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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복간할 결심 1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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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원이라고 아시는지. 지금도 시도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마케팅으로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단행본 출간을 자랑하던 곳이다. 출판사 이름을 모르더라도 내 또래 형제자매님들이라면 <영웅문>이나 <우담바라>, <라마와의 랑데뷰>, <먼나라 이웃나라>, “백 년도 못 살면서 천 년의 걱정을 하는구나라는 TV 광고로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고려원에서 나온 책은 우리 집에도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중 <유니스의 비밀>이라는 추리소설도 있었다. 어떻게 이 책을 입수했는지 경위는 정확하지 않지만 두 가지는 아직도 머릿속에 확실히 새겨져 있다. 하나는 정가가 3,000원이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대학교 2학년 때까지 주구장천 읽었던 수많은 추리소설 중에서도 단연 넘버 원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북스피어 출판사를 차리고 가장 먼저 들여다 본 목록 가운데 하나가 망한 고려원에서 출간한 추리소설들이었다. 당연히 <유니스의 비밀>은 출간 1순위였다. 나는 이 작품을 계약하고 소설가 장정일 씨에게 어렵게 부탁하여 발문까지 받아서 출간했다. 제목은 오랜 고민 끝에 <활자잔혹극>으로 바꾸었다.

 


<활자잔혹극>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안 팔릴 수가 있나 싶을 만큼 안 팔렸다. 왜지. 마케팅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북스피어가 듣보잡이라서? 고려원에서 한 번 나왔기 때문에? 대체 왜 이 책을 몰라주는지. 5년 뒤에는 원작자와의 계약만료로 절판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창고에 쌓인 책들을 폐기처분할 때는 정말 눈물 나더라.

 


한데 2022519일자 <조선일보>에서 물리학자가 추천한 혐오를 이기는 책으로 김상욱 교수가 <활자잔혹극>을 소개하며 문의가 쇄도하기 시작한 거다. 이럴 수가(털썩). 전화가 올 때마다 정수리 쪽 머리카락이 쑥쑥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팔자구나!’ 생각하며 계약이 종료된 책이라 출판사에도 책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활자잔혹극>은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도발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누가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를 처음부터 대차게 밝혀버렸다. 살인의 동기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범인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기 때문에, 즉 자신이 문맹임을 감추기 위해 한 가족을 무참히 살해했다. 문맹이란 그토록 부끄러운 일인가? 사람을 죽일 만큼?


 

이 대목을 김상욱 교수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문맹이 거의 없어서 이 상황을 생각하기 어려우실 수 있는데, 이렇게 가정해 볼까요. 내가 영어를 잘 못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영어로 이야기하는 파티에 갔어요.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당신은 궤변 같은 첫 문장을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혐오의 시대를 극복하는 지혜도 얻게 될 겁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복간할 결심을 하진 못했다. 이미 한 번 복간했다가 홀랑 망했기 때문에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런데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절판으로 걸려 있던 <활자잔혹극>응원 댓글란에 누군가 올린 이런 글을 올해 초에 읽게 되었다. “김상욱 교수님이 추천해서 읽었는데 너무 재밌더라고요! 소장하고 싶습니다! 중고가 3만원에 돌아다녀요ㅠㅠ


 

이유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어째서인지 이 말이 내 안에 남아 있던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래서 저자와 다시 계약한 뒤에 번역을 다듬고 디자인도 새롭게 했다. 물론 이 사달이 난 것은 전부 김상욱 선생님 때문이니까 책임지셔야 한다고 협박(?)하여 엄청나게 바쁜 김상욱 교수의 추천사도 받아냈다.

 


아아 그리하여 10년 만에 다시 펴냅니다. 영국의 거장 루스 렌들의 걸작 장편,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추리소설 <활자잔혹극>, 북스피어의 복간할 결심시리즈 제1권입니다. 이번에도 안 팔리면, 이후로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저도 모르겠으니까 알아서들 하십쇼.


 

두 번이나 복간했으면 한 권 정도는 사주는 것이 강호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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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도쿄 사기꾼들 (체험판)
신조 고 / 북스피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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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근처 유흥업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송인서적의 부도로 새해 벽두부터 출판계가 패닉에 빠졌던 그해, 북스피어도 1억 (휴지조각이 된 어음까지 합치면 2억) 넘게 물려서 인쇄비라도 벌 요량으로 시작했던 일이다. 업무는 단순했다. 거나하게 취한 손님이 나오면 인근의 호텔로 데려다 주거나, 인사불성인 손님 차를 몰고 집까지 운전하거나. 하룻밤에 대여섯 군데 업소에서 일거리를 받았다.

거기에, 내가 늘 신비롭다고 생각하던 업소 사장이 있었다. 한때의 류승룡 씨처럼 긴 머리에 롱코트 차림으로 살짝 기인 같다고 할까. 왜 그런 사람 있잖습니까, 잡기에 능하고 달변이며 엄청나게 많이 읽었구나 싶은 아우라가 온몸에서 느껴지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같은 데 나가더라도 뭐든 똑 부러지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새벽까지 차에서 대기하던 나에게 그는 가끔 도넛을 건네곤 했다. 도넛을 무슨 상비약처럼 들고 다녔다. 궁금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항상 도넛을 먹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도넛을 밥보다 좋아하거든. 좋아하는 것을 먹었을 때 정말 맛있다면 판단력이 정상이라는 얘기지.” 반대로 도넛을 먹었는데 맛이 없을 때는 심신이 약해져 판단력이 저하돼 있다는 증거이므로 중요한 사업적 결정을 미룬다고 한다. 아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신박하네. 이후로 나는 그를 도넛 사장이라고 (속으로만) 불렀다.

한번은 업소 앞에서 진상손님과 종업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 적이 있다. 처음에는 말싸움으로 끝나는가 싶었지만 급기야 손찌검까지 하는 걸 보고 나도 놀라서 달려갔다. 당시 대리기사들에게는 업소와의 연락용으로 작은 무전기가 하나씩 지급됐는데 그걸 바디캠인 척하고 “손님, 방금 폭행하신 거 바디캠에 다 녹화됐어요. 어떻게, 바로 경찰서 가실래요, 그냥 집에 가실래요” 했더니 두말없이 돌아가더라.

도넛 사장이 그걸 좋게 본 모양이다. 6개월 아르바이트로 책 한권 인쇄할 비용 정도는 벌었다 싶어서 그만두려는데 사장이 대뜸 물었다. “너, 큰돈 벌어볼래?” 에? 큰돈이라니. 어떻게. 그의 말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한국처럼 부동산에 미쳐 있는 나라도 없다. 이를 일찌감치 깨달은 도넛 사장은 부동산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강남역 업소는 그냥 재미 삼아 부업으로 운영하는 거라면서.

실제로 도넛 사장은 부동산 등기법, 택지건물거래업법, 도시계획법 등 부동산 거래 법령은 물론이고 자치체 조례에도 정통하며 형법이나 형사소송법 조문과 판례를 술술 암송할 정도였다. 게다가 헤겔이나 마르크스 같은 고전의 구절을 인용하며 도도하게 지론을 펴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너 소설 쓰고 싶댔지. 나랑 일하면 듣도 보도 못한 경험을 할 수 있는데. 마침 나도 너처럼 순진하게 생긴 뉴페이스가 필요했고.”

그 말에 솔깃해진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그를 따라 조직에 들어갔다. 아니, 조직이라고 하니까 좀 이상하다. 팀이라고 할까.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팀이었다. 정보를 수집하고 타깃을 물색하는 도면사, 소유자를 사칭할 배우를 고르고 교육시키는 수배사, 서류와 인감을 만드는 위조사, 돈 세탁 전문가, 그리고 이들을 지휘하여 최종 계획을 수립하는 지면사까지.

대관절 그들은 어떻게 부동산으로 큰돈을 벌어들이는가. 이것이, 본격 부동산 사기 미스터리 소설 『도쿄 사기꾼들』의 내용입니다. 뭐야, 책 선전인가,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을 형제자매님. 말도 마십쇼(한숨). 부동산 사기 치는 이야기를 이렇게 박진감 넘치게 쓸 수 있는 겁니까. 농담 아니라 진짜 숨도 못 쉬고 읽었습니다. 사기 치는 걸 바로 옆에서 몰래 엿보는 느낌이었어요. 들킬까봐 조마조마. 이런 걸 전문용어로 후달린다고 하던가.

에... 또... 그래서 말인데, 앞부분 한 챕터만 읽어보면 어떻겠습니까. 10분이면 읽을 수 있어요. 한 챕터 봤는데 별로더라, 그럼 저도 포기하겠습니다. 이 체험판을 한번만 거들떠봐 주시길.

소설 만들며 이것저것 공부하다가 부동산 사기 전문가로 거듭난,
삼송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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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사기꾼들 이판사판
신조 고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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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으로 돈을 버는 건 전부 남의 일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 벌었다기보다 돈이 통장으로 굴러들어왔다, 라는 느낌이었지요.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저는 마포구청역 인근 아파트를 분양받았습니다. 당초 계획은 그곳에서 결혼을 하고 평생 거주할 요량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출판사 사무실로 사용하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코로나 직전, 번아웃으로 고생하던 저는 이사를 결심하고 아파트를 내놓았습니다.


 

전혀 몰랐어요. 10년 사이에 아파트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었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임자가 나타나더군요. 이른바 영끌로 구입하는 거라면서 두말없이 대금을 입금해 주었습니다. 통장에는 지금껏 만져보지 못한 액수가 찍혀 있었지요. (어디까지나 제 관점에서) 천문학적인 숫자를 보며 처음 느낀 감정은 허탈함이었습니다. 그동안 죽을힘을 다해 출판사를 운영하며 벌었던 돈의 몇 배나 되는 금액을 한방에, 이토록 쉽게, 가질 수 있다니.


 

한데 몇몇 지인들에게 그런 감정을 토로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이 비슷해서 놀랐습니다. “너 그 돈 어디에 쓸 건데?” 이러저러한 물건이 있는데 투자해봐. 요즘 어느 지역 땅이 뜬다더라. 한국은 역시 부동산이야. ...다들 어떻게 이런 정보를 알고 있는 건지 물어보고 나서야, 부동산 카페에 가입해 정보를 공유하고, 관련 동영상을 몇 개씩 구독하며, 실제로 경매에 참여해 돈을 버는 지인도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대규모 전세 사기 관련 뉴스가 매일매일 보도될 무렵이었지요. 퍼뜩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부동산 사기를 다룬 미스터리 소설 같은 걸 출간하면 이 사회에도 조금쯤 도움이 되지 않을까. 누군가는 분명히 썼을 텐데. 그래서 영미권과 일본어권 사이트를 이 잡듯이 뒤졌습니다. 있더군요. 내 집 마련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는 블랙 부동산 업계를 묘사한 데뷔작으로 스바루 문학상을 받고 이후로 관련한 작품을 써온 작가가.


 

신조 고(新庄 耕)의 이력은 무척 특이한데 현대 비즈니스에 실린 인터뷰에 그중 일부가 담겨 있습니다.

 

내 주변에는 소위 불량청소년들이 많았다. 10대 후반에는 그들과 매일같이 클럽에서 놀거나 폭행으로 소년원에 들락거리기도 했다. 만화책 같은 걸 기분 전환용으로 읽었지만 공부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클럽에서 놀 때 마약에 손을 대기도 했다. 당시 중심가에는 불법 마약을 파는 외국인들이 잔뜩 있었으니까. 나는 매직머쉬룸 같은 걸 사서 먹고 시부야의 클럽 등에서 춤을 추고 다녔다. 이때의 트립(마약을 복용한 뒤의 환각) 경험은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폭력과 마약으로 점점 몸을 망치는 선배들을 보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폭력 서클을 나온 뒤에 마약도 끊고 독하게 마음먹고 공부를 시작했다. 매일 12시간씩 책상에 매달렸다.”


 

결국 주변의 조롱을 딛고 3수를 한 끝에 게이오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된 신조 고가 지금껏 쓴 소설은 전부, 하나같이, 몽땅 다 악당이 주인공입니다. 악덕 부동산에 취업하여 흑화돼 가는 청년(협소주택), 마약 카르텔의 일원(뉴 카르마, 다단계 판매 조직원(살라레오)처럼 사회에서 이탈한 자들을 전면에 등장시켰지요. 이는 전적으로 어린 시절의 경험 덕분일 겁니다. 뱀의 길은 뱀이 아는 법이라고 할까.


 

그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 타인의 부동산을 이용하여 돈을 가로채는 사기꾼 집단, 이른바 지면사(地面師)’들을 추적한 도쿄 사기꾼들입니다. 한국에도 보도될 정도로 파장이 컸던 세키스이하우스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작가는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면밀한 취재를 통해 그들의 조직적인 범행을 압도적 리얼리티로 완성시킵니다.


 

일본은 세계적으로 고령화가 가장 많이 진행된 국가 중 하나죠. 그에 따라 보이스피싱이나 방문판매의 표적이 되는 등 범죄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라더군요. 지면사(地面師)란 타인의 부동산을 이용해 사기를 치는 자, 즉 부동산 사기꾼이며 신조 고의 소설 도쿄 사기꾼들은 바로 이러한 노인의 부동산을 이용해 사기를 치는 걸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부동산 사기 계획을 지휘하는 지면사,

정보를 수집하고 타깃을 물색하는 도면사,

소유자를 사칭할 배우를 고르고 교육시키는 수배사,

서류와 인감을 만드는 위조범과 돈을 세탁하는 전문가까지,

이들이 상대를 속이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은 실로 용의주도하여 감탄이 나올 정도인데...

 

저는 정말 숨도 못 쉬고 읽었습니다. 사기 치는 걸 바로 옆에서 몰래 관찰하는 느낌이었어요. 들킬까봐 조마조마. 이런 걸 전문용어로 후달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작품이 일본에서 출간됐을 당시 언론에서는 자신이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런 어둠의 존재는 모르기보다 알고 있는 편이 좋다. 읽어두는 것만으로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자기방어가 될 거 같다라고 보도했는데, 이런 어둠의 존재에 대해 궁금하다는 형제자매님들이 꼭 한 번 읽어주었으면 합니다.

 

삼송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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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네 아빠 어딨니? - 듀나 작가 데뷔 30주년 기념 리뉴얼판
듀나 지음 / 북스피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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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에 듀나가 있었다.

한국 에스에프의 전성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듀나가 있었다. 에스에프뿐이랴. 듀나는, 김대중 선생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전두환 씨가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던 그해부터 판타지, 미스터리, 호러 등 각종 장르의 작품을 연재하였다. 한국 장르소설의 개척자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태초에 듀나가 있었다”니 지나치게 추어올린다고 느끼는 형제자매님도 계실 듯하다. 물론 이는 과장된 표현이며 여기에는 개인사적 맥락이 숨어 있다. 아니, 숨어 있는 건 아니고 처음 얘기하는 거니까 그냥 있다고 해야겠다. 그 얘기를 한 자락 해볼까 한다.

때는 2005년, <내 이름은 김삼순>에 등장한 책 <모모>가 순식간에 20만 부 이상 팔리며 호황인 듯 보였지만 도서정가제를 둘러싼 갈등이 여전한 가운데 대형 출판사의 매출은 증가하였으나 “중소형 출판사와 동네서점들은 고사 직전(경향)”이라는 출판뉴스가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나는 출판사를 창업했다. 이렇다 할 준비 없이 첫 책 하나만 들고 벌인 일이었다. 막연히 힘들 거라는 예상을 했지만 현실은 예상보다 더 지난했다. ‘언제 망할지 알 수 없는 신생 출판사’에 아무도 작품을 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판권을 문의해도 답신조차 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듀나 작가가 쓴 게시판 글을 보게 되었다. 이러저러한 아이디어가 있어서 소설로 써볼까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덮어놓고 듀나 작가에게 메일을 보냈다. 장황한 읍소가 담겨 있었는데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그 소설, 북스피어에서 출간하면 어떻겠습니까?” 잘 만들어 볼 테니 저한테 주세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출판사를 선택해서 책을 출간할 수 있을 정도의 네임드 작가가 뭐가 아쉬워서 북스피어 같은 듣보잡이랑 계약을 한단 말인가. 답장도 안 올 줄 알았다. 한데 바로 왔다, 답장이. 계약하자고. 이게 웬 떡인가 싶더라. 되풀이하지만 당시에는 뭐라도 하나 얻어걸렸으면 하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오퍼를 넣을 때였으니까.

와, 신난다. 그(녀)는 ‘얼굴 없는 작가’로 여자인지 남자인지 1명인지 3명인지 지구인인지 외계인인지, 아니 이건 아닌가 하여튼 몽땅 베일에 싸인 채 발표하는 글만 볼 수 있었으니 그, 그럼 계약할 때 듀나 작가랑 만날 수 있는 걸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으나. 음. 만나기는커녕 통화 한번 못했다. 그저 메일만 몇 번 주고받았을 따름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북스피어에서 듀나의 책이 출간되었다. 감격해하며 영화평론가 정성일 선생에게 3매짜리 추천사를 부탁했는데 무려 33매짜리 추천사를 보내주는 바람에 ‘ㄸㄹㅇ인가’ 싶어 당혹스러워하다가 ‘아아, 추천사가 소설만큼 재밌잖아’ 하며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정성일 선생이 사는 곳을 향해 감사의 마음을 담아 33번 절했던 기억이 난다.

그게 벌써 17년 전 일이구나. 그 사이에 한국 에스에프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여 김보영김창규배명훈정소연김초엽천선란 등의 걸출한 작가를 배출하고 각종 차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부커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바야흐로 전성기를 맞이한 것이다. 게다가 올해는 듀나 작가의 데뷔 30주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지난 두 달 동안 표지를 새롭게 만들고 본문을 다시 작업해서 리뉴얼한 책을 이번에 출간하였다.

듀나를 다시 들여다볼 시간이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변변찮아 보이는 출판사의 대표로 출간할 책이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두말없이 원고를 주었던 듀나 작가님, 데뷔 3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덕분에 북스피어도 살아남아서 곧 20주년을 맞이할 수 있겠어요. 고맙습니다.

삼송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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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 가리운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 레이디가가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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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잘근잘근 씹어 먹을 듯한 포즈로 별의별 초자연적 의상과 아크로바틱한 동작, 센세이셔널한 아이디어를 끝도 없이 등장시키며, 아아 도대체 저걸 어떻게 수습하려고 저러나 하는 의혹과 아노미의 도가니탕으로 관객들을 싸그리탈탈 몰아넣은 뒤,

 

빈 수레가 요란하더라는 둥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둥 모난 돌과 같은 예술가들을 보면 물고 뜯고 씹어대는 이들을 향하여 그 퍼포먼스에 전혀 뒤지지 않는 가창력과 연주실력, 화려무쌍한 무대장악력을 보여줌으로써 환상특급적 피날레로 마무리하고야 마는 레이디 가가.

 

이런 압도적인 에너지는 과연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동력은 레이디 가가의 평소 습관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볼짝시면,

 

1) 아침을 든든히 먹는다.

2) 매일 운동을 한다.

3) 입버릇은 나는 할 수 있어.”

4) 다른 이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다.

5) 쉬고 싶을 때는 전력으로 쉰다.

6) 감사하는 마음은 즉시 표현한다.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데.

일과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기 전 매일 30분씩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시간을 갖는다고 하네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 시간에는 거울을 향해 긍정적인 말을 건네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는다고.

 

매일 하루에 30분 자신을 소중히 하는 시간을 갖는다, 라니. 표현이 멋지지 않나요. 이토록 바람직한 습관이라면 한 번쯤 가져봐도 좋겠습니다. 마침 이런 다이어리적 마인드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이 바로 <구름에 달 가리운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인데.

 

이번 작품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회파 미스터리부터 호러, 에스에프, 판타지까지 모든 장르에 발자취를 남겨온 미야베 문학의 새로운 도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새로운 도전이기 때문에 레이디 가가시리즈예요.

 

세계에서 가장 짧은 정형시라는 하이쿠의 압축된 세계를 미야베 미유키 작가가 특유의 통찰력과 따듯한 혜안을 담아 뽑아낸 12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작가도 당부했지만 이 작품들은 몰아 읽지 말고, 한겨울 서리를 견디며 긴 꼬치에 매달려 있는 곶감 빼먹듯 잠들기 전에 한 편씩 읽으면 좋아요. 12개 이야기 모두 딱 30분씩 읽으면 마침맞은 분량이니까.

 

17음으로 이루어진 하이쿠를 번역하는 작업이 좀처럼 쉽지 않았는데, 12개의 한글 제목 가운데 가장 끌리는 것부터 순서와 상관없이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다만책의 맨 뒤에 있는 미야베 미유키 작가의 말을 제일 먼저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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