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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평점 :
오랜만에 참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친밀한 것 같은 주인공을 만났다. 1965년. 자신의 젊은 날을 회고하는 듯 쓰여진 소설 '아일린'은 카드리뷰를 읽고 호기심이 생겨 읽어보게 된 책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고 해방되고 싶었으며, 마침내 총을 쥐고 아버지를 살인범으로 몰고 탈출하는 이야기라니 궁금했다. 주인공인 아일린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나 결말에 관해서.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은 앞부분과 뒷부분을 조금씩 제외하면 일주일. 고작 일주일을 가지고 이야기하면서도 한 사람의 삶을 대부분 알아보기에 문제가 없었다. 그만큼 주인공인 아일린에 대한 묘사는 세심했고, 행동 또한 엄청나게 특징적이었다. 비록 그 모습이 완전한 호감형은 아니었지만.. 그래서인지 아일린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회상하는 부분과, 그녀의 이상한 정신세계에 쉽게 적응하기 힘들었다. 초반에 진행되는 부분은 솔직히 지루했고, 읽기에도 힘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아일린은 조금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뜩 비틀린 인물이었으니까.
아일린은 성적인 상상을 하며 자신을 위안하고, 자기비하게 깊이 절어 자신을 모든 쓸모없는 사물에 빗대고 있었으며 폭력적인 묘사도 서슴치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강하게 거부감이 들었던 건 성적인 묘사나 상상이었는데, 정말 원초적인 본능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아 낯설면서도 내 얼굴이 다 화끈거렸고 이상하기까지 했다. 종종 소설을 읽으며 비슷한 느낌을 받은 몇몇의 소설이 있기는 했었지만, 이 소설은 아일린의 어휘가 심상지 않아서 더했던 것 같다. 빈도도 굉장히 놓았고. 초반부에 무슨 내용의 책을 읽는지 물었다면, 읽는 사람이 정신병 걸릴 것 같은 책을 읽고 있다고 거침없이 대답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쨌든 아일린의 가정은 그녀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불명예 퇴직을 한 아일린의 아버지는 환각을 보고 홤청을 듣는 굉장한 알콩중독자에, 어머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없었으며, 자매인 조우니는 집을 떠나고 아버지에게 관심이 전혀 없다. 결국 아일린에게 떠맡겨진 아버지는 웃기게도 아일린의 자존감을 죄다 갉아먹고 비하를 일삼으며 술만을 찾는다. 그런 아버지에게서, 나아가서는 자신이 소속된 X빌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아일린을 어떻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평안하지 못한 가족들 사이에서 비틀어져버린 아일린은 드러내지 못하는 조용한 분노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에 대한 위안으로 온갖 상상과 그 바탕이 되는 주변인들을 관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일린은 유일한 출구는 상상. 펼쳐낸 상상속에서 아일린은 멋진 연애를 하고, 아버지를 벗어나며, 미래는 나을거라고 위안한다. 그녀의 나이는 스물 넷이었지만 인생을 다 산것처럼 피곤하고 지쳐보였다.
아일린이 과거를 회상하는 건 1964년. 그녀가 겪은 일은 모두 먼 과거에 있었던 일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금도 소설 속 아일린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 놓인 사람들은 여전히 많고 내재된 생각이야 어떻든 그럭저럭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었다.
내성적이면서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고, 동경하는 사람을 만들고. 낯설지 않은 성격이다. 오히려 아일린에게서 공통점이 발견될 때마다 놀랍기까지 했다. 아일린은 좀 극단적인 상상을 하긴 하지만.. 폭력에 자연스럽게 노출되어 자신이 비정상이라 생각하면서도, 아일린은 일련의 행위(극단적인 상상 같은)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덕분에 아일린에게서 나 자신을 온전히 분리해서 읽어야 하는데 쉽지가 않았다. 벗어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상황이 비슷하기도 했고. 총이라는 단어를 먼저 보고 시작해서인지 아일린이 자신의 내면을 터뜨릴 곳을 찾고 있었을까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그녀는 나를 보며 눈썹을 올렸다. 정말이지 눈에 띄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돌려야 할 정도로. 나는 절박할 정도로 잘 보이고 싶었다. 그녀도나와 같이 느끼고 있다는-우리가 콩깍지 속의 콩 두 알처럼 닮았다는- 명백한 반응을 끌어낼 수 있기를 바랐다. - 143p
그러던 어느날, 아일린의 앞에 리베카라는 여성이 나타난다. 하버드대라는 학력에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사람. 아일린은 그녀를 보고 대화를 나눈 순간 아일린은 리베카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감정을 품는다. 남몰래 흠모하여 상상하던 남자를 깡그리 잊어버릴 만큼 강렬하게.
아일린의 속 생각이야 어떻든, 계속 참고 또 참으며 착한 딸의 범주조금 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안에 나타난 리베카는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 때부터 아일린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아일린이 보기에 리베카는 모든 면에서 완벽해보였다. 아일린은 그녀의 사소한 부분도 동경하며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그레서 나만을 바라봐주는 친구를 원했고 아일린은 그런 그녀에게 적당한 미끼를 투척하며 그녀를 붙여놓았다.
그리고 문제의 12월 24일. 아일린의 세상이 뒤집힌다. 생각해보면 그날은 아일린이 아빠의 모습을 투영해냄과 동시에 리베카의 숨겨진 모습을 보고 자신의 신념대로 심판까지 내리는 날이기도 했다. 잔뜩 동경했던 리베카지만, 리베카의 말에 처음의 아일린은 보수적인 입장을 공수한다. 그렇게 살아야 했으니까, 아일린에게는 그것이 당연했다. 그쯤의 아일린의 태도를 보며 나는 그녀가 머리로는 무슨 생각을 하든 범죄의 범주에 들어가는 짓은 대놓고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비슷한 의문을 품고 몇 년 동안이나 마음속으로 논쟁을 벌여왔다. "죽이는 게," 나는 대답했다.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어야겠죠."' - 310p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아일린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늘 논쟁을 벌여왔던 문제에 종지부를 찍는다. 리베카는 아일린의 끝을 보지 못했디만 그게 뭐 어떤가, 아일린은 그런 것쯤은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움직여 자신을 틀에맞춰 생각했던 마을과 폭력적인 아버지를 떠난다. 나에겐 그 모습이 시원스럽기도, 유쾌하게도 느껴졌다.
탈출하는게 유쾌하고 시원스럽게 느껴지는 건 드디어 아일린이 제대로 된 욕망 표출을 해서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탈출 전에 아빠를 흉내내며 말하는 부분도 굉장히 인상깊었다. 소름끼칠 정도로 아빠를 흉내내는 아일린을 보며,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범해진 폭력에 물들지 않고 잘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어찌되었든 아일린의 가정환경은 그녀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수많은 일들에 치이면서도 자신만의 표출구를 찾았었으니 말이다.
끝부분을 보고 난 뒤에 재밌게 읽었다는 감상이 들긴 하지만 사건진도는 느린편이다. 카드리뷰를 보고 초반부터 스펙터클인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그것이 전체 줄거리였다. 종종 현재 시점에 섞여드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과거엔 그랬다라는 어투가 덤덤하게 얘기하는 것같아 더 안타깝고, 모두 떨쳐낼때까지 어땟을까 더 궁금해지게 만들기도 했다. 분명 호흡이 긴 책이었지만 미래에는 이렇다 하는 그 짧은 문장과 과거에는 그랬다 하는 문장들 때문에 숨이 조금 덜 막혔다.
초반부의 아일린은 분명 이상한 이미지였지만, 다 읽고난 지금은 아일린이 마치 친구처럼 느껴진다. 자기혐오가 가득하고 비틀린 아일린. 조금 극단적인 예이긴 했고, 비호감인 주인공임에도 계속 지켜볼 수 있는 이유는 아일린 속에서 비슷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이름마저 바꾸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 그 욕망을 리베타를 통해 잠깐 맛보고 영원히 실현한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그녀가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어떻게 살아가든 거짓으로 살아가든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든 적어도 아빠와 살때보단 자유롭고 솔직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가 끝난 후 내 앞에 나타난 게 천국으로 직진하는 길이 아니었음을 당신도 알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헛디딤과 뒤틀림이 적절히 예비된 옳은 길로 들어섰다고 믿는다.' - 357p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