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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0 이판사판
하야시 마리코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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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코모리란 ‘히쿠(뒤로 물러나다)’와 '코모루(안에 틀어박히다)'가 합쳐진 말입니다. 1990년대 후반, 기존의 정신질환 진단명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장기 은둔’ 사례가 급증하자 정신과 의사인 사이토 다마키가 이를 사회적 현상으로 정의하고자 출간한 『사회적 히키코모리』에서 처음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일본 가시와자키에서 일어난 사건을 계기로 널리 퍼지게 되었지요. 28세 남성 사토가 초등 4학년 소녀를 납치해 10년간 자기 방에 가뒀는데, 사토와 같은 집에 살던 부모는 아들이 무서워 아들 방에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소녀의 존재를 몰랐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들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부모의 신고로 그의 방을 수색하던 중 소녀를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2019년에는 전 농림수산성 차관이 자택에서 장남을 찔러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숨진 아들은 장기간 직업 없이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히키코모리(44세)였으며 부모에게 상습적인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사건 당일, 인근 초등학교 운동회 소음이 시끄럽다며 “아이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화를 내자, 아버지는 주위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아들을 칼로 찔러 살해”하는 선택을 한 뒤에 자수했지요.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는데, 작가 하야시 마리코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찔러 죽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가정 안에서 노골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던 히키코모리 자녀가 사회에까지 피해를 준다면 아직 부모로서의 사랑이 남아 있을 때 함께 죽자, 누군가를 죽이는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 부모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마음이었을까. 나도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편집자와 나누다가 “8050문제를 소설로 써보면 어떨까요?”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냐면 한때 ‘젊은이들의 문제’로만 여겨졌던 히키코모리의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모든 세대의 문제가 되었고 이것이 8050문제로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히키코모리 가정의 분위기가 압도적인 현실감으로 그려집니다. 이 가정의 구성원은 치과의사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대기업에 다니는 딸과 방 안에 틀어박혀 사는 아들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히키코모리를 주제로 한 소설은 결말을 내기가 정말 어려운데, 히키코모리 아들을 외면해 온 아버지가 7년 만에 결심을 굳히고 ‘죽이거나 함께 죽는 것’이 아니라 ‘재판’이라는 수단으로 함께 ‘복수’를 이룬다는 결말은 통쾌한 구석이 있습니다.



소설 『8050』은 발매 1달 만에 10만 부를 돌파하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지금은 어떻게든 가족으로 관계를 간신히 유지하는 중이지만 ‘어쩌면 나도 이런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큰 반향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일본의 히키코모리는 140만 명. 한국의 은둔형 외톨이는 50만 명에 달한다더군요. 제 동생도 그중 한 명입니다. 그래서 소설의 검토를 마치자마자 한국어판을 출간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저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닫힌 방문 너머에서 멈춰버린 자식의 시간, 그 시간을 함께 견디며 늙어가는 부모의 절박한 사투를 그린 이 소설을 한국의 형제자매님들도 함께 읽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랫동안 만들고 싶었던 사회파 소설을 출간하여 기쁜,

삼송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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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세븐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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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식사 구성에 불만을 표현한 입원환자를 직원이 금속파이프로 구타하고, 병문안을 온 지인에게 병원의 현실을 알리려 했던 환자를 폭행하는 바람에 급사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병원은 사건 이전부터 병상보다 많은 환자를 입원시켰고, 치료라는 명목으로 원장 가족의 기업에서 환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했으며, 사망한 환자를 불법으로 해부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애당초 해당 병원의 원장은 내과 의사로서 정신과 의사 경력이 없었지만, 정신과가 다른 진료과에 비해 인건비가 적게 들어 이익률이 좋은 사업이라는 점에 착안, 내과에서 정신과로 변경하여 무자격으로 환자를 진료해 왔습니다. 환자를 구타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상근의는 원장을 포함하여 3명뿐.

 


전화 통화와 면회를 제한함으로써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던 병원 내의 각종 사건들이 세상에 드러난 건 ‘아사히 신문’의 보도 덕분이었습니다. 일본 도치기 현 우쓰노미야 시의 ‘우쓰노미야 병원’에서 발생한 정신과 환자 린치 치사 및 무자격 진료 사건은 일본 의료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권 침해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레벨 7’이라는 제목 때문에 게임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라 짐작하기 쉽지만 『레벨 7』은 위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사회파 미스터리입니다. 그것도 선악의 구도가 분명한 작품이지요. 미야베 미유키 작가는 현대물에서든 시대물에서든 등장인물을 선악으로 구별하는 것을 피해 왔다고 할까, 명백하게 나쁜 놈을 작품 속에 등장시키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한데 『레벨 7』의 세계관은 왜 달랐을까요. 이 작품을 집필할 당시 일본에서 출간된 미스터리들 가운데 ‘불행한 성장 과정이 범행의 원인이었다’라는 식으로 범인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작품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유도 모른 채 미움받는 놈이 되는 인간도 있다잔뜩 있다마치 제비뽑기에서 꽝을 뽑는 사람 쪽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처럼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모두 바보 취급당했으니까라면서 살인을 저지를까말도 안 된다결국은 전부 변명이다.”




『레벨 7』은 전화 상담원 신교지가 “레벨 7까지 가 본다, 돌아올 수 없을까”라는 말을 남긴 채 실종된 고교생 미사오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말에서 ‘레벨 7’은 ‘망각’을 의미하는 키워드이며, 미사오가 왜 굳이 ‘레벨 7까지 가보려 했는지’를 추적하는 신교지는 미야베 미유키 소설 특유의 허술한 탐정(스기무라 사부로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지요.



하드보일드 소설에서는 거액의 돈과 함께 사라진 인물을 추적하는 탐정이 직접 발로 뛰며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도시 뒤편의 부패한 권력과 도덕적 타락을 목격하지만 사회의 근본적인 부패는 해결되지 않은 채 주인공이 씁쓸함을 느끼며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죠. 『레벨 7』에서 신교지의 행동 패턴은 하드보일드 소설의 주인공이 선택하는 전형적인 형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레벨 7』을 리뉴얼해서 재출간하자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이 소설은 출간 당시 게임을 기반으로 한 소설로 인식되어 판매가 부진했습니다. 제목 때문이겠지요. 한데 곧 한국어판 계약이 만료되거든요.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절판시키든지, 아니면 비용을 지불하고 재계약을 하든지. 원래는 절판시킬 작정이었어요. 그리하여 절판을 앞두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읽어보았습니다. 시작부터 긴장감이 감돌아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멈출 수 없더군요. 과장이 아닙니다. 마치 기억을 잃은 소설 속 주인공처럼, 과거에 제 손으로 만들었던 이 작품의 줄거리가 전혀 기억나지 않아서 신작을 읽는 기분으로 라스트 신까지 단숨에 도달했습니다.



걸작이란 이런 것이구나. 시간이 지나도 전혀 색이 바래거나 퇴색하지 않는구나. 읽기를 마친 후에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아직 미야베 미유키를 읽지 않은 분들이 꼭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절판 대신 재계약을 택했습니다. 기존에 상하권이었던 판본은 합본으로 바꾸며 판형을 다시 짜고 문장도 손을 보았습니다. 게임적 느낌이 조금이나마 지워지도록 제목은 『레벨 7』 을 『레벨 세븐』으로 바꿨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내내 얼마나 즐겁던지. 봄이 도래하여 옷장에 처박혀 있던 봄옷을 꺼내 입었는데 안주머니에서 잊어버리고 있던 비상금을 발견한 기분이라고 할까. 이 비상금이 유용하게 쓰일지 허투루 쓰일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를.



꽃 피는 봄을 맞이하며,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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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의 대여 서점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 2
다카세 노이치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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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고 빽 없고 재능 없고 부모도 없이 유곽에서 외롭게 자란 츠타야 주자부로가 어떻게 에도 출판계를 주름잡으며 미디어의 왕이 되었는지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린 드라마 <베라보>. 작년 NHK에서 방영하여 큰 화제가 되었지요.

 

츠타야는 무명의 호쿠사이, 산토 교덴, 교쿠테이 바킨을 발굴하고, 일본사 최대의 수수께끼 중 하나인 '도슈사이 샤라쿠'를 세상에 알린 천재 기획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의 유명 서점 츠타야는 바로 선구적 출판업자였던 츠타야 주자부로의 이름을 빌려서 만든 플랫폼입니다.

 

츠타야 주자부로는 1773년 요시와라 유곽에 서점(세책점)을 내고 책 대여를 시작하지요. 세책점이란, 요금을 받고 원하는 사람들에게 책을 빌려주는 장사를 말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책 대여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책이 비싸서 쉽게 구입하기 힘들었던 에도 시대에는 대여료를 받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많았습니다. 츠타야 주자부로도 살짝 등장하는 <센의 대여서점>은 세책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각종 출판 미스터리를 주인공 센이 해결해 가는 비블리오 소설입니다.

 

다카세 노이치 작가는 센의 이야기를 쓰기 전까지 시대소설을 한 번도 써보지 않았다더군요. 그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출산이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정규직으로 일할 엄두는 나지 않아서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시작했는데 2시간짜리 알바 자리도 구할 수가 없었어요. 이유를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전부 아이가 있어서 곤란하네요였다고…….

 

화가 나서 되갚아주고 싶은 마음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무너진 자존감과 생계의 위협 속에서 인간 사냥에 나서는, 영화로 치면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 같은 분위기의 현대물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둡고 재미없는 소설을 4년쯤 썼더니 화가 줄어들었다네요.

 

그때부터 소설을 쓰는 일이 즐거워져서 문학상에 도전해보기로 했답니다. 목표는 올 요미모노 신인상. 가장 빠르고 확실한 데뷔코스지요. 올 요미모노 신인상은 문예춘추(나오키 상과 아쿠타가와 상도 문예춘추가 만든 문학상)가 발행하는 월간지 올 요미모노에서 주관하는 신인 작가상입니다.

 

유명 작가들을 다수 배출한 바 있지요. 미야베 미유키 작가도 세 번의 도전 끝에 올 요미모노 신인상을 받으며 데뷔했습니다. 다카노 씨의 경우는 네 번 낙방했는데 그때까지 쓰던 연애 소설을 접고 과감하게 시대소설로 항적을 전환하여 마침내 다섯 번째 투고 때 상을 받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제100회를 맞은 문학상의 수상자가 되었으니 여러 차례 낙방한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한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가의 심사평이 재미있습니다.

 

"딱 떨어지는 제100회를 맞아다음 회부터 응모 요강이 바뀌는 올 요미모노 신인상수상작은 경사스럽게도 만장일치로 결정됐다소설의 주인공은 혼자서 대여서점을 운영하는 <>. 책을 매우 좋아하고지기 싫어하는 성격에열심히 일하는 처자다고객의 희망에 부응하려고 애쓰다 보니 막부가 금지한 책도 자기 손으로 완성하고 싶어 한다읽으면서 응원하고 싶어지는 주인공(특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이다."


 

이야기의 세계를 사랑하는 독자들을 위한 시대+미스터리+비블리오 소설이에요. 간세이 개혁으로 언론과 출판을 통제하던 시기, 사람들에게 지식과 오락을 전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동분서주하는 센의 활약을 눈여겨봐 주시길.

 

)

<센의 대여 서점>을 쓴 작가의 인터뷰 중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엄마가 소설을 써서 큰 상을 받고 뉴스에 등장했지만 집 안에서는 누구 하나 아는 척도 하지 않은 모양이에요. 한데 이후로 눈물 사탕(なみだあめ)이 나왔을 때는 상황이 좀 달라졌답니다. 눈물 사탕은 여러 작가들이 함께 집필한 앤솔러지인데 그들 중 한 명이 미야베 미유키 작가였거든요. “지금까지 내가 소설을 썼다고 해도 가족 중 누구 하나 관심이 없었는데, 앤솔러지에 미야베 미유키 씨와 함께 실리자, ‘잠깐, 엄마, 미야베 미유키랑 같은 책에 이름이 실렸어? 대박!’이라며 놀라더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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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참배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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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본 일본 관객의 감상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볼 때는 유바바가 “지독하게 나쁜 마녀”라고 생각했는데, 직장인이 된 지금 다시 보니 “일할 의욕만 있으면 누구에게든 일자리를 주고 신입도 공을 세우면 확실히 칭찬해 줄 뿐만 아니라 진상 고객이 나타나면 상사로서 직접 나서서 물리치는, 경영자적 측면에서 대단히 훌륭한 마녀구나, 생각하게 되었다(끄덕끄덕)”고 적혀 있더군요.


이제 막 취업을 하고 직장에 다니는 듯한 일본 관객의 이 센스 있는 감상은 <고양이의 참배>에 등장하는 ‘미다이 님’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번 작품은 싸우는 소녀와, 선악으로 환원할 수 없는 요괴가 여럿 등장한다는 점에서 얼핏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거든요.


<고양이의 참배>에서 작가는 서로 공명하는 존재로서의 ‘여성=고양이’를 등장시켜 그들이 겪는 괴로움이나 슬픔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고양이 마르코 군(8세)과 함께 살고 있는데, 자신이 독감으로 심하게 앓아 누웠을 때 간호하듯 옆에 착 붙어서 떠나질 않는 마르코를 보며 “주인에게 닥치는 부정적 요소를 잠재우는 것이 반려동물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하다가 학대당하는 주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고양이가 요괴로 변해 기막힌 방법으로 복수하는 줄거리를 떠올렸다더군요.


오분이 거대한 ‘강아지풀(일본에서는 고양이 앞에서 흔들면 재롱을 부린다는 뜻의 ‘네코자라시’라고 부릅니다)’에 숨겨진 고양이 신의 궁으로 참배하러 가는 장면은 전편을 통틀어 가장 큰 볼거리입니다. 참배가 끝나자 고양이는 오분을 위해 행동에 나서는 동시에 그 업을 짊어지게 되는데, 작가는 “저 역시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이 대목을 쓰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네요.


<고양이의 참배>에 등장하는 요괴들은 (사람이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헤치는 무서운 존재가 되기도 했다가 동시에 신비한 힘을 가진 자애로운 신의 모습으로도 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양면성을 맨 처음 발견한 건, 아이들이라는 점이 흥미롭지요. 이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 바 있습니다.


“왜냐면 아이들은 ‘요괴=두려워해야 하는 존재’라는 선입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어린 미기와는 갓파인 산페이타가 마을을 수호하고 물을 다스리는 터주님으로서 신성시해야 하는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물을 자유자재로 변형시키며 물이 있는 곳이라면 (연못이든 작은 물통이든) 손쉽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을 재미있어합니다.


반면 같은 마을의 처자인 어른 사에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고 갓파 산페이타를 어려워하지요. 큰 화재를 피해 산속의 관(저택)으로 피신해 온 마쓰에와 하쓰요 모녀는 수호신이자 산개(들개)인 야마모모와 함께 생활하는데, 야마모모를 경외하는 엄마 마쓰에와 달리 딸 하쓰요는 말과 행동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계와 현실을 잇는 무녀의 역할을 맡은) 아이가 상대해 주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요괴의 진실한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작품은, 우연히 맞닥뜨린 이계에서 양면성을 가진 요괴와 공명한 소녀가 요괴의 도움을 받아 '고통스러운 세계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복수'를 완성하는 이야기, 라고 해석할 수 있을 듯합니다. 자식을 애도하지 않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원망하는 며느리, 비열한 악당에게 습격당하는 마을 처자, 희대의 악녀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모녀의 복수극. 저는 그렇게 읽었는데 어떨지. 아울러 800페이지 분량의 한 권을 통틀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양한 요괴가 등장하는 역대급 요괴물이라고 할까. 이런 점들을 눈여겨봐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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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깃든 산 이야기 이판사판
아사다 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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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고로 씨. 아무도 없는 사이에 살짝 편지 쓰고 있습니다. 서투른 글씨 미안합니다. 나는 죽습니다. 이렇게 죽는 여자들 많이 봤으니까 나는 압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 갚으면 고로 씨하고 만날 수 있을까. 고로 씨와 함께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안 됩니다.


고로 씨 항상 벙실벙실 웃고 있습니다. 일하면서 고로 씨 잊지 않습니다. 진짜입니다. 내가 죽으면 고로 씨 만나러 와줍니까. 고로 씨 덕분에 일 많이 했습니다. 고향 집에 돈 많이 부쳤습니다. 죽는 것 무섭지만 아프지만 괴롭지만 참습니다. 바닷소리 들립니다. 비 옵니다. 아주 캄캄합니다. 서투른 글씨 미안합니다. 고로 씨가 정말 좋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누구보다 고로 씨가 좋습니다. 고로 씨에게 드리는 거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합니다. 그래서 말만, 서투른 글씨로, 미안합니다. 안녕.



영화 <파이란> 보셨는지. 거기에 동네 양아치 ‘강재(최민식)’가 편지를 읽다가 펑펑 눈물을 쏟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내 울어요. 대사도 없이.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봤습니다. 영화관에서 볼 때는 저도 오열. <파이란>의 원작이 아사다 지로의 ‘러브레터’라는 걸 알고 소설도 찾아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영화도 좋았지만 소설은 더 좋았습니다.



‘러브레터’의 주인공 이름은 고로 씨입니다. 불법 제작한 포르노를 팔아서 겨우 먹고사는 건달인데, 돈 몇 푼 받고 위장 결혼을 해준 중국 여성의 이름이 ‘파이란’이에요. 파이란은 고로와 만난 적이 없어서 늘 고로의 (벙실벙실 웃고 있는) 사진을 보며 ‘편지’를 씁니다. 그래서 제목이 ‘러브레터’, 이 편지 부분은 정말 원작이 좋습니다.



건달, 양아치, 조폭은 아사다 지로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직업군입니다. 때문에 ‘아사다 지로가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에 야쿠자로 활동했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지요. 실은 전혀 그렇지 않고 출판사가 책 판매를 위해 작가의 경력에 자극적인 설정을 풍성하게 섞다가 만들어진 소문이라고 합니다.



1951년생인 아사다 지로는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집안의 몰락으로 불량 청소년의 길을 걷는 동안 나쁜 짓도 제법 했고, 주위에 건달이나 야쿠자 생활을 하는 이들도 많았던 모양이에요. 그때의 경험으로 소설에 건달, 양아치, 조폭을 자주 등장시킨 것이지요.



고교를 졸업한 후에는 자위대에 입대하였고 제대 후에는 여성복 매장을 운영하며 옷을 팔았습니다. '소설가가 되기까지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는 프로필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강조하고 싶은데 '다양한 직업을 거쳐'라는 말은 데뷔하고 『프리즌 호텔』을 출간할 때 편집자가 붙여 준 카피다. 내가 제대 후에 가졌던 직업은 여성복 영업, 하나뿐이다. 아르바이트는 다양하게 했지만, '다양한 직업'을 거쳐 온 것은 아니다. 다만 호기심은 강한 편이다. 나는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사실 남의 이야기 듣는 걸 더 좋아한다.



이 ‘호기심’이 그를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사다 지로는 중학 시절 명작이라 불리는 문학 작품을 ‘멋대로 개작’하는 게 취미였는데,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단편 <이즈의 무희>를 ‘개작’하여 학교에서 돌려 읽게 한 적이 있었다네요. 그때 읽고 극찬한 친구가 훗날 슈에이샤(드래곤볼, 원피스, 슬램덩크 등을 출간한 대형 출판사)의 상무가 되어 “내가 네 가장 오래된 독자다”라고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부모가 이혼을 하자 아사다 지로는 엄마의 친정집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아사다 지로의 증조부는 태곳적부터 신을 모셔온 영산(靈山) 미타케산의 신관이었는데 실력 있는 퇴마사로도 유명했다네요. 그 능력은 아사다 지로의 어머니(와 이모)를 거쳐 아사다 지로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실제로’ 어려서부터 귀신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유명한 <철도원>도 죽은 딸이 돌아온다는 설정의 귀신 이야기잖아요.



<신이 깃든 산 이야기>는 미타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가 귀신을 보는 증조부와 이모를 통해 들었던, 혹은 직접 맞닥뜨린 기이한 일들을 적은 자전적 괴담집입니다. 당시에 보고 들은 이야기들은 소년 아사다 지로의 상상력을 강하게 키워주었다고 작가는 술회하고 있습니다.



“미타케산에서의 생활이 없었다면 나는 소설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얘기할 정도였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아사다 지로라는 거장이 탄생하게 된 수원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원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 도시에서 전해지는 괴담과는 또 다른, 미타케산을 배경으로 한 신비로운 괴담을 통해 달인의 이야기 솜씨를 만끽하실 형제자매님들은, 가급적 <신이 깃든 산 이야기>의 맨 뒷단에 실린 ‘편집자 후기’를 먼저 거들떠보시고 본문을 읽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마포 김 사장 드림.


덧) 사진의 왼쪽은 원서고 오른쪽은 한국어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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