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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깃든 산 이야기 이판사판
아사다 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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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고로 씨. 아무도 없는 사이에 살짝 편지 쓰고 있습니다. 서투른 글씨 미안합니다. 나는 죽습니다. 이렇게 죽는 여자들 많이 봤으니까 나는 압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 갚으면 고로 씨하고 만날 수 있을까. 고로 씨와 함께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안 됩니다.


고로 씨 항상 벙실벙실 웃고 있습니다. 일하면서 고로 씨 잊지 않습니다. 진짜입니다. 내가 죽으면 고로 씨 만나러 와줍니까. 고로 씨 덕분에 일 많이 했습니다. 고향 집에 돈 많이 부쳤습니다. 죽는 것 무섭지만 아프지만 괴롭지만 참습니다. 바닷소리 들립니다. 비 옵니다. 아주 캄캄합니다. 서투른 글씨 미안합니다. 고로 씨가 정말 좋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누구보다 고로 씨가 좋습니다. 고로 씨에게 드리는 거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합니다. 그래서 말만, 서투른 글씨로, 미안합니다. 안녕.



영화 <파이란> 보셨는지. 거기에 동네 양아치 ‘강재(최민식)’가 편지를 읽다가 펑펑 눈물을 쏟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내 울어요. 대사도 없이.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봤습니다. 영화관에서 볼 때는 저도 오열. <파이란>의 원작이 아사다 지로의 ‘러브레터’라는 걸 알고 소설도 찾아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영화도 좋았지만 소설은 더 좋았습니다.



‘러브레터’의 주인공 이름은 고로 씨입니다. 불법 제작한 포르노를 팔아서 겨우 먹고사는 건달인데, 돈 몇 푼 받고 위장 결혼을 해준 중국 여성의 이름이 ‘파이란’이에요. 파이란은 고로와 만난 적이 없어서 늘 고로의 (벙실벙실 웃고 있는) 사진을 보며 ‘편지’를 씁니다. 그래서 제목이 ‘러브레터’, 이 편지 부분은 정말 원작이 좋습니다.



건달, 양아치, 조폭은 아사다 지로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직업군입니다. 때문에 ‘아사다 지로가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에 야쿠자로 활동했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지요. 실은 전혀 그렇지 않고 출판사가 책 판매를 위해 작가의 경력에 자극적인 설정을 풍성하게 섞다가 만들어진 소문이라고 합니다.



1951년생인 아사다 지로는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집안의 몰락으로 불량 청소년의 길을 걷는 동안 나쁜 짓도 제법 했고, 주위에 건달이나 야쿠자 생활을 하는 이들도 많았던 모양이에요. 그때의 경험으로 소설에 건달, 양아치, 조폭을 자주 등장시킨 것이지요.



고교를 졸업한 후에는 자위대에 입대하였고 제대 후에는 여성복 매장을 운영하며 옷을 팔았습니다. '소설가가 되기까지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는 프로필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강조하고 싶은데 '다양한 직업을 거쳐'라는 말은 데뷔하고 『프리즌 호텔』을 출간할 때 편집자가 붙여 준 카피다. 내가 제대 후에 가졌던 직업은 여성복 영업, 하나뿐이다. 아르바이트는 다양하게 했지만, '다양한 직업'을 거쳐 온 것은 아니다. 다만 호기심은 강한 편이다. 나는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사실 남의 이야기 듣는 걸 더 좋아한다.



이 ‘호기심’이 그를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사다 지로는 중학 시절 명작이라 불리는 문학 작품을 ‘멋대로 개작’하는 게 취미였는데,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단편 <이즈의 무희>를 ‘개작’하여 학교에서 돌려 읽게 한 적이 있었다네요. 그때 읽고 극찬한 친구가 훗날 슈에이샤(드래곤볼, 원피스, 슬램덩크 등을 출간한 대형 출판사)의 상무가 되어 “내가 네 가장 오래된 독자다”라고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부모가 이혼을 하자 아사다 지로는 엄마의 친정집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아사다 지로의 증조부는 태곳적부터 신을 모셔온 영산(靈山) 미타케산의 신관이었는데 실력 있는 퇴마사로도 유명했다네요. 그 능력은 아사다 지로의 어머니(와 이모)를 거쳐 아사다 지로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실제로’ 어려서부터 귀신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유명한 <철도원>도 죽은 딸이 돌아온다는 설정의 귀신 이야기잖아요.



<신이 깃든 산 이야기>는 미타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가 귀신을 보는 증조부와 이모를 통해 들었던, 혹은 직접 맞닥뜨린 기이한 일들을 적은 자전적 괴담집입니다. 당시에 보고 들은 이야기들은 소년 아사다 지로의 상상력을 강하게 키워주었다고 작가는 술회하고 있습니다.



“미타케산에서의 생활이 없었다면 나는 소설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얘기할 정도였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아사다 지로라는 거장이 탄생하게 된 수원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원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 도시에서 전해지는 괴담과는 또 다른, 미타케산을 배경으로 한 신비로운 괴담을 통해 달인의 이야기 솜씨를 만끽하실 형제자매님들은, 가급적 <신이 깃든 산 이야기>의 맨 뒷단에 실린 ‘편집자 후기’를 먼저 거들떠보시고 본문을 읽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마포 김 사장 드림.


덧) 사진의 왼쪽은 원서고 오른쪽은 한국어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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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저택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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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에 미야베 미유키 작가가 집중해서 쓰고 있는 작품은 미시마야 시리즈와 기타기타 시리즈입니다. 둘 다 라이프워크(필생의 사업)라 공언했고 반드시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지요. 두 시리즈는 차이가 명확한데 미시마야는 괴이가 중심이고, 기타기타는 사건이 중심이라서 미시마야에는 귀신이 나오지만 기타기타에는 실제로 귀신이 등장하진 않아요.


그렇다면 미시마야 시리즈를 완결하기 전에 기타기타 시리즈를 시작한 이유는, 현대 미스터리를 쓰지 않는 대신 시대물에서 현대 미스터리적인, 가령 법의학적 지식이 들어간다거나 하는 식으로 리얼리티가 있는 시대물을 쓰고 싶어서가 아닐까 짐작했는데, 이번 작품 『귀신 저택』을 보면 아무래도 맞는 듯합니다.


오래전부터 작가는 포물첩(일본 시대물의 주류 장르 가운데 하나이며 주로 에도를 무대로 한 탐정소설)을 쓰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포물첩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겠죠. 고민 끝에 차별화한 지점은 어엿한 어른 탐정(오캇피키) 대신 열여섯 살가량의 젊은이 기타이치를 주인공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낯설지 않은 광경이죠. 기타이치를 보면 어쩐지 스기무라 사부로가 떠오르지 않나요. 작가가 유일하게 만든 탐정 스기무라도 기존의 탐정물과 달라야 한다는 고민 끝에 만들어진 캐릭터입니다. 탐정으로서 뛰어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지만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력이 강해서 여성들로부터 사랑받는 인물이죠. 전부 기타이치에게도 해당되는 특징입니다.


부모는 물론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기타이치는 오캇피키인 센키치 대장 덕분에 겨우 살아가는 처지로 본업이 문고 판매상이지요. 문고란 ‘책’이 아니라 ‘책을 넣어 보관하는 상자’를 뜻하는데, 작가가 일본인들에게도 낯선 문고 판매상을 주인공의 직업으로 삼은 이유도 차별화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캇피키들은 탐정 일이라는 본업 외에 먹고살기 위한 방편으로 다양한 부업에 종사했는데 기존의 포물첩에서는 문고 판매를 부업으로 삼은 사례가 전혀 없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작가가 택한 문고판매상으로 기타이치는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한데 그를 보살펴주던 센키치 대장이 복어 독에 중독되어 목숨을 잃으면서 오캇피키 견습으로서의 걸음을 내딛게 되지요.


초보 탐정 스기무라 사부로에게 그를 백업해 줄 대형 탐정사무소 ‘오피스 가키가라’와 인터넷의 마법사 기다 같은 이들이 있었던 것처럼, 견습 오캇피키인 기타이치 주위에도 그를 돕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포창에 걸려 눈이 먼 대신 귀가 좋고 추리력이 뛰어나며 책을 잔뜩 읽어서 박식하기까지 한 마쓰바, 한 번 보고 들은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는 법이 없는 천재적 암기력의 소유자 짱구, 탁월한 법의학적 능력과 집요한 수사력으로 요리키라는 대단한 지위에까지 올랐지만 ‘곤란한 일이 있을 땐 내 이름을 대도 좋다’며 뒷배를 자처한 구리야마,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은 그 정체가 철저히 베일에 싸인 기타지. 이들 덕분에 기타이치는 제대로 된 오캇피키로 성장해 갑니다.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 기타이치는 여성 연쇄 유괴 사건과 맞닥뜨리게 되지요. 저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교정을 보는 동안 여러 번 한숨을 쉬며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궁금했는데. 마침 북스피어 창립 20주년을 맞아 진행한 인터뷰(야매 장르문학 소식지 <Le Zirasi 15호 20주년 특대호>)에서 미야베 미유키 작가를 직접 만나 물어보았더니,


“여성이 밤에 혼자 걸어 다닐 수 있는 도시로서 도쿄는 늘 안전한 곳이었는데 최근 그렇지 않은 사건도 일어나서 무섭다고 느낀 제 마음이 나타난 것이겠죠. 에도 시대에는 지금보다도 통행이 엄격했기 때문에 치안은 좋았던 모양이지만 여자나 어린이는 약하기 때문에 간단히 납치당하거나 폭력의 대상이 되거나 했어요. 그걸 제대로 쓰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 썼습니다.”


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무서운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만 ‘그 무서움’의 맥락에 대해서는 <Le Zirasi 20주년 특대호>에 실린 미야베 미유키 작가의 인터뷰 전문을 읽어봐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가급적 『귀신 저택』의 읽기를 마치고 나서 인터뷰를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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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 : 형제 편 + 자매 편 - 전2권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
이노우에 마기 지음, 김은모 옮김 / 알라딘 이벤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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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만드는 사람들과 해외여행을 가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 있습니다.

서점입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한다는

속담도 있는데 대충 비슷합니다.

미리 정해 놓은 것도 아니고

딱히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책방이 보이면 들어가 봐야 직성이 풀립니다.

 

지난해 겨울에도 편집자 몇 명이

함께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맞닥뜨린

서점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각자 구경한 뒤에 입구에서 만나죠.”

 

그렇게 약속하고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지요.

저는 곧장 소설이 진열된 층으로 향했습니다.

거기서 한 시간쯤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가

돌아가려는데 은행나무 편집자가 보이더군요.

진열대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뭘까.

궁금해서 다가가 보니

커다란 POP에 적힌 문장이 눈에 확 띄더군요.

 

대체할 수 없는 독서 경험을 얻을 수 있는 괴작!

사건은 같지만, 전개되는 추리는 전혀 다르다.”

 

어라? 추리소설인가요? 특이해 보이네요.

그쵸? 저도 흥미로워서 한참 보고 있었어요.

 

이 책을 쓴 작가가 도쿄대 공대 출신인데

'추리소설은, 가설이 있고 그걸 검증하는

이공계 논문이랑 같아서 쉽게 썼다'고 합니다.

어느 날 두 군데 매체에서 동시에 청탁이 들어오자

'서로 연동할 수 있는 작품을 쓰겠다.'

같은 사건이지만 각각 다른 추리가 전개되는

소설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더군요.

 

이거 은행나무랑 북스피어랑 

한 권씩 내면 재밌겠는데요?”


, 일단 판권이 팔렸는지 알아볼까요?”


그럼 저는 믿을 만한 번역가에게 맡겨서 

내용을 검토해 볼게요.”

 

다행히 판권은 살아 있었고

두 출판사에서 각각 시간을 들여

검토를 마친 이후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어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형제편)은 은행나무 출판사,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자매편)은 북스피어 출판사

에서 각각, 함께 출간하게 되었다는 사연입니다.

두 권의 책을 번갈아 읽는다는 새로운 추리소설을

즐겨주시면 좋겠습니다.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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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 : 형제 편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
이노우에 마기 지음, 김은모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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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늘 복면작가라는 레테르가 따라다닙니다. 지금껏 나이도, 성별도, 얼굴도 공개하지 않았으니까요. 한데 듀나 작가처럼 철저히 베일에 싸인 게 아니라 대충대충 베일에 싸여 있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아사히신문에 실린 인터뷰를 보면 학창 시절 모습이나 데뷔 전후로 어떻게 글을 써왔는지 알 수 있어요.

 

도쿄대 공학부에 진학한 그는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를 읽다가 이공계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에 흥미를 느껴 대학원에서 유전정보공학을 전공으로 삼습니다. 메피스토 상을 수상한 데뷔작은 탐정들이 펼치는 추리를 수리논리학자가 검증하고 뒤집어 버린다는 내용으로 대학(대학원) 시절의 공부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요.

 

그 전까지 추리소설을 읽지도 않았고 잘 알지도 못했을 텐데 왜 데뷔작으로 추리소설을 썼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본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추리소설은 이공계 논문과 비슷하다. 문제 제기가 있고 그에 대한 가설이 있고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같기 때문에 그 형식을 따라가다 보니 별로 어렵지 않게 쓸 수 있었다.”

 

아아, 이공계 논문과 형식이 비슷해서 추리소설을 쉽게 쓸 수 있었다니 실로 참신한 관점이네요. 작가 이노우에 마기(필명)의 추리소설들이 각종 차트를 석권하고 독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까닭은 기존 작품들에서 찾기 힘든 독특한 설정 덕분일 겁니다. 예컨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이라는 아이디어 같은 건 아무나 떠올릴 수 없겠죠.

 

작가의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최고조로 발현된 작품이라면, 현시점에서는 단연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추리소설을 쓸 생각을 했을까. 시작은 얼핏 단순해 보입니다. 어느 날 두 군데 매체로부터 동시에 연재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던 겁니다.

 

만약 저라면 이 매체에는 A라는 소설을, 저 매체에는 B라는 소설을 써서 보내겠지만 이노우에 마기는 역시 (긍정적 의미로) ‘또라이같은 작가니까요. 모처럼의 기회에 머리를 굴리기 시작합니다. 두 매체 동시 연재라……. 뭔가 서로 연동할 수 있는 작품을 써보면 어떨까. 그러다가 떠올린 것이 같은 사건인데 각각 완전히 다른 추리가 전개된다는 구조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를 떠올리는 분도 계실 텐데 그 작품은 여성작가가 여성의 시각으로, 남자작가가 남자의 시각으로 쓴 거니까요.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는 한 작가가 같은 사건을 두고 여성의 시점으로 추리해서 한 권, 남자의 시점으로 추리해서 또 한 권을 썼으니 다르죠.

 

게다가 두 권이 한 챕터씩 링크되어 있어 번갈아 읽어야 하는데, 이 아이디어는 아마 세계 최초일 겁니다. 저도 만들면서 많이 배웠어요. 좀 더 자세한 내용을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 편집자 후기에 적어놓았으니, 아이디어 보릿고개에 시달리는 형제자매님들이라면 한 번 거들떠봐 주셔도 좋겠습니다.

 

)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는 두 출판사의 공동 출판 프로젝트로 은행나무에서 '형제 편'을 북스피어에서 '자매 편'을 출간하였으며 어느 쪽 이야기를 먼저 봐도 상관없도록 번역과 판형과 디자인을 통일하여 제작했습니다. 원서 두 권은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왜 한국에서는 은행나무가 한 권, 북스피어가 한 권을 각각 출간했는지, 그 경위에 대해서도 <긴나미 상점가의 사건 노트> 편집자 후기에 적어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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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 레이디가가
아라키 아카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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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미스터리 소설들은 일반적으로 밀실이나 외딴섬 같은 클로즈드 서클(Closed Circle)에서 예상하기 힘든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비범한 재능을 지닌 탐정이 해결한다는 패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인간의 죽음을 수수께끼풀이 게임으로 만들어 독해 작업에 열중시킨 이 장르를 ‘본격’이라는 말로 정의한 사람은 소설가 고가 사부로였는데 본격 미스터리에서는 마지막에 의표를 찔러 놀라게 할수록 좋은 평가를 받았지요. 하지만 반전을 위해 작가들이 무리한 설정을 남발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현실과 양립하기 어려운 트릭의 틀을 벗어나 리얼리티를 부여하고자 했던 시도로서 미국에서는 레이먼드 챈들러로 대표되는 하드보일드가, 일본에서는 마쓰모토 세이초가 기틀을 세운 사회파 미스터리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국적이나 활동한 시기로 볼 때 챈들러와 세이초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겠죠. 다만 이들의 작품은 선배 세대의 기류를 거부하려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코난 도일과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들은 기교에 치우쳐 있고 엘리트주의적이라는 것이 챈들러의 불만이었어요. 세이초는 독자를 상대로 한 퍼즐 같은 유희로 전락해 버린 본격 미스터리에 진저리가 난다고 적었지요. 그가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을 출발점으로 삼아 범죄가 일어나게 된 사회적 동기를 추적해 가는 사회파 미스터리의 시초가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본격 미스터리와 사회파 미스터리는 서로 경쟁하는 동시에 협력하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시마다 소지의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는 본격 미스터리지만 전후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사회파적 요소를 차용했고, 미야베 미유키의 『가모 저택 사건』은 사회파 미스터리지만 밀실 트릭을 사용한 바 있지요. 이후 새로운 감각으로 무장한 작가들이 하나둘 등장하며 장르의 경계도 점차 옅어져 갑니다.



와중에 역대 최연소(23세) 심사위원(아야츠지 유키토, 아라이 모토코, 고교쿠 나쓰히코, 시바타 요시키) 만장일치로 에도가와 란포 상을 거머쥐며 초신성처럼 등장한 작가 아라키 아키네는, 역대급 데뷔작에 이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지금껏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형태의 차기작을 발표합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막_본격 미스터리. 무인도에서 벌어진 밀실 살인, 범인 불명. 전부 죽였다는 누명을 쓰기 전 진범을 밝혀야 하는 남자의 추리극.


2막_사회파 미스터리. 대도시에서 발생한 토막 살인, 동기 불명. 다음 표적으로 살해당하기 전 범인의 동기를 찾는 여자의 수사극. 



소설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은 전혀 다른 형태의 1막과 2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간도, 배경도, 등장인물도, 분위기도, 범행 수법 외에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두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 진실이 드러난다는 설정의 소설로, 지금껏 시도되지 않은 참신한 구성이라 하겠습니다. 일본 원서의 띠지에는 “MZ세대 애거사 크리스티가 그리는 슬픈 연쇄 살인”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왜 이런 카피를 사용했느냐. 무인도에서 벌어진 밀실 살인에 관해 읽고 있노라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명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가, 대도시에서 발생한 토막 살인에 관해 읽고 있노라면 그녀가 남긴 걸작 『ABC 살인 사건』이 자연스레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은 이렇듯 고전 미스터리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사회를 뒤덮고 있는 남성우월주의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파고들었는데 2023년 9월 23일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라카 아카네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을 오마주한 본격 미스터리적 설정을 기본 전제로 하고 사회파 미스터리적인 재미를 추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ABC 살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 또 하나 염두에 두었던 대목은 작가 생활 내내 계속 쓰고 싶은 주제인 시스터후드에 관해서다. 미스터리 작품 중에는 아직 여자 주인공 콤비가 상대적으로 적다. 명탐정은 아직 대부분 남자들이다. 서로 도우며 생동감 있게 활약하는 여성 캐릭터들을 그려보고 싶었다. 여성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내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되기 전까지의 나는 사회생활을 하며 닳아 없어진 부분이 많았는데, 그 부분을 채워준 것이 시스터후드 소설들이었다. 내가 처한 상황이나 그동안 왠지 모르게 힘들다고 느꼈던 것들에 이름을 붙여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작가가 된 이후에 여성이 활약하는 본격 미스터리 작품으로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막의 테마는 복수. 외딴섬의 해상 코티지에 놀러 온 일곱 남녀 중 한 명인 히토가 ‘선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행들을 모두 죽일 작정으로 비소를 몰래 들여오지요. 5일 후 배를 태워줄 사람이 오기 전에 ‘유서라는 이름의 범행 진술서’가 업로드될 수 있도록 준비도 해두었습니다. 이렇게 한 뒤에 자살해 버리면 복수의 연쇄를 끊고 그들의 죄도 공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말이죠. 한데 과연 그럴까요. 계획을 실행할 즈음에 이르러 그 살의는 무뎌지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죽임을 당할 만큼 끔찍한 인간들인가. 망설이는 가운데 한 사람이 혀가 잘린 시체로 발견되지요. 그리고 연이어 일어나는 제2, 제3의 살인. 살해되는 사람은 반드시 ‘직전 살인의 첫 번째 발견자’였고 시신의 ‘혀’가 잘려 나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2막의 테마는 시스터후드. 1막의 사건으로부터 3년 후. 전혀 무관해 보이는 세 명의 남녀가 연달아 살해당하고 우연히 ‘세 번째 최초 발견자’가 된 청소부 마리아를 형사 이쿠코가 경호하게 되지요. 한데 유능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경찰 내부에서 평가가 낮은 이쿠코의 상황에 마리아가 분노하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고향 아마쿠사에서 일어난 사건과의 연관성을 찾아 나선 마리아와 이쿠코는 점차 직무를 넘어선 신뢰 관계를 쌓아나가지요. 1막에서는 수수께끼 풀이에 집중했다면 2막에서는 끔찍한 사건 뒤에 숨겨진 인간 드라마를 따라갑니다. 부모와 형제, 고향과 학교의 선후배 등 다양한 인간관계의 사슬에 묶여 움직일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서라도 그 사슬을 끊어야만 하는가. 마리아가 수수께끼를 풀면서 알게 된 사실 가운데 하나는 마음을 맞대면 온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복수는 어쩌면 남성우월주의적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좋게 여기고, 힘을 보여줘야만 남자답다는 식의 가치관이 복수의 근저에 깔려 있는데, 그 해악을 들여다보고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은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복수를 통해 그려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남성중심적 사회에 지쳐 가족들과도 떨어져 살기로 한 그녀들이, 이걸로 괜찮겠지, 지금은 이게 최선이지, 라고 자위하면서도 서로에게 말을 걸고 연대하는 모습을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에서 그려 보았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애정을 이유로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 건 아니라는 부분을 여러 조합으로 써보고 싶었어요. 애정도 때로는 해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전근대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부모나 상사 등 지위나 권한이 높은 사람의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애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는 그녀들 같은 탐정 역할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죠.”



사실 보호한다는 행위에도 상대를 소유물로 여기는 지배욕이나 상하관계가 느껴져 전적으로 긍정하기 어렵다고, 1998년생, 이제 27살인 작가 아라키 아키네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속에도 폭력성이 숨어 있는 이상,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맺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쩌면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에는 그 균형의 어려움(끊어진 사슬)과 그럼에도 사람을 믿고 싶다는 저자의 희망(빛의 조각)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7살의 나는 오로지 여자랑 관계 한번 맺어 보겠다고 밤낮 없이 애쓰는 삶을 살았는데(한숨), 27살의 아라키 아키네는 이렇게 통찰력 있는 소설을 써냈구나 싶어서 무척 부끄러워진 한편으로 데뷔작 『세상 끝의 살인』과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에 이어 앞으로도 계속 이 작가의 작품을 한국에 소개하고 싶다고 생각한,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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