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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 레이디가가
아라키 아카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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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미스터리 소설들은 일반적으로 밀실이나 외딴섬 같은 클로즈드 서클(Closed Circle)에서 예상하기 힘든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비범한 재능을 지닌 탐정이 해결한다는 패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인간의 죽음을 수수께끼풀이 게임으로 만들어 독해 작업에 열중시킨 이 장르를 ‘본격’이라는 말로 정의한 사람은 소설가 고가 사부로였는데 본격 미스터리에서는 마지막에 의표를 찔러 놀라게 할수록 좋은 평가를 받았지요. 하지만 반전을 위해 작가들이 무리한 설정을 남발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현실과 양립하기 어려운 트릭의 틀을 벗어나 리얼리티를 부여하고자 했던 시도로서 미국에서는 레이먼드 챈들러로 대표되는 하드보일드가, 일본에서는 마쓰모토 세이초가 기틀을 세운 사회파 미스터리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국적이나 활동한 시기로 볼 때 챈들러와 세이초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쳤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겠죠. 다만 이들의 작품은 선배 세대의 기류를 거부하려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코난 도일과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들은 기교에 치우쳐 있고 엘리트주의적이라는 것이 챈들러의 불만이었어요. 세이초는 독자를 상대로 한 퍼즐 같은 유희로 전락해 버린 본격 미스터리에 진저리가 난다고 적었지요. 그가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을 출발점으로 삼아 범죄가 일어나게 된 사회적 동기를 추적해 가는 사회파 미스터리의 시초가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본격 미스터리와 사회파 미스터리는 서로 경쟁하는 동시에 협력하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시마다 소지의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는 본격 미스터리지만 전후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사회파적 요소를 차용했고, 미야베 미유키의 『가모 저택 사건』은 사회파 미스터리지만 밀실 트릭을 사용한 바 있지요. 이후 새로운 감각으로 무장한 작가들이 하나둘 등장하며 장르의 경계도 점차 옅어져 갑니다.



와중에 역대 최연소(23세) 심사위원(아야츠지 유키토, 아라이 모토코, 고교쿠 나쓰히코, 시바타 요시키) 만장일치로 에도가와 란포 상을 거머쥐며 초신성처럼 등장한 작가 아라키 아키네는, 역대급 데뷔작에 이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지금껏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형태의 차기작을 발표합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막_본격 미스터리. 무인도에서 벌어진 밀실 살인, 범인 불명. 전부 죽였다는 누명을 쓰기 전 진범을 밝혀야 하는 남자의 추리극.


2막_사회파 미스터리. 대도시에서 발생한 토막 살인, 동기 불명. 다음 표적으로 살해당하기 전 범인의 동기를 찾는 여자의 수사극. 



소설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은 전혀 다른 형태의 1막과 2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간도, 배경도, 등장인물도, 분위기도, 범행 수법 외에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두 이야기가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 진실이 드러난다는 설정의 소설로, 지금껏 시도되지 않은 참신한 구성이라 하겠습니다. 일본 원서의 띠지에는 “MZ세대 애거사 크리스티가 그리는 슬픈 연쇄 살인”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왜 이런 카피를 사용했느냐. 무인도에서 벌어진 밀실 살인에 관해 읽고 있노라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명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가, 대도시에서 발생한 토막 살인에 관해 읽고 있노라면 그녀가 남긴 걸작 『ABC 살인 사건』이 자연스레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은 이렇듯 고전 미스터리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사회를 뒤덮고 있는 남성우월주의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파고들었는데 2023년 9월 23일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라카 아카네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을 오마주한 본격 미스터리적 설정을 기본 전제로 하고 사회파 미스터리적인 재미를 추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ABC 살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 또 하나 염두에 두었던 대목은 작가 생활 내내 계속 쓰고 싶은 주제인 시스터후드에 관해서다. 미스터리 작품 중에는 아직 여자 주인공 콤비가 상대적으로 적다. 명탐정은 아직 대부분 남자들이다. 서로 도우며 생동감 있게 활약하는 여성 캐릭터들을 그려보고 싶었다. 여성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내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되기 전까지의 나는 사회생활을 하며 닳아 없어진 부분이 많았는데, 그 부분을 채워준 것이 시스터후드 소설들이었다. 내가 처한 상황이나 그동안 왠지 모르게 힘들다고 느꼈던 것들에 이름을 붙여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작가가 된 이후에 여성이 활약하는 본격 미스터리 작품으로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막의 테마는 복수. 외딴섬의 해상 코티지에 놀러 온 일곱 남녀 중 한 명인 히토가 ‘선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행들을 모두 죽일 작정으로 비소를 몰래 들여오지요. 5일 후 배를 태워줄 사람이 오기 전에 ‘유서라는 이름의 범행 진술서’가 업로드될 수 있도록 준비도 해두었습니다. 이렇게 한 뒤에 자살해 버리면 복수의 연쇄를 끊고 그들의 죄도 공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말이죠. 한데 과연 그럴까요. 계획을 실행할 즈음에 이르러 그 살의는 무뎌지기 시작합니다. 이들이 죽임을 당할 만큼 끔찍한 인간들인가. 망설이는 가운데 한 사람이 혀가 잘린 시체로 발견되지요. 그리고 연이어 일어나는 제2, 제3의 살인. 살해되는 사람은 반드시 ‘직전 살인의 첫 번째 발견자’였고 시신의 ‘혀’가 잘려 나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2막의 테마는 시스터후드. 1막의 사건으로부터 3년 후. 전혀 무관해 보이는 세 명의 남녀가 연달아 살해당하고 우연히 ‘세 번째 최초 발견자’가 된 청소부 마리아를 형사 이쿠코가 경호하게 되지요. 한데 유능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경찰 내부에서 평가가 낮은 이쿠코의 상황에 마리아가 분노하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고향 아마쿠사에서 일어난 사건과의 연관성을 찾아 나선 마리아와 이쿠코는 점차 직무를 넘어선 신뢰 관계를 쌓아나가지요. 1막에서는 수수께끼 풀이에 집중했다면 2막에서는 끔찍한 사건 뒤에 숨겨진 인간 드라마를 따라갑니다. 부모와 형제, 고향과 학교의 선후배 등 다양한 인간관계의 사슬에 묶여 움직일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서라도 그 사슬을 끊어야만 하는가. 마리아가 수수께끼를 풀면서 알게 된 사실 가운데 하나는 마음을 맞대면 온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복수는 어쩌면 남성우월주의적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좋게 여기고, 힘을 보여줘야만 남자답다는 식의 가치관이 복수의 근저에 깔려 있는데, 그 해악을 들여다보고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은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복수를 통해 그려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남성중심적 사회에 지쳐 가족들과도 떨어져 살기로 한 그녀들이, 이걸로 괜찮겠지, 지금은 이게 최선이지, 라고 자위하면서도 서로에게 말을 걸고 연대하는 모습을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에서 그려 보았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애정을 이유로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 건 아니라는 부분을 여러 조합으로 써보고 싶었어요. 애정도 때로는 해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전근대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부모나 상사 등 지위나 권한이 높은 사람의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애정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는 그녀들 같은 탐정 역할이 적합하다고 생각했죠.”



사실 보호한다는 행위에도 상대를 소유물로 여기는 지배욕이나 상하관계가 느껴져 전적으로 긍정하기 어렵다고, 1998년생, 이제 27살인 작가 아라키 아키네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속에도 폭력성이 숨어 있는 이상,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맺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쩌면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에는 그 균형의 어려움(끊어진 사슬)과 그럼에도 사람을 믿고 싶다는 저자의 희망(빛의 조각)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7살의 나는 오로지 여자랑 관계 한번 맺어 보겠다고 밤낮 없이 애쓰는 삶을 살았는데(한숨), 27살의 아라키 아키네는 이렇게 통찰력 있는 소설을 써냈구나 싶어서 무척 부끄러워진 한편으로 데뷔작 『세상 끝의 살인』과 『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에 이어 앞으로도 계속 이 작가의 작품을 한국에 소개하고 싶다고 생각한,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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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크라임 이판사판
덴도 아라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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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잠자는데 불을 켜서

2) 텔레비전 전원을 끄지 않아서

3) 휴대전화 잠금을 풀어주지 않아서

4) 맞아야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

 

지난해에만 최소 138명의 여성이 남편이나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살인미수까지 포함하면 568. 공식적으로 신고한 수치가 이 정도니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들은 왜 아내와 여자친구를 죽이거나 죽이려 했을까. 체포된 남자들이 경찰서에서 자백한 이유는 위와 같습니다. 잠자는 데 불을 켜서...

 

그들은, 자신이 남자라는 이유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당연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누리지 못했다 여겼을 때 여성을 때리고 죽였습니다. 그들의 막무가내식 보복은 마치 천부인권을 행사하듯 약하고 만만한 여성을 상대로 너무도 쉽게 자행되었지요.

 

오랫동안 가정에는 폭력이 없을 것이라는, 가정은 휴식처라는 이데올로기와 맞서며 결국 여성이나 아이처럼 가족 안에서도 입장이 약한 사람에게 괴로움만 강요해 가는 꼴이 되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킬 뿐이라 주장해 왔던 작가 덴도 아라타가 이 소설 젠더 크라임을 쓴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일본에서 덴도 아라타가 주목받은 것은 1996. 그 해에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이후 과작임에도 발표하는 소설마다 평단의 찬사와 함께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지요. 무척이나 예리한 감각으로 세부를 들여다볼 줄 아는 작가라는 것이, 제가 덴도 아라타로부터 받은 첫 번째 인상이었습니다.

 

학교 폭력, 성범죄, 아동학대와 같은 사회 문제는 그 배경에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고 그것은 어느 나라 어느 사회나 다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전적으로 가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며 결국 가족이 화목해지면 만사오케이일 거라는 식의 암묵적인 동의가 당시 일본 사회에 만연해 있었던 모양입니다.

 

괜찮아, 어쨌든 가족이니까, 아버지를 중심으로 질서가 잡히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여기저기 엇나가지만 않으면 평화롭고 안전해……, 와 같은 말만으로는, 결국 여성이나 아이처럼 가족 안에서도 입장이 약한 사람에게 괴로움만 강요해 가는 꼴이 되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킬 뿐이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덴도 아라타는 말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피해자의 위치에 서서 예리한 감각으로 글을 써내려 갑니다. 예컨대 일본 문단 최대의 사건으로까지 불린 영원의 아이는 학대를 받아 깊은 상처를 입고, 자신을 최초부터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아이들이 주인공입니다. 작가는 열두 살 소녀에게 가해진 폭력과 같은 또래 두 소년이 겪어야 했던 학대를 추체험하는 정신적 작업을 3년에 걸쳐 지속했는데 훗날 솔직히 내가 죽는 게 먼저인가, 이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는 게 먼저인가,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술회한 바 있어요.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전국을 떠도는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 애도하는 사람의 경우, 주인공 시즈토의 어머니가 암에 걸렸는데 그녀의 내면을 쓸 때는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다더군요. “그랬더니 실제로 배가 콕콕 쑤시고 아팠다. 큰일이다, 진짜 암에 걸렸나 보다, 라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두려웠다고 합니다.

 

덴도 아라타가 사회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남녀 차별과, 성차를 둘러싼 암묵적 양해 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25년 전. 영원의 아이에서 아동학대를 소재로 글을 쓰던 중에, 사람을 학대하는 행위의 배후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서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젠더 문제에 대해 말해도 전달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고 언어화할 만큼의 기술도 없었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던 모양이에요. 그 뒤로 꾸준히 젠더에 관한 책을 읽었고 어느 순간 갑자기 톱니바퀴가 돌아가더니 남성적 사고방식이 짙게 배어 있는 경찰 조직을 무대로 성범죄에 맞서는 작품의 얼개가 떠올랐다네요.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불법 촬영, 동의 없는 성행위, 전 연인의 스토커 행위, 불특정 여성을 노린 범죄를 수사하던 경시청의 마초경찰관이 성차가 만들어내는 세상의 불균형과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차별을 하나씩 발견해 간다는 내용입니다.


이 경찰관과 함께 스스로의 관점도 바뀌었다는 작가 덴도 아라타는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여러 번 공고한 벽에 부딪쳤지만, 그때마다 세계는 한 번에 바뀌지 않으니까 작은 것부터 하나씩 바꾸자고 다짐했다더군요. 세계를 바꾸기는커녕 제 앞가림하기에 바쁜 저도 이 소설을 읽고 다짐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동의 없이 타인의 몸을 만지지 말고 성적인 말로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말자. 그리고, 죽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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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왕의 방패 - 제166회 나오키 상 수상작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 1
이마무라 쇼고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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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소설을 4일 만에 탈고하여 유명 문학상을 받더니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이후에는 각종 잡지와 신문에

무려 8편의 소설을 동시에 연재하며 

최근 일본 문단의 뉴스메이커로 떠오른 이마무라 쇼고.


<새왕의 방패>로 나오키 상을 받을 때는

시상식장에서 흥미로운 기획을 발표했다.

전국의 동네 서점을 응원하고 싶다는 마음을 담은

이 기획의 이름은 ‘이마무라 쇼고의 축제 여행!’



대관절 ‘이마무라 쇼고의 축제 여행’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나오키 상을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서점에서 <새왕의 방패>를 열심히 팔아주었기 때문이다.

작가로서 그 서점들에 어떻게든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대체로 작가의 서점 방문은 도쿄 같은 대도시나

지방에 가더라도 몇 군데에만 한정해서 들릴 뿐이다.

하지만 출판 불황임에도 여전히 분투하고 있는

시골의 작은 서점들에도 꼭 방문하고 싶다.


​그리하여, 118박 119일 동안 한 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중고 봉고차를 마련하여 거기서 먹고 자고 글을 쓰면서,

전국 구석구석을 돌며 300군데 서점에서 이벤트를 벌였다.

30군데가 아니라, 300군데다.

그중에는 야마구치 현의 12제곱미터로 자그마한,

전파상을 함께 하는 작은 서점도 있었다.

이벤트에 쓰인 비용은 전부, 작가가 자비로 부담했다.


다음은 길었던 축제 여행을 마친 후 기자와의 일문일답.


1) 118박 119일의 여행이 끝났다, 지금 기분은?

“울 것 같다. 책의 세계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작가로서 엄청난 에너지를 받을 수 있었다.”


2) 전부 자비였는데 비용이 꽤 들었을 것 같다.

“자동차 ‘타비마루 호’의 구입비, 함께한 스태프 2명의 급여,

각종 이벤트를 할 때 쓴 부대비용까지

이벤트를 하는 지난 4개월 동안 9,000만원 가까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받았던 것을 돌려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3) 왜 지금 이런 이벤트를 기획했나.

“하고 싶었으니까.

만약 내가 20년 후에 나오키 상을 탔으면

체력이 달려서 전국을 돌아다니는 게 무리였겠지만(웃음)

팔팔한 지금이라면 할 수 있겠다 싶었기 때문에 한 거다.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출판업계의 분위기를

축제처럼 북돋우고 싶었다.”


그래서 이름이 ‘이마무라 쇼고의 축제 여행’이었던 거다.

이런 아이디어와 추진력을 갖추고 있었으니 

‘그동안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 소재의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 

역사미스터리 소설 <새왕의 방패>로 나오키 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 


여행하는 동안 침대였다가 식당이었다가 집필실이기도 했던

자동차 ‘타비마루 호’의 외관에는 300군데 서점에서 만난

서점 직원과 독자 들의 쓴 응원의 메시지가 적혀 있다.

실로 의미 있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행사 후에는

<새왕의 방패>의 무대인 오쓰 시에 기증했다고 한다.


덧)

사진은 서점 직원과 독자들의 메시지가 담긴 타비마루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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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복간할 결심 1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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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원이라고 아시는지. 지금도 시도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마케팅으로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단행본 출간을 자랑하던 곳이다. 출판사 이름을 모르더라도 내 또래 형제자매님들이라면 <영웅문>이나 <우담바라>, <라마와의 랑데뷰>, <먼나라 이웃나라>, “백 년도 못 살면서 천 년의 걱정을 하는구나라는 TV 광고로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고려원에서 나온 책은 우리 집에도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중 <유니스의 비밀>이라는 추리소설도 있었다. 어떻게 이 책을 입수했는지 경위는 정확하지 않지만 두 가지는 아직도 머릿속에 확실히 새겨져 있다. 하나는 정가가 3,000원이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대학교 2학년 때까지 주구장천 읽었던 수많은 추리소설 중에서도 단연 넘버 원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북스피어 출판사를 차리고 가장 먼저 들여다 본 목록 가운데 하나가 망한 고려원에서 출간한 추리소설들이었다. 당연히 <유니스의 비밀>은 출간 1순위였다. 나는 이 작품을 계약하고 소설가 장정일 씨에게 어렵게 부탁하여 발문까지 받아서 출간했다. 제목은 오랜 고민 끝에 <활자잔혹극>으로 바꾸었다.

 


<활자잔혹극>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안 팔릴 수가 있나 싶을 만큼 안 팔렸다. 왜지. 마케팅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북스피어가 듣보잡이라서? 고려원에서 한 번 나왔기 때문에? 대체 왜 이 책을 몰라주는지. 5년 뒤에는 원작자와의 계약만료로 절판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창고에 쌓인 책들을 폐기처분할 때는 정말 눈물 나더라.

 


한데 2022519일자 <조선일보>에서 물리학자가 추천한 혐오를 이기는 책으로 김상욱 교수가 <활자잔혹극>을 소개하며 문의가 쇄도하기 시작한 거다. 이럴 수가(털썩). 전화가 올 때마다 정수리 쪽 머리카락이 쑥쑥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팔자구나!’ 생각하며 계약이 종료된 책이라 출판사에도 책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활자잔혹극>은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누가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를 처음부터 대차게 밝혀버렸다. 살인의 동기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범인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기 때문에, 즉 자신이 문맹임을 감추기 위해 한 가족을 무참히 살해했다. 문맹이란 그토록 부끄러운 일인가? 사람을 죽일 만큼?


 

이 대목을 김상욱 교수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문맹이 거의 없어서 이 상황을 생각하기 어려우실 수 있는데, 이렇게 가정해 볼까요. 내가 영어를 잘 못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영어로 이야기하는 파티에 갔어요.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당신은 궤변 같은 첫 문장을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혐오의 시대를 극복하는 지혜도 얻게 될 겁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복간할 결심을 하진 못했다. 이미 한 번 복간했다가 홀랑 망했기 때문에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런데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절판으로 걸려 있던 <활자잔혹극>응원 댓글란에 누군가 올린 이런 글을 올해 초에 읽게 되었다. “김상욱 교수님이 추천해서 읽었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소장하고 싶습니다! 중고가 3만원에 돌아다녀요ㅠㅠ


 

이유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어째서인지 이 말이 내 안에 남아 있던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래서 저자와 다시 계약한 뒤에 번역을 다듬고 디자인도 새롭게 했다. 물론 이 사달이 난 것은 전부 김상욱 선생님 때문이니까 책임지셔야 한다고 협박(?)하여 엄청나게 바쁜 김상욱 교수의 추천사도 받아냈다.

 


아아 그리하여 10년 만에 다시 펴냅니다. 영국의 거장 루스 렌들의 걸작 장편,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추리소설 <활자잔혹극>, 북스피어의 복간할 결심시리즈 제1권입니다. 이번에도 안 팔리면, 이후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저도 모르겠으니까 알아서들 하십쇼.


 

두 번이나 복간했으면 한 권 정도는 사주는 것이 강호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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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도쿄 사기꾼들 (체험판)
신조 고 / 북스피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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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근처 유흥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송인서적의 부도로 새해 벽두부터 출판계가 패닉에 빠졌던 그해, 북스피어도 1억 (휴지조각이 된 어음까지 합치면 2억) 넘게 물려서 인쇄비라도 벌 요량으로 시작했던 일이다. 업무는 단순했다. 거나하게 취한 손님이 나오면 인근의 호텔로 데려다 주거나, 인사불성인 손님 차를 몰고 집까지 운전하거나. 하룻밤에 대여섯 군데 업소에서 일거리를 받았다.

거기에, 내가 늘 신비롭다고 생각하던 업소 사장이 있었다. 한때의 류승룡 씨처럼 긴 머리에 롱코트 차림으로 살짝 기인 같다고 할까. 왜 그런 사람 있잖습니까, 잡기에 능하고 달변이며 엄청나게 많이 읽었구나 싶은 아우라가 온몸에서 느껴지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같은 데 나가더라도 뭐든 똑 부러지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새벽까지 차에서 대기하던 나에게 그는 가끔 도넛을 건네곤 했다. 도넛을 무슨 상비약처럼 들고 다녔다. 궁금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항상 도넛을 먹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도넛을 밥보다 좋아하거든. 좋아하는 것을 먹었을 때 정말 맛있다면 판단력이 정상이라는 얘기지.” 반대로 도넛을 먹었는데 맛이 없을 때는 심신이 약해져 판단력이 저하돼 있다는 증거이므로 중요한 사업적 결정을 미룬다고 한다. 아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신박하네. 이후로 나는 그를 도넛 사장이라고 (속으로만) 불렀다.

한번은 업소 앞에서 진상손님과 종업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 적이 있다. 처음에는 말싸움으로 끝나는가 싶었지만 급기야 손찌검까지 하는 걸 보고 나도 놀라서 달려갔다. 당시 대리기사들에게는 업소와의 연락용으로 작은 무전기가 하나씩 지급됐는데 그걸 바디캠인 척하고 “손님, 방금 폭행하신 거 바디캠에 다 녹화됐어요. 어떻게, 바로 경찰서 가실래요, 그냥 집에 가실래요” 했더니 두말없이 돌아가더라.

도넛 사장이 그걸 좋게 본 모양이다. 6개월 아르바이트로 책 한권 인쇄할 비용 정도는 벌었다 싶어서 그만두려는데 사장이 대뜸 물었다. “너, 큰돈 벌어볼래?” 에? 큰돈이라니. 어떻게. 그의 말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한국처럼 부동산에 미쳐 있는 나라도 없다. 이를 일찌감치 깨달은 도넛 사장은 부동산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강남역 업소는 그냥 재미 삼아 부업으로 운영하는 거라면서.

실제로 도넛 사장은 부동산 등기법, 택지건물거래업법, 도시계획법 등 부동산 거래 법령은 물론이고 자치체 조례에도 정통하며 형법이나 형사소송법 조문과 판례를 술술 암송할 정도였다. 게다가 헤겔이나 마르크스 같은 고전의 구절을 인용하며 도도하게 지론을 펴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너 소설 쓰고 싶댔지. 나랑 일하면 듣도 보도 못한 경험을 할 수 있는데. 마침 나도 너처럼 순진하게 생긴 뉴페이스가 필요했고.”

그 말에 솔깃해진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그를 따라 조직에 들어갔다. 아니, 조직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다. 팀이라고 할까.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팀이었다. 정보를 수집하고 타깃을 물색하는 도면사, 소유자를 사칭할 배우를 고르고 교육시키는 수배사, 서류와 인감을 만드는 위조사, 돈 세탁 전문가, 그리고 이들을 지휘하여 최종 계획을 수립하는 지면사까지.

대관절 그들은 어떻게 부동산으로 큰돈을 벌어들이는가. 이것이, 본격 부동산 사기 미스터리 소설 『도쿄 사기꾼들』의 내용입니다. 뭐야, 책 선전인가,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을 형제자매님. 말도 마십쇼(한숨). 부동산 사기 치는 이야기를 이렇게 박진감 넘치게 쓸 수 있는 겁니까. 농담 아니라 진짜 숨도 못 쉬고 읽었습니다. 사기 치는 걸 바로 옆에서 몰래 엿보는 느낌이었어요. 들킬까봐 조마조마. 이런 걸 전문용어로 후달린다고 하던가.

에... 또... 그래서 말인데, 앞부분 한 챕터만 읽어보면 어떻겠습니까. 10분이면 읽을 수 있어요. 한 챕터 봤는데 별로더라, 그럼 저도 포기하겠습니다. 이 체험판을 한번만 거들떠봐 주시길.

소설 만들며 이것저것 공부하다가 부동산 사기 전문가로 거듭난,
삼송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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