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만의 살의
미키 아키코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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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7월, Q현 후쿠미시에 있는 명문가 니레 가문 저택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니레 집안사람으로 당시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베테랑 정치인이자 Q현의 제일가는 니레 법무세무사무소의 변호사인 이이치로가 갑자기 죽음으로써 니레 집안의 데릴사위 니레 하루시게는 아무런 준비 없이 하루아침에 니레 가문의 새로운 당주가 되었다. 하루시게는 당시 나이 29세로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를 가진 젊은 엘리트 변호사로 홀어머니만 계시는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변호사 길을 선택한 인재였다. 이이치로는 그런 그를 자신의 첫째 딸 사와코와 결혼시킴으로써 죽은 자신의 외아들 이쿠오가 남긴 유일한 손자 요시오가 다 자라 자신의 후계자가 될 때까지 니레 가문을 이끌어 줄 중간자로서의 역할을 하루시게가 해주길 기대했었다.


사건이 일어난 날은 니레 가문의 선대 당주 니레 이이치로의 오칠일 법요식 날이었다.

이날 니레 하루시게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과 일부 관계자들은 법요식을 치른 후 식당에 모여 다과를 즐겼다. 당시 저택에는 니레 집안의 충성스러운 가정부 스미에 씨를 포함해 총 열 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커피와 보리차, 고구마 맛탕을 즐겼다.

모인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독재자였던 선대 당주의 죽음이 영향을 미칠 자신들의 삶의 변화와 이익에 저마다 다른 기대를 품으며 니레 가문의 운영 방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와코가 구역질을 하며 고통을 호소했다. 증세가 나아지기는커녕 복통까지 호소하자 하루시게는 구급차를 불렀다. 이후 사와코를 돌보는 것은 니레 가문의 며느리 지카코, 니레 가문의 둘째 딸 도코가 맡으며 병원에 동행했고 이이치로의 아내 구와코 역시 몸이 좋지 않다며 가정부 스미에의 도움을 받으며 안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에 식당에는 도코의 남편 요헤이와 니레 법무세무사무소의 파트너 세무사 사쿠라, 이이치로의 보좌관이었던 효도, 죽은 이쿠오의 아들이자 하루시게의 양자인 요시오가 남게 되었고, 하루시게는 구급차를 보내고 식당으로 돌아왔다.


9살의 어린 요시오는 지겨워하며 나가서 놀기를 원했고, 지카코와 사실혼 관계였던 효도가 요시오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식당에는 하루시게, 요헤이, 사쿠라 세 명만 남게 되었고 세 명은 향후 사무소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얼마 후 병원으로부터 사와코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전화가 걸려왔고, 사와코는 그날 밤 사망한다.

사인은 급성 비소 중독. 치사량을 훨씬 뛰어넘은 아비산을 섭취한 것이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사와코가 죽기 전 요시오가 저택의 큰방에서 의식을 잃은 채로 발견되었고 사와코 사망 전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 역시 급성 비소 중독 증상을 보였다. 그리고 요시오의 바지 주머니에서는 구겨진 초콜릿 포장지가 나왔는데 그 초콜릿에 아비산이 묻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경찰들은 병원 의사의 신고로 니레 저택에 들이닥쳤고 경황이 없던 젊은 당주 하루시게는 그들의 강제 수사를 허락했는데, 뜻하지 않게 하루시게의 상복 재킷에서 찢긴 초콜릿 은박지 조각이 발견된다.

하루시게는 용의자가 된 뒤에도 범행을 강하게 부인했는데 사와코의 책장 속 책 사이에서 하루시게의 불륜 현장을 찍은 사진이 나오자 사건 발생 3주 만에 변호사와 자진 출두하여 자신의 범행을 인정한다.


1967년 마지막 재판 후 하루시게는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형이 확정되어 복역하게 되었고, 4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모범수로 가석방을 받아 출소하게 되는데…….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지 말고 의심하고 고민하라.

모든 것이 트릭이고 모든 것이 의도적이고 모든 것이 진실을 풀 열쇠가 된다.

보고 있는 단어, 문장, 문단 아니 소설 자체까지 의심해도 좋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고 책을 덮을 때까지 소설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라.


소설의 주된 내용과 추리는 사건 발생에서 40여 년이 지난 후 니레 하루시게와 니레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 니레 도코가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전개된다.

편지 속에서 니레 하루시게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진실을 밝히고 도코와 함께 범인을 추리해 나간다.

그 서신들 속에서 작가는 작품 안에서 독자들이 상상했을 법한, 사건 현장에 있었던 모든 인물들의 범인 가능성에 대해 하나씩 전부 끄집어 내어 추리를 펼쳐 보이고 그것의 취약점을 간파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궁극에는 실제 범인을 찾아내고 신랄하게 비난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범인이 범행 동기와 기회를 다 갖춘 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시야가 좁아졌고 범인이 될 수 있는 추측 가능한 인물의 범위가 좁아졌다. 그러나 이 고정관념을 넘어서야 비로소 범인과 범인의 의도와 범인의 사악한 범죄 행위에 근접할 수 있다.


인간이 가진 감정 중에 질투처럼 인간성 타락의 밑바닥을 드러내 보이게 하는 부정적이고 원초적인 무시무시한 감정도 없을 것이다. 범인은 끝까지 자신의 행동을 연민과 동정과 사랑으로 포장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거나 반성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주변 모든 사람들의 희생은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자신의 장애물들은 가차 없이 치워버리는 범인의 간교함과 악랄함에 치를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범인을 인내하며 마주하게 된 하루시게는 어떠한 감정이었을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생을 도둑맞은 한 남자의 처절한 생존.

사건의 공소 시효도 이미 끝났고 범인을 알아내 봐야 잃어버린 인생을 되찾을 수도 없다. 제대로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한 그 억울함과 분노는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한단 말인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삶을 버티고 살아내게 한 것은 범인을 향한 분노와 복수였다. 그 오랜 인내의 얼굴 뒤에 숨어 있는 분노와 고통과 회한과 번민.

기나긴 삶을 오직 자신을 어두운 구렁텅이로 빠뜨린 진범을 추리하고 복수를 꿈꾸는데 보낸 한 남자의 불쌍한 인생에 가슴 묵직한 답답함과 안타까움과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모든 것을 파헤치고 진실을 세상에 고해 자신의 명예를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불사 않는 한 남자의 처절함.

결국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인생을 위해 무엇을 바치며 무엇으로 보답받게 될 것인가.

그렇게 보답받아 웃음 짓고 기뻐할 이는 누구일까.

복수를 이루어도 남는 것은 허무함과 허탈감 뿐인 것을.

독자인 내가 기억해 줄 것이다. 배신당하고 번민하고 안타깝게 살다간 인물 니레 하루시게가 있었다고.

가슴 아픈 본격 미스터리 추리 소설 『기만의 살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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