는 충격을 받는다.

폭력단이 알고 있으니 경찰이 아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유코가 현재의 시마무라에 관해 알고 있었고 그것을 딸인 도코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이 시마무라에 관해 알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이제 시간은 없다. 당장 떠나야 했다.


그날 저녁, 도코의 권유로 도코의 집으로 피신한 시마무라는 TV 뉴스를 통해 예전 도쿄대생 시절 대학투쟁을 함께 했던 구와노 마코토 역시 신주쿠 중앙공원 폭발 사건으로 사망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알게 된다. 그리고 시마무라의 신원은 벌써 밝혀졌으며 유력 용의자로 지목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테러리스트의 파라솔』은 일본 미스터리 소설 최초로 '에도가와 란포상'과 '나오키상'을 더블 수상한 역작이다.

그래서 그런가? 정말 재미있다.

나는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20여 년 전에 타 출판사에서 한번 출간된 적이 있고, 이번에 <블루홀식스>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출판된 책이었다. 책을 읽고 이 책을 다시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해야겠다고 결정하고 출판해 준 출판사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허름한 가게의 지저분하고 시시해 보이는 알코올중독자 바텐더가 두뇌회전이 빠르고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이해가 되지 않고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책을 계속 읽어가며 그의 서사를 알게 된 뒤에는 그의 능력이 이해가면서 한편으로는 가슴이 묵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고뇌하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이상과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투쟁하는 모습은 똑같은 것 같다. 물론 일본 대학의 전공투가 이전 일본에서 펼쳐졌던 학생운동이나 우리나라 대학교에서 펼쳐졌던 민주화 운동과는 다른 성격의 학생운동이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부당한 현실을 타파하고자 하는 데 뜻을 모았다.

그러나 젊은 지성인들의 반항은 거대한 권력과 무력 앞에서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그 좌절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겨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러한 재생력을 보며 자신은 닿을 수 없는 상대의 모습에 질투로 잘못된 결정을 하는 사람의 모습이 이 책에 그려지고 있다.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였음에도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느끼는 우정과 의리, 사랑, 동경, 배신, 미움, 증오, 질투 등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들.


만약 시마무라가 태평하거나 둔감한 성격이 아니라 좀 더 주위 사람들의 감정과 반응에 민감했다면 서로 뜻을 나눈 친구들의 삶과 결말이 다른 방향을 향했을까?


일본의 엘리트 대학생이었던 시마무라는 스스로 삼류인생을 선택해서 살았고 이제는 알코올중독자로 죽음만 바라보며 살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폭발 사건이 석연치 않다는 것을 알고 도코가 말했던 것처럼 유코가 왜 그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고자 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시마무라는 아사이나 도코, 그 밖의 등장인물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비밀들을 밝혀내고 사건의 진실에 다가선다. 시마무라는 그렇게 사람들 속에 다시 섞이면서 자신이 살아야 하고 살아가는 이유를 찾았을까.


이 책에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나온다. 표면적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폭력단 조직원도 있고, 노숙자 같은 인생의 낙오자들도 나온다. 시마무라는 그 노숙자들에게서도 도움을 받는다. 이 책에 나오는 노숙자들은 원래부터 낙오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각자의 이유로 지금의 삶의 모습을 한 채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은 원래는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그러한 그들을 보며 예전 한국에서 IMF를 겪으며 꼭대기에서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서울역의 노숙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사연들과 오버랩이 되었다.


이 책은 지나간 역사 속의 묵직한 사회 이슈를 다루어 무거운 듯하면서도, 그 속에서 개인의 서사가 잘 드러나게 하고, 빈틈없이 얽힌 관계들 속에서 이야기를 거침없이 풀어가고 있다.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 전개에 눈을 뗄 수가 없고 뒷이야기가 궁금해 도저히 도중에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푸른 파라솔을 돌리는 테러리스트는 누굴까? 그리고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거침없이 독자를 흡입하는 이 책을 통해서 꼭 확인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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