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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야기
미아키 스가루 지음, 이기웅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만나기 전부터 계속되어왔고, 시작되기도 전에 끝나버린 사랑 이야기'
띠지의 묘한 문구 때문에 궁금해졌던 게 사실이다. SF물에 로맨스라니 혹시 안드로이드에 관련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도 했었다. 전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섣불리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색다른 이야기였다.
주인공인 아마가이 치히로에겐 허구를 사랑했던 부모님이 있었다. 현실에서 느끼는 공백을 메우고자 가상의 아내, 가상의 자식에 대한 기억이나 가상의 멋진 추억거리를 담은 의억(義憶)을 사는 부모님. 하지만 어린 주인공에게는 가상의 기억을 주입시키지 않았다. 그것이 주인공 부모의 교육방침이었다. 하지만 가상의 기억인 '의억'만을 좇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주인공은 사랑하는 방법도, 사랑받는 방법도 모른 채 자랐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엄마의 기억에서 통째로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자 '의억'에 증오를 품게 된 치히로는 생각한다. 의억으로 자신의 추억을 채우기보다 모든 것을 없애버리자고. 그렇게 채워지지 않는 것을 채우기보다 채울 수 있는 그릇을 통째로 날려버리겠다는 발상으로 주문하게 된 기억을 지우는 약 '레테'.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주인공에게 온 나노로봇은 레테가 아닌 '그린그린'이었다. 가공의 청춘 시절을 제공한다는 나노로봇 '그린그린'. 결국 카운슬러의 실수로 치히로에겐 원하지 않았던 추억이 강제로 생겨버린 셈이다.
'그린그린'의 영향으로 경멸해 마지 않았던 허구의 추억이 생긴 치히로에겐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소꿉친구가 생겨났다. 나쓰나기 도카라는 소꿉친구는 가족이자 연인의 포지션으로 암울했던 과거에 찬란한 빛을 불어넣어 주었다. 치히로의 계획과는 상관없이 생겨난 가장 이상적인 소꿉친구. 치히로는 조작된 기억이라는 걸 알면서도 '의억' 속 나쓰나기 도카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한 순간, 거짓말처럼 도카가 치히로의 앞에 나타났다. 치히로라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도카가.
도입부를 읽으며 과연 현실을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런 부분에서 공감할 수 있었고.. 아마 소설 속 세계에서 산다면 나도 엇비슷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알츠하이머의 치료법을 연구하다 인공기억에 대한 기술력이 한없이 높아졌다는 세계관부터 그럴듯하며 왠지 희망적으로 들리지 않나. 어쨌든 인공기억인 '의억'이 넘쳐나는 시대에 의억을 증오하는 주인공은 조금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인공 기억을 맹신하고 멋대로 기억을 조작하는 부모님을 보며 치히로는 자신의 소년 시절 기억을 무로 돌리고자 한다. 아무것도 없이 모두 떨쳐버리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 느낌을 원했을 것이다. 종종 나도 수많은 정보나 선택의 기로 앞에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예 아무것도 모른다면 더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하지만 치히로에게 배달된 것은 기억을 지우는 레테가 아니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줄 가상의 기억이었고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기억이 타인이 만든 가공의 이야기라니, 너무하지 않은가. - 너의 이야기 20p
의억의 존재를 증오하던 치히로에겐 처음으로 주입받은 의억이었다. 소꿉친구라는 도카는 치히로의 원래 기억 속 틈틈이 덧입혀져 사소한 설정까지 완벽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부분에서 작가의 잔잔한듯 세밀한 묘사가 놀라웠다. 주입받은 의억이 원래 기억보다 잘 잊히지 않는다는 설정이 있긴 했지만 정말로 추억을 그려낸 듯 아름답게 나타내고 있어서 순간 이 소설이 그냥 평범한 로맨스가 아니었나 착각할 정도였다.
어쨌든 사소한 것까지 탄탄한 기억은 치히로의 머릿속을 촘촘하게 파고들었지만, 분명 도카는 없는 사람이다. 의억의 모델을 실재하는 사람으로 삼는 건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필사적으로 부정하던 것을 한번에 덮어버리듯 치히로는 완벽한 도카의 모습을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이후로 치히로의 감정은 부정과 기쁨의 연속이었다. 완벽한 의억 속의 도카가 수상하기 짝이없는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났지만, 치히로가 도카의 '의억'을 지워버리지 않는 이상 도카를 거부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를 믿고 싶지 않은 마음과 믿고 싶은 마음. 정말로 도카와 함께 한 기억이 실제 과거였나 증거와 사례를 찾아가는 사이에도 믿고 싶은 쪽으로 마음의 추가 기울었다. 하지만 20살의 여름, 거짓말처럼 찾아온 그녀가 20일을 함께 보내고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후, 중후반부에 배치된 반전격의 이야기는 작가의 전작들을 읽으면서 준비했음에도 머리가 멍한 느낌이었다. (솔직히 도카의 정체가 귀신이나 망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는데 모두 틀렸다.)
미아키 스가루의 전작을 읽으며 받았던 느낌이 좋아서, 망설임없이 도전했던 소설인데 이번에도 너무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만약 내게도 의억이 심어진다면 어떨까하는 상상도 재밌었고, 주인공이 과연 도카의 기억을 지울 것인가 남길 것인가하는 결말을 추측해보느라 더 빠르게 소설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청춘로맨스물 같이 풋풋한 감성이 여기저기에서 묻어났고, 촘촘하게 맞춰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보는 동안 청량한 여름같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다. 스포일러라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결말 또한 나름 좋았다. 치히로에게 도카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왔던 것처럼, 내게도 이 소설이 색다르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