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과 한의 화가 천경자 - 희곡으로 만나는 슬픈 전설의 91페이지
정중헌 지음 / 스타북스 / 2021년 8월
평점 :
품절



작가는 희곡 형식으로 천경자 화백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 분을 회상하고 기리고 있다. 이 책을 읽어 보면 작가는 천경자라는 인물을 미화나 꾸밈없이 그대로 드러내어 화가로서의 천경자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천경자라는 인물에 대해 독자들에게 존경과 공감과 애틋함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읽는 내내 마치 한편의 드라마처럼 천경자 화백의 삶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1924년 늦가을 전라도 고흥에서 태어난 천경자는 외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웠고 어려서부터 그림을 즐겨 그렸다. 그녀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배움으로의 갈증에 목말라 했다. 이에 유학을 준비하나 가세가 기울어 유학을 포기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대신 천경자의 아버지는 그녀의 혼사를 진행했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컸던 그녀는 절규했고, 그 절규와 울부짖음에 결국 항복한 그녀의 부모님은 일본으로의 유학을 허락한다.


학비조차 대기 힘든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학교에 다녔지만 태평양 전쟁이 발발해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천경자는 귀국선 표를 구해준 '이철식'이라는 대학생과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그가 인연이라 생각하며 내키지 않는 마음에도 그를 사랑하려 노력하며 결혼한다.

그러나 동경에서의 공습을 겪은 이철식은 무언가 돌변해 있었다. 해방이 되어 모두들 생기있게 일을 하는데도 이철식은 화를 잘 내고 무능하기만 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에 두 사람은 결국 갈라서고 만다.

두 사람은 이혼을 하지만 이철식이 서류정리를 해주지 않아 후일에야 법 절차를 밟아 이혼이 마무리 되었고, 그 후 아들 후다닷이 호주가 되어 천경자는 아들 호적으로 들어갔다고 하니 서류상 결혼 상태가 얼마나 더 지속되었는지는 모른다.


6·25 전쟁이 나던 무렵 전남여고 강당에서 천경자가 개인전을 열었을 때 지방 신문 기자인 김상호를 만나게 된다. 천경자는 뒷풀이에서 그에게 끌려 만나게 되고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아이는 6개월 만에 해산하게 되지만 상호와의 만남은 드문드문 이어졌고, 어느 날 천경자의 집으로 상호의 후처가 찾아오고 천경자는 창피해서 숨어 버렸다고 한다. 상호는 광주 자신의 집과 천경자의 집을 오가며 생활했고, 천경자와의 사이에서 미도파라는 딸을 낳게 된다. 그러나 광주의 후처가 득남하자 발길을 끊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어느날 상호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고 둘은 다시 같이 살게 되지만 여전히 상호는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두 집 살림을 했다. 둘 사이에 아들도 생기고… 이런 생활은 20여년간 계속 되었으나, 결국 훗날 천경자는 둘 사이의 애정이 식었을 때 두 사람을 이어 주는 법적 장치도 없고 그에게는 부인이 있으니 그대로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



천경자 화백은 1969년에 남태평양 타히티의 스케치 여행을 시작으로 1974년 <조선일보>에 컬러로 그림과 글을 연재하는 6개월간의 여정으로 여자의 몸으로 혼자 아프리카로 뛰어들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79년 2월에는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5개월간 인도와 중남미로의 스케치 여행을 떠난다.

다시 1983년 미국 현대 예술가들의 산실을 찾는 예술 기행을 나섰고 1994년 멕시코 여행을 끝으로 스케치 여행의 끝을 맺는다.


이처럼 스케치 여행에 열정을 쏟으며 예술혼을 불태운 이유는 살아 움직이는 현장감에 승부하겠다는 천경자 화백만의 집념에 의한 것이었다. 현장의 진실을 화폭에 담기 위해 사막과 정글, 베트남 전쟁터까지 여성의 몸으로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런 세계 일주 스케치 여행으로 담아낸 작품에는 현장의 진실에 더해 사진이나 영상이 담아낼 수 없는 감정과 따뜻한 손길이 묻어나 있었다. 이런 현장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색깔을 덧입혀 재탄생한 채색화는 모두에게 감동과 매력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바로 천경자 화백만의 개성인 것이다.


그러나 1991년 어느 제자로부터 천경자 화백의 그림이 아닌 것이 천경자의 그림이라는 이름을 달고 전시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의를 제기하지만 감정위원회는 '심사 유보'라는 결정을 내린다.

최종적으로 국가 기관은 천경자 화백이 '가짜'라고 이의 제기한 <미인도>를 '진품'이라고 판정 내렸다.

​이에 천경자 화백은 자신의 기억력을 의심하여 가짜 그림을 진품으로 몰아가는 화단의 풍토에 작가로서 환멸을 느끼고 붓을 꺾겠다는 심경을 밝혔고 한국을 떠나 타국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한국 화단에 깊은 실망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천경자 화백은 자신의 일생에 걸쳐 예술혼을 불태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들을 서울시에 저작권을 양도한다는 증서와 함께 기증했다.

실망감을 느꼈을 한국 미술계에 자신의 모든것인 작품을 기증하다니 정말 대인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자나 명예를 원했던 적이 없었다던 천경자 화백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자신의 꿈이고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동시에 결코 순조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럴때면 잠시 멈추고 사색을 하며 글로써 자신을 풀어냈다고 한다. 화가로서의 천경자가 아닌 넓은 독자층을 가진 작가 천경자라는 인물에 대해 거듭 놀라며 어쩔 수 없는 타고난 예술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그녀를 한의 작가, 고독한 작가라고 하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인생을 축제처럼 역동적이고 화려하고 활기차게 살다간 화가였다.

당시에는 여성들의 사회진출이나 활동에 남성보다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감히 그 벽을 무너뜨리고 주변 시선에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삶을 자신있게 누렸던 천경자 화백을 보며 같은 여자들이 더 부러워하고 좋아했다고 평가받는 것은 천경자 화백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조금이나마 예술가 천경자의 진실된 모습을 알 수 있었고, 그녀의 삶과 그녀의 작품을 연결해 좀 더 깊고 통찰력있게 작품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아 가슴 벅찼다.





*리딩투데이 지원도서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