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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 ㅣ 레이디가가
아라키 아카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4월
평점 :
제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미스터리 소설들은 일반적으로 밀실이나 외딴섬 같은 클로즈드 서클(Closed Circle)에서 예상하기 힘든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비범한 재능을 지닌 탐정이 해결한다는 패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인간의 죽음을 수수께끼풀이 게임으로 만들어 독해 작업에 열중시킨 이 장르를 ‘본격’이라는 말로 정의한 사람은 소설가 고가 사부로였는데 본격 미스터리에서는 마지막에 의표를 찔러 놀라게 할수록 좋은 평가를 받았지요. 하지만 반전을 위해 작가들이 무리한 설정을 남발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현실과 양립하기 어려운 트릭의 틀을 벗어나 리얼리티를 부여하고자 했던 시도로서 미국에서는 레이먼드 챈들러로 대표되는 하드보일드가, 일본에서는 마쓰모토 세이초가 기틀을 세운 사회파 미스터리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국적이나 활동한 시기로 볼 때 챈들러와 세이초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겠죠. 다만 이들의 작품은 선배 세대의 기류를 거부하려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코난 도일과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들은 기교에 치우쳐 있고 엘리트주의적이라는 것이 챈들러의 불만이었어요. 세이초는 독자를 상대로 한 퍼즐 같은 유희로 전락해 버린 본격 미스터리에 진저리가 난다고 적었지요. 그가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을 출발점으로 삼아 범죄가 일어나게 된 사회적 동기를 추적해 가는 사회파 미스터리의 시초가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본격 미스터리와 사회파 미스터리는 서로 경쟁하는 동시에 협력하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시마다 소지의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는 본격 미스터리지만 전후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사회파적 요소를 차용했고, 미야베 미유키의 『가모 저택 사건』은 사회파 미스터리지만 밀실 트릭을 사용한 바 있지요. 이후 새로운 감각으로 무장한 작가들이 하나둘 등장하며 장르의 경계도 점차 옅어져 갑니다.
와중에 역대 최연소(23세) 심사위원(아야츠지 유키토, 아라이 모토코, 고교쿠 나쓰히코, 시바타 요시키) 만장일치로 에도가와 란포 상을 거머쥐며 초신성처럼 등장한 작가 아라키 아키네는, 역대급 데뷔작에 이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지금껏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형태의 차기작을 발표합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막_본격 미스터리. 무인도에서 벌어진 밀실 살인, 범인 불명. 전부 죽였다는 누명을 쓰기 전 진범을 밝혀야 하는 남자의 추리극.
2막_사회파 미스터리. 대도시에서 발생한 토막 살인, 동기 불명. 다음 표적으로 살해당하기 전 범인의 동기를 찾는 여자의 수사극.
소설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은 전혀 다른 형태의 1막과 2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간도, 배경도, 등장인물도, 분위기도, 범행 수법 외에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두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 진실이 드러난다는 설정의 소설로, 지금껏 시도되지 않은 참신한 구성이라 하겠습니다. 일본 원서의 띠지에는 “MZ세대 애거사 크리스티가 그리는 슬픈 연쇄 살인”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왜 이런 카피를 사용했느냐. 무인도에서 벌어진 밀실 살인에 관해 읽고 있노라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명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가, 대도시에서 발생한 토막 살인에 관해 읽고 있노라면 그녀가 남긴 걸작 『ABC 살인 사건』이 자연스레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은 이렇듯 고전 미스터리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사회를 뒤덮고 있는 남성우월주의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파고들었는데 2023년 9월 23일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라카 아카네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을 오마주한 본격 미스터리적 설정을 기본 전제로 하고 사회파 미스터리적인 재미를 추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ABC 살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 또 하나 염두에 두었던 대목은 작가 생활 내내 계속 쓰고 싶은 주제인 시스터후드에 관해서다. 미스터리 작품 중에는 아직 여자 주인공 콤비가 상대적으로 적다. 명탐정은 아직 대부분 남자들이다. 서로 도우며 생동감 있게 활약하는 여성 캐릭터들을 그려보고 싶었다. 여성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내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되기 전까지의 나는 사회생활을 하며 닳아 없어진 부분이 많았는데, 그 부분을 채워준 것이 시스터후드 소설들이었다. 내가 처한 상황이나 그동안 왠지 모르게 힘들다고 느꼈던 것들에 이름을 붙여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작가가 된 이후에 여성이 활약하는 본격 미스터리 작품으로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막의 테마는 복수. 외딴섬의 해상 코티지에 놀러 온 일곱 남녀 중 한 명인 히토가 ‘선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행들을 모두 죽일 작정으로 비소를 몰래 들여오지요. 5일 후 배를 태워줄 사람이 오기 전에 ‘유서라는 이름의 범행 진술서’가 업로드될 수 있도록 준비도 해두었습니다. 이렇게 한 뒤에 자살해 버리면 복수의 연쇄를 끊고 그들의 죄도 공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말이죠. 한데 과연 그럴까요. 계획을 실행할 즈음에 이르러 그 살의는 무뎌지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죽임을 당할 만큼 끔찍한 인간들인가. 망설이는 가운데 한 사람이 혀가 잘린 시체로 발견되지요. 그리고 연이어 일어나는 제2, 제3의 살인. 살해되는 사람은 반드시 ‘직전 살인의 첫 번째 발견자’였고 시신의 ‘혀’가 잘려 나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2막의 테마는 시스터후드. 1막의 사건으로부터 3년 후. 전혀 무관해 보이는 세 명의 남녀가 연달아 살해당하고 우연히 ‘세 번째 최초 발견자’가 된 청소부 마리아를 형사 이쿠코가 경호하게 되지요. 한데 유능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경찰 내부에서 평가가 낮은 이쿠코의 상황에 마리아가 분노하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고향 아마쿠사에서 일어난 사건과의 연관성을 찾아 나선 마리아와 이쿠코는 점차 직무를 넘어선 신뢰 관계를 쌓아나가지요. 1막에서는 수수께끼 풀이에 집중했다면 2막에서는 끔찍한 사건 뒤에 숨겨진 인간 드라마를 따라갑니다. 부모와 형제, 고향과 학교의 선후배 등 다양한 인간관계의 사슬에 묶여 움직일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서라도 그 사슬을 끊어야만 하는가. 마리아가 수수께끼를 풀면서 알게 된 사실 가운데 하나는 마음을 맞대면 온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복수는 어쩌면 남성우월주의적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좋게 여기고, 힘을 보여줘야만 남자답다는 식의 가치관이 복수의 근저에 깔려 있는데, 그 해악을 들여다보고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은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복수를 통해 그려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남성중심적 사회에 지쳐 가족들과도 떨어져 살기로 한 그녀들이, 이걸로 괜찮겠지, 지금은 이게 최선이지, 라고 자위하면서도 서로에게 말을 걸고 연대하는 모습을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에서 그려 보았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애정을 이유로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 건 아니라는 부분을 여러 조합으로 써보고 싶었어요. 애정도 때로는 해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전근대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부모나 상사 등 지위나 권한이 높은 사람의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애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는 그녀들 같은 탐정 역할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죠.”
사실 보호한다는 행위에도 상대를 소유물로 여기는 지배욕이나 상하관계가 느껴져 전적으로 긍정하기 어렵다고, 1998년생, 이제 27살인 작가 아라키 아키네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속에도 폭력성이 숨어 있는 이상,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맺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쩌면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에는 그 균형의 어려움(끊어진 사슬)과 그럼에도 사람을 믿고 싶다는 저자의 희망(빛의 조각)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7살의 나는 오로지 여자랑 관계 한번 맺어 보겠다고 밤낮 없이 애쓰는 삶을 살았는데(한숨), 27살의 아라키 아키네는 이렇게 통찰력 있는 소설을 써냈구나 싶어서 무척 부끄러워진 한편으로 데뷔작 『세상 끝의 살인』과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에 이어 앞으로도 계속 이 작가의 작품을 한국에 소개하고 싶다고 생각한,
마포 김 사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