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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볼버
하라다 마하 지음, 강영혜 옮김 / 북스피어 / 2026년 8월
평점 :
고흐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2,100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한데 그가 화가로 활동한 기간은 고작 10년밖에 되지 않아요. 27세의 늦은 나이에 미술을 시작하여 37세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요.
생전에 공식 미술 전시회를 통해 판매한 그림은 단 1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흐가 세상을 떠나고 불과 6개월 뒤에는 경제적으로 그를 지원했던 동생 테오마저 급사하고 맙니다. 당시 미술계는 무명 화가인 고흐의 그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이때 “돈도 되지 않는 그림들을 처분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빈센트’라는 무명의 화가를 ‘고흐’라는 세계적인 화가로 프로듀싱한 사람은 테오의 아내, 요한나(Johanna Gezina van Gogh-Bonger)였습니다.

그녀는 테오와 고흐가 주고받은 절절한 사연이 담긴 서한을 정리하여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발간했지요. 이를 통해 대중은 고흐를 광기에 휩싸인 인물이 아니라 예술에 고뇌하던 지적인 인물로 재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남성 중심적인 미술계의 냉대 속에서도 예술가 친구들과 네트워크를 다지며 유럽 전역에서 고흐의 회고전과 전시회를 끈질기게 기획했지요.
작가 하라다 마하가 빈센트 반 고흐의 삶에 대해 처음으로 쓴 소설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 않는다』에는, 남편을 잃고 홀로 남겨진 요한나가 고흐의 화폭들을 바라보며 그 예술적 가치를 깊이 깨닫는 장면이 나옵니다.
작가는, 고흐 형제의 비극적 운명 속에서 ‘위대한 유산을 세상에 전달하는 구원자이자 계승자’로서 요한나를 묘사하는데요. 이 소설을 쓰고 난 이후 하라다 마하는 고흐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고 합니다.
여러 인터뷰를 종합해 보면 작가는 대략 4년 정도 ‘고흐 체험’에 몰두한 듯해요. 이를테면 네덜란드의 반 고흐 미술관과 크뢸러 뮐러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을 순례하듯 돌아다니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흐에 관한 문헌을 연구하고, 고흐가 거닐었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닳도록 걸어다니는 등 “1460일 동안 잠들 때도 깨어 있을 때도 고흐의 영혼과 함께했다”더군요.
그런 와중에 맞닥뜨린 소식은 뜻밖의 영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고흐가 생을 마감할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어 ‘미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권총’으로 불리는 리볼버가 파리 경매장에 나왔다는 뉴스였지요.

경매일은 2019년 6월 19일, 장소는 프랑스 파리의 대규모 경매장이었습니다. 마침 파리에 머물던 시기였기에 하라다 마하는 한달음에 경매를 보러 달려갔는데 그때 “흩어져 있던 소설(빈센트 반 고흐에 관한 이야기)의 조각들이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오베르의 찬란한 풍경 속에서 자살할 이유가 전혀 보이지 않는 ‘고흐의 죽음’이라는 미술사 최대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하라다 마하는 대담한 가설을 세우는데, 스포일러가 있으니 나머지는 소설 『리볼버』의 편집자 후기에 적어두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볼게요.
글이 너무 길어져서 죄송.
일본 도쿠시마현 나루토시에 위치한 오츠카 국제 미술관은 세계 명화 복제 미술관이라는 독특한 컨셉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짝퉁들을 모아놓은 전시장이니 조잡하지만 않으면 다행이겠다 싶었지요.
한데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맞닥뜨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에서부터 뒷목을 부여잡고 말았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벽면 가득 펼쳐져 있었는데, 바티칸 현지의 엄격한 고증을 거쳐 완성했다더군요. 원작의 스케일은 물론 공간이 주는 경외감까지 완벽히 재현해 낸 장인의 집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프랑스 루브르, 뉴욕 현대미술관 등 190여 개 미술관에 흩어져 있는 명화 1000점을 전시해 놓았는데요. 그냥 전시만 해놓은 게 아니라, 이를테면 전 세계에 흩어진 (심지어 전쟁 때 공습으로 소실된) 고흐의 <해바라기> 일곱 점을 복원하여 한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루브르나 오르세에서도 불가능한 ‘꿈의 고흐전’을 성사시킨 셈이죠.

이 작품들을 다 보려면 적어도 4시간 이상, 꼼꼼하게 보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립니다. 지상 2층, 지하 3층으로 일본 최대 규모라는 점에도 혀를 내둘렀지만, 내내 궁금했던 건 대관절 저작권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하는 점이었어요.
이곳 관장과 담당자가 전 세계 미술관을 직접 찾아가 ‘도판 복제 기술’을 설명한 뒤에 승인을 받았다더군요. 일부 거장들의 유족(피카소의 아들, 미로의 손자 등)은 직접 기술력을 확인한 후 기꺼이 복제를 허가해 준 모양인데 그만큼 퀄리티가 뛰어나다는 뜻이겠지요. 직접 보면 누구라도 그 기술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에이, 그래봤자 짝퉁 아닌가? 아무리 정교하다 한들 오리지널이 주는 아우라를 대체할 수 없지. 누군가는 이렇게 평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하찮은 안목으로 볼 때, 오츠카 미술관은 진품의 오리지널리티를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의 압도적인 기획력이 돋보이는 곳입니다. 갔는데 후회했다는 형제자매님이 있다면 제가 입장료를 보상해 줄 용의도 있어요, 정말로.
그래서 언젠가 갈지 말지를 고민할 형제자매님들을 위해 오츠카 미술관의 장점을 3가지만 열거해 볼짝시면-.
1) 관람객 엄청 친화적. 어디서든 사진 촬영 허용. 그림에 가까이 가도 제지하는 안전요원 없음. 심지어 작품을 손으로 만지는 것도 가능.
2) 고대,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근대, 현대까지 서양미술의 변천을 미술알못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분류 및 설명.
3) 글로벌리한 친절함. 그림 설명마다 한국어, 중국어, 영어 병기가 잘 되어 있고 이를 통해 미술을 온몸으로 즐길 수 있는 이벤트가 가득함.
어떻습니까. 한번쯤 가보고 싶어지지 않았나요?
그럼 제가 팁을 하나 드릴게요.
소설가 하라다 마하는 모리미술관과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큐레이터 출신답게 깊이 있는 통찰을 소설 속에 담아냅니다. 작품과 예술가를 그려내는 감각적인 필치가 일품이죠. 소설 『리볼버』 역시 고흐와 그의 그림에 대한 묘사가 무척 생생해서 읽기를 마치고 나면 당장이라도 미술관으로 달려가고 싶다는 기분이 들거든요.
저는 『리볼버』가 출간되자마자, 아아 미술관에 가고 싶다, 어디로 가면 고흐의 <해바라기>를 볼 수 있으려나, 네덜란드는 너무 멀지, 인터넷에서 찾아볼까, 그러다가 “전 세계를 통틀어 고흐의 '해바라기' 일곱 점 모두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공간은 오츠카 미술관이 유일하다"는 문장을 발견하고 바로 비행기 티켓을 끊었습니다.
미술관 티켓은 한국에서 예매하면 싸고 현장에서 길게 줄 설 필요 없이 곧장 입장할 수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일단 이 소설 『리볼버』를 읽고 나면 틀림없이 미술관이 가고 싶어질 테니까 그다음에 오츠카 미술관에 가는 걸로 하시죠. 특히 전시를 비롯한 각종 행사를 기획하는 형제자매님들은 꼭 가보시길.
미술관이 이렇게 재미있는 곳이었나 하고 새삼 감탄한,
마포 김 사장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