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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볼버
하라다 마하 지음, 강영혜 옮김 / 북스피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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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2,100점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한데 그가 화가로 활동한 기간은 고작 10년밖에 되지 않아요. 27세의 늦은 나이에 미술을 시작하여 37세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요.



생전에 공식 미술 전시회를 통해 판매한 그림은 단 1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흐가 세상을 떠나고 불과 6개월 뒤에는 경제적으로 그를 지원했던 동생 테오마저 급사하고 맙니다. 당시 미술계는 무명 화가인 고흐의 그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이때 “돈도 되지 않는 그림들을 처분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빈센트’라는 무명의 화가를 ‘고흐’라는 세계적인 화가로 프로듀싱한 사람은 테오의 아내, 요한나(Johanna Gezina van Gogh-Bonger)였습니다.







그녀는 테오와 고흐가 주고받은 절절한 사연이 담긴 서한을 정리하여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발간했지요. 이를 통해 대중은 고흐를 광기에 휩싸인 인물이 아니라 예술에 고뇌하던 지적인 인물로 재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남성 중심적인 미술계의 냉대 속에서도 예술가 친구들과 네트워크를 다지며 유럽 전역에서 고흐의 회고전과 전시회를 끈질기게 기획했지요.



작가 하라다 마하가 빈센트 반 고흐의 삶에 대해 처음으로 쓴 소설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 않는다』에는, 남편을 잃고 홀로 남겨진 요한나가 고흐의 화폭들을 바라보며 그 예술적 가치를 깊이 깨닫는 장면이 나옵니다.



작가는, 고흐 형제의 비극적 운명 속에서 ‘위대한 유산을 세상에 전달하는 구원자이자 계승자’로서 요한나를 묘사하는데요. 이 소설을 쓰고 난 이후 하라다 마하는 고흐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고 합니다.

 


여러 인터뷰를 종합해 보면 작가는 대략 4년 정도 ‘고흐 체험’에 몰두한 듯해요. 이를테면 네덜란드의 반 고흐 미술관과 크뢸러 뮐러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을 순례하듯 돌아다니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고흐에 관한 문헌을 연구하고, 고흐가 거닐었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닳도록 걸어다니는 등 “1460일 동안 잠들 때도 깨어 있을 때도 고흐의 영혼과 함께했다”더군요.



그런 와중에 맞닥뜨린 소식은 뜻밖의 영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고흐가 생을 마감할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어 ‘미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권총’으로 불리는 리볼버가 파리 경매장에 나왔다는 뉴스였지요.







경매일은 2019년 6월 19일, 장소는 프랑스 파리의 대규모 경매장이었습니다. 마침 파리에 머물던 시기였기에 하라다 마하는 한달음에 경매를 보러 달려갔는데 그때 “흩어져 있던 소설(빈센트 반 고흐에 관한 이야기)의 조각들이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오베르의 찬란한 풍경 속에서 자살할 이유가 전혀 보이지 않는 ‘고흐의 죽음’이라는 미술사 최대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하라다 마하는 대담한 가설을 세우는데, 스포일러가 있으니 나머지는 소설 『리볼버』의 편집자 후기에 적어두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볼게요.

글이 너무 길어져서 죄송.



일본 도쿠시마현 나루토시에 위치한 오츠카 국제 미술관은 세계 명화 복제 미술관이라는 독특한 컨셉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짝퉁들을 모아놓은 전시장이니 조잡하지만 않으면 다행이겠다 싶었지요.



한데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맞닥뜨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에서부터 뒷목을 부여잡고 말았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벽면 가득 펼쳐져 있었는데, 바티칸 현지의 엄격한 고증을 거쳐 완성했다더군요. 원작의 스케일은 물론 공간이 주는 경외감까지 완벽히 재현해 낸 장인의 집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프랑스 루브르, 뉴욕 현대미술관 등 190여 개 미술관에 흩어져 있는 명화 1000점을 전시해 놓았는데요. 그냥 전시만 해놓은 게 아니라, 이를테면 전 세계에 흩어진 (심지어 전쟁 때 공습으로 소실된) 고흐의 <해바라기> 일곱 점을 복원하여 한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모아두었습니다. 루브르나 오르세에서도 불가능한 ‘꿈의 고흐전’을 성사시킨 셈이죠.





이 작품들을 다 보려면 적어도 4시간 이상, 꼼꼼하게 보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립니다. 지상 2층, 지하 3층으로 일본 최대 규모라는 점에도 혀를 내둘렀지만, 내내 궁금했던 건 대관절 저작권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하는 점이었어요.



이곳 관장과 담당자가 전 세계 미술관을 직접 찾아가 ‘도판 복제 기술’을 설명한 뒤에 승인을 받았다더군요. 일부 거장들의 유족(피카소의 아들, 미로의 손자 등)은 직접 기술력을 확인한 후 기꺼이 복제를 허가해 준 모양인데 그만큼 퀄리티가 뛰어나다는 뜻이겠지요. 직접 보면 누구라도 그 기술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에이, 그래봤자 짝퉁 아닌가? 아무리 정교하다 한들 오리지널이 주는 아우라를 대체할 수 없지. 누군가는 이렇게 평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하찮은 안목으로 볼 때, 오츠카 미술관은 진품의 오리지널리티를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의 압도적인 기획력이 돋보이는 곳입니다. 갔는데 후회했다는 형제자매님이 있다면 제가 입장료를 보상해 줄 용의도 있어요, 정말로.



그래서 언젠가 갈지 말지를 고민할 형제자매님들을 위해 오츠카 미술관의 장점을 3가지만 열거해 볼짝시면-.


1) 관람객 엄청 친화적. 어디서든 사진 촬영 허용. 그림에 가까이 가도 제지하는 안전요원 없음. 심지어 작품을 손으로 만지는 것도 가능.


2) 고대,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근대, 현대까지 서양미술의 변천을 미술알못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분류 및 설명.


3) 글로벌리한 친절함. 그림 설명마다 한국어, 중국어, 영어 병기가 잘 되어 있고 이를 통해 미술을 온몸으로 즐길 수 있는 이벤트가 가득함.



어떻습니까. 한번쯤 가보고 싶어지지 않았나요? 

그럼 제가 팁을 하나 드릴게요.



소설가 하라다 마하는 모리미술관과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큐레이터 출신답게 깊이 있는 통찰을 소설 속에 담아냅니다. 작품과 예술가를 그려내는 감각적인 필치가 일품이죠. 소설 『리볼버』 역시 고흐와 그의 그림에 대한 묘사가 무척 생생해서 읽기를 마치고 나면 당장이라도 미술관으로 달려가고 싶다는 기분이 들거든요.



저는 『리볼버』가 출간되자마자, 아아 미술관에 가고 싶다, 어디로 가면 고흐의 <해바라기>를 볼 수 있으려나, 네덜란드는 너무 멀지, 인터넷에서 찾아볼까, 그러다가 “전 세계를 통틀어 고흐의 '해바라기' 일곱 점 모두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공간은 오츠카 미술관이 유일하다"는 문장을 발견하고 바로 비행기 티켓을 끊었습니다.



미술관 티켓은 한국에서 예매하면 싸고 현장에서 길게 줄 설 필요 없이 곧장 입장할 수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일단 이 소설 『리볼버』를 읽고 나면 틀림없이 미술관이 가고 싶어질 테니까 그다음에 오츠카 미술관에 가는 걸로 하시죠. 특히 전시를 비롯한 각종 행사를 기획하는 형제자매님들은 꼭 가보시길.



미술관이 이렇게 재미있는 곳이었나 하고 새삼 감탄한,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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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레이디가가
미치오 슈스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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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미치오 슈스케는 몇 년 전, 얽히고설킨 사건의 진상이 마지막 페이지에 등장하는 사진 한 장에 의해 완전히 뒤바뀐다는 설정의 소설집을 출간한 적이 있습니다. 이른바 체험형 미스터리의 시초가 된 작품이지요. 그 직후에는 본문을 다 읽은 뒤 마지막 페이지의 QR코드를 찍어 어떤 소리를 들음으로써 이야기를 완성하는 형식의 소설을 발표했어요. 소리를 이용하여 소설의 영역을 확장한 것입니다.

 


N이라는 제목의, 전부 6장으로 구성된 장편이지만 어느 장부터 읽기 시작할지, 다음은 어느 장으로 넘어갈지, 어느 장으로 끝마칠지 독자가 선택할 수 있는 작품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지요. , 그는 이런 시도를 거듭하는 걸까요. 어느 인터뷰에서 미치오 슈스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소설을 읽는 사람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까 평범한 소설로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넷플릭스> 같은 라이벌과 싸우려면 소설이 더 재미있어져야 하지 않을까, 어느 업계든 일단 고객이 줄어들면 상품을 개량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책에 대해서만은 책을 안 읽게 된 사람들이 나쁘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풍조가 있어서 더 책을 읽어야 한다고들 말하는데 그건 아니지 않나. 더 재미있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독자들이 오지 않을까.”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살짝 감탄했습니다. 확실히 미치오 슈스케는 책이 아니면 구현하기 힘든, 책이라는 형태를 통해서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자적인 기술로 독서를 읽는 행위를 넘어서는 체험으로 확장시켰지요. 때문에 그동안 소설을 읽지 않았다는 이들도 호기심을 느끼고 책을 구매한 것일 테고요.

 


I는 소설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저 같은 경우 뒤에서부터 읽고, 다시 앞에서부터 읽고, 다시 뒤에서부터 읽고, 네 번째로 다시 앞에서부터 읽고 났더니 비로소 복선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책을 만들며 어쩔 수 없이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편집자로서, 재독할 때마다 새로운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 텍스트를 만나면 정말 반갑거든요.

 


제목은 I amI에서 따왔다고 해요. 위아래를 뒤집어도 같은 형태가 되는 알파벳인데, 본문 첫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저자의 말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됩니다.

읽는 순서는 자유지만,

그 선택에 따라 결말은 크게 달라집니다.

 

어떤 장을 먼저 읽으면

두 주인공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습니다.

다른 장을 먼저 읽으면 그들(그녀들)은 살아남습니다.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당신의 선택이 누군가의 생사를 결정합니다.

낙장불입,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일본 놀러 갔다가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독자의 선택이 결말을 바꾼다라는 원서 띠지를 보자마자 계약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본문은 한 글자도 달라지지 않지만, 읽는 순서에 따라 주인공의 생사가 달라지다니 책을 편집하면서, 아아 소설로 이런 걸 할 생각을 잘도 했구나, 작가가 '또라이' 맞네 싶었습니다.



 



내용이 쉽지는 않아요. 그래서 책의 말미에 제법 긴 편집자 후기를 끼적여 두었습니다. 끝까지 전부 읽었는데도 이해가 안 간다는 대목이 궁금해졌을 때 이 후기를, 제갈량이 위급할 때 열어보라고 했던 비단주머니처럼 써먹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이 책은 일부가 거꾸로 인쇄돼 있지만 파본이 아니니까 반품하지 말아주시길.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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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0 이판사판
하야시 마리코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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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키코모리란 ‘히쿠(뒤로 물러나다)’와 '코모루(안에 틀어박히다)'가 합쳐진 말입니다. 1990년대 후반, 기존의 정신질환 진단명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장기 은둔’ 사례가 급증하자 정신과 의사인 사이토 다마키가 이를 사회적 현상으로 정의하고자 출간한 『사회적 히키코모리』에서 처음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이 말은 일본 가시와자키에서 일어난 사건을 계기로 널리 퍼지게 되었지요. 28세 남성 사토가 초등 4학년 소녀를 납치해 10년간 자기 방에 가뒀는데, 사토와 같은 집에 살던 부모는 아들이 무서워 아들 방에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소녀의 존재를 몰랐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들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부모의 신고로 그의 방을 수색하던 중 소녀를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2019년에는 전 농림수산성 차관이 자택에서 장남을 찔러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숨진 아들은 장기간 직업 없이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히키코모리(44세)였으며 부모에게 상습적인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사건 당일, 인근 초등학교 운동회 소음이 시끄럽다며 “아이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화를 내자, 아버지는 주위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아들을 칼로 찔러 살해”하는 선택을 한 뒤에 자수했지요.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는데, 작가 하야시 마리코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찔러 죽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가정 안에서 노골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던 히키코모리 자녀가 사회에까지 피해를 준다면 아직 부모로서의 사랑이 남아 있을 때 함께 죽자, 누군가를 죽이는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 부모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마음이었을까. 나도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편집자와 나누다가 “8050문제를 소설로 써보면 어떨까요?”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냐면 한때 ‘젊은이들의 문제’로만 여겨졌던 히키코모리의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모든 세대의 문제가 되었고 이것이 8050문제로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히키코모리 가정의 분위기가 압도적인 현실감으로 그려집니다. 이 가정의 구성원은 치과의사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대기업에 다니는 딸과 방 안에 틀어박혀 사는 아들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히키코모리를 주제로 한 소설은 결말을 내기가 정말 어려운데, 히키코모리 아들을 외면해 온 아버지가 7년 만에 결심을 굳히고 ‘죽이거나 함께 죽는 것’이 아니라 ‘재판’이라는 수단으로 함께 ‘복수’를 이룬다는 결말은 통쾌한 구석이 있습니다.



소설 『8050』은 발매 1달 만에 10만 부를 돌파하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지금은 어떻게든 가족으로 관계를 간신히 유지하는 중이지만 ‘어쩌면 나도 이런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큰 반향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일본의 히키코모리는 140만 명. 한국의 은둔형 외톨이는 50만 명에 달한다더군요. 제 동생도 그중 한 명입니다. 그래서 소설의 검토를 마치자마자 한국어판을 출간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저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닫힌 방문 너머에서 멈춰버린 자식의 시간, 그 시간을 함께 견디며 늙어가는 부모의 절박한 사투를 그린 이 소설을 한국의 형제자매님들도 함께 읽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랫동안 만들고 싶었던 사회파 소설을 출간하여 기쁜,

삼송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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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세븐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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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식사 구성에 불만을 표현한 입원환자를 직원이 금속파이프로 구타하고, 병문안을 온 지인에게 병원의 현실을 알리려 했던 환자를 폭행하는 바람에 급사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병원은 사건 이전부터 병상보다 많은 환자를 입원시켰고, 치료라는 명목으로 원장 가족의 기업에서 환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했으며, 사망한 환자를 불법으로 해부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애당초 해당 병원의 원장은 내과 의사로서 정신과 의사 경력이 없었지만, 정신과가 다른 진료과에 비해 인건비가 적게 들어 이익률이 좋은 사업이라는 점에 착안, 내과에서 정신과로 변경하여 무자격으로 환자를 진료해 왔습니다. 환자를 구타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상근의는 원장을 포함하여 3명뿐.

 


전화 통화와 면회를 제한함으로써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던 병원 내의 각종 사건들이 세상에 드러난 건 ‘아사히 신문’의 보도 덕분이었습니다. 일본 도치기 현 우쓰노미야 시의 ‘우쓰노미야 병원’에서 발생한 정신과 환자 린치 치사 및 무자격 진료 사건은 일본 의료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권 침해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레벨 7’이라는 제목 때문에 게임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라 짐작하기 쉽지만 『레벨 7』은 위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사회파 미스터리입니다. 그것도 선악의 구도가 분명한 작품이지요. 미야베 미유키 작가는 현대물에서든 시대물에서든 등장인물을 선악으로 구별하는 것을 피해 왔다고 할까, 명백하게 나쁜 놈을 작품 속에 등장시키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한데 『레벨 7』의 세계관은 왜 달랐을까요. 이 작품을 집필할 당시 일본에서 출간된 미스터리들 가운데 ‘불행한 성장 과정이 범행의 원인이었다’라는 식으로 범인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작품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유도 모른 채 미움받는 놈이 되는 인간도 있다잔뜩 있다마치 제비뽑기에서 꽝을 뽑는 사람 쪽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처럼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모두 바보 취급당했으니까라면서 살인을 저지를까말도 안 된다결국은 전부 변명이다.”




『레벨 7』은 전화 상담원 신교지가 “레벨 7까지 가 본다, 돌아올 수 없을까”라는 말을 남긴 채 실종된 고교생 미사오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말에서 ‘레벨 7’은 ‘망각’을 의미하는 키워드이며, 미사오가 왜 굳이 ‘레벨 7까지 가보려 했는지’를 추적하는 신교지는 미야베 미유키 소설 특유의 허술한 탐정(스기무라 사부로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지요.



하드보일드 소설에서는 거액의 돈과 함께 사라진 인물을 추적하는 탐정이 직접 발로 뛰며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도시 뒤편의 부패한 권력과 도덕적 타락을 목격하지만 사회의 근본적인 부패는 해결되지 않은 채 주인공이 씁쓸함을 느끼며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죠. 『레벨 7』에서 신교지의 행동 패턴은 하드보일드 소설의 주인공이 선택하는 전형적인 형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레벨 7』을 리뉴얼해서 재출간하자고 생각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이 소설은 출간 당시 게임을 기반으로 한 소설로 인식되어 판매가 부진했습니다. 제목 때문이겠지요. 한데 곧 한국어판 계약이 만료되거든요.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절판시키든지, 아니면 비용을 지불하고 재계약을 하든지. 원래는 절판시킬 작정이었어요. 그리하여 절판을 앞두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읽어보았습니다. 시작부터 긴장감이 감돌아 페이지를 넘기는 손을 멈출 수 없더군요. 과장이 아닙니다. 마치 기억을 잃은 소설 속 주인공처럼, 과거에 제 손으로 만들었던 이 작품의 줄거리가 전혀 기억나지 않아서 신작을 읽는 기분으로 라스트 신까지 단숨에 도달했습니다.



걸작이란 이런 것이구나. 시간이 지나도 전혀 색이 바래거나 퇴색하지 않는구나. 읽기를 마친 후에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아직 미야베 미유키를 읽지 않은 분들이 꼭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절판 대신 재계약을 택했습니다. 기존에 상하권이었던 판본은 합본으로 바꾸며 판형을 다시 짜고 문장도 손을 보았습니다. 게임적 느낌이 조금이나마 지워지도록 제목은 『레벨 7』 을 『레벨 세븐』으로 바꿨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하는 내내 얼마나 즐겁던지. 봄이 도래하여 옷장에 처박혀 있던 봄옷을 꺼내 입었는데 안주머니에서 잊어버리고 있던 비상금을 발견한 기분이라고 할까. 이 비상금이 유용하게 쓰일지 허투루 쓰일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를.



꽃 피는 봄을 맞이하며,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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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의 대여 서점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 2
다카세 노이치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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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고 빽 없고 재능 없고 부모도 없이 유곽에서 외롭게 자란 츠타야 주자부로가 어떻게 에도 출판계를 주름잡으며 미디어의 왕이 되었는지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린 드라마 <베라보>. 작년 NHK에서 방영하여 큰 화제가 되었지요.

 

츠타야는 무명의 호쿠사이, 산토 교덴, 교쿠테이 바킨을 발굴하고, 일본사 최대의 수수께끼 중 하나인 '도슈사이 샤라쿠'를 세상에 알린 천재 기획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의 유명 서점 츠타야는 바로 선구적 출판업자였던 츠타야 주자부로의 이름을 빌려서 만든 플랫폼입니다.

 

츠타야 주자부로는 1773년 요시와라 유곽에 서점(세책점)을 내고 책 대여를 시작하지요. 세책점이란, 요금을 받고 원하는 사람들에게 책을 빌려주는 장사를 말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책 대여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책이 비싸서 쉽게 구입하기 힘들었던 에도 시대에는 대여료를 받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많았습니다. 츠타야 주자부로도 살짝 등장하는 <센의 대여서점>은 세책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각종 출판 미스터리를 주인공 센이 해결해 가는 비블리오 소설입니다.

 

다카세 노이치 작가는 센의 이야기를 쓰기 전까지 시대소설을 한 번도 써보지 않았다더군요. 그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출산이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정규직으로 일할 엄두는 나지 않아서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시작했는데 2시간짜리 알바 자리도 구할 수가 없었어요. 이유를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전부 아이가 있어서 곤란하네요였다고…….

 

화가 나서 되갚아주고 싶은 마음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무너진 자존감과 생계의 위협 속에서 인간 사냥에 나서는, 영화로 치면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 같은 분위기의 현대물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둡고 재미없는 소설을 4년쯤 썼더니 화가 줄어들었다네요.

 

그때부터 소설을 쓰는 일이 즐거워져서 문학상에 도전해보기로 했답니다. 목표는 올 요미모노 신인상. 가장 빠르고 확실한 데뷔코스지요. 올 요미모노 신인상은 문예춘추(나오키 상과 아쿠타가와 상도 문예춘추가 만든 문학상)가 발행하는 월간지 올 요미모노에서 주관하는 신인 작가상입니다.

 

유명 작가들을 다수 배출한 바 있지요. 미야베 미유키 작가도 세 번의 도전 끝에 올 요미모노 신인상을 받으며 데뷔했습니다. 다카노 씨의 경우는 네 번 낙방했는데 그때까지 쓰던 연애 소설을 접고 과감하게 시대소설로 항적을 전환하여 마침내 다섯 번째 투고 때 상을 받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제100회를 맞은 문학상의 수상자가 되었으니 여러 차례 낙방한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한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가의 심사평이 재미있습니다.

 

"딱 떨어지는 제100회를 맞아다음 회부터 응모 요강이 바뀌는 올 요미모노 신인상수상작은 경사스럽게도 만장일치로 결정됐다소설의 주인공은 혼자서 대여서점을 운영하는 <>. 책을 매우 좋아하고지기 싫어하는 성격에열심히 일하는 처자다고객의 희망에 부응하려고 애쓰다 보니 막부가 금지한 책도 자기 손으로 완성하고 싶어 한다읽으면서 응원하고 싶어지는 주인공(특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이다."


 

이야기의 세계를 사랑하는 독자들을 위한 시대+미스터리+비블리오 소설이에요. 간세이 개혁으로 언론과 출판을 통제하던 시기, 사람들에게 지식과 오락을 전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동분서주하는 센의 활약을 눈여겨봐 주시길.

 

)

<센의 대여 서점>을 쓴 작가의 인터뷰 중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엄마가 소설을 써서 큰 상을 받고 뉴스에 등장했지만 집 안에서는 누구 하나 아는 척도 하지 않은 모양이에요. 한데 이후로 눈물 사탕(なみだあめ)이 나왔을 때는 상황이 좀 달라졌답니다. 눈물 사탕은 여러 작가들이 함께 집필한 앤솔러지인데 그들 중 한 명이 미야베 미유키 작가였거든요. “지금까지 내가 소설을 썼다고 해도 가족 중 누구 하나 관심이 없었는데, 앤솔러지에 미야베 미유키 씨와 함께 실리자, ‘잠깐, 엄마, 미야베 미유키랑 같은 책에 이름이 실렸어? 대박!’이라며 놀라더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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