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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깃든 산 이야기 ㅣ 이판사판
아사다 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9월
평점 :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고로 씨. 아무도 없는 사이에 살짝 편지 쓰고 있습니다. 서투른 글씨 미안합니다. 나는 죽습니다. 이렇게 죽는 여자들 많이 봤으니까 나는 압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 갚으면 고로 씨하고 만날 수 있을까. 고로 씨와 함께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안 됩니다.
고로 씨 항상 벙실벙실 웃고 있습니다. 일하면서 고로 씨 잊지 않습니다. 진짜입니다. 내가 죽으면 고로 씨 만나러 와줍니까. 고로 씨 덕분에 일 많이 했습니다. 고향 집에 돈 많이 부쳤습니다. 죽는 것 무섭지만 아프지만 괴롭지만 참습니다. 바닷소리 들립니다. 비 옵니다. 아주 캄캄합니다. 서투른 글씨 미안합니다. 고로 씨가 정말 좋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누구보다 고로 씨가 좋습니다. 고로 씨에게 드리는 거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합니다. 그래서 말만, 서투른 글씨로, 미안합니다. 안녕.
영화 <파이란> 보셨는지. 거기에 동네 양아치 ‘강재(최민식)’가 편지를 읽다가 펑펑 눈물을 쏟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내 울어요. 대사도 없이.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봤습니다. 영화관에서 볼 때는 저도 오열. <파이란>의 원작이 아사다 지로의 ‘러브레터’라는 걸 알고 소설도 찾아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영화도 좋았지만 소설은 더 좋았습니다.
‘러브레터’의 주인공 이름은 고로 씨입니다. 불법 제작한 포르노를 팔아서 겨우 먹고사는 건달인데, 돈 몇 푼 받고 위장 결혼을 해준 중국 여성의 이름이 ‘파이란’이에요. 파이란은 고로와 만난 적이 없어서 늘 고로의 (벙실벙실 웃고 있는) 사진을 보며 ‘편지’를 씁니다. 그래서 제목이 ‘러브레터’, 이 편지 부분은 정말 원작이 좋습니다.
건달, 양아치, 조폭은 아사다 지로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직업군입니다. 때문에 ‘아사다 지로가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에 야쿠자로 활동했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지요. 실은 전혀 그렇지 않고 출판사가 책 판매를 위해 작가의 경력에 자극적인 설정을 풍성하게 섞다가 만들어진 소문이라고 합니다.
1951년생인 아사다 지로는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집안의 몰락으로 불량 청소년의 길을 걷는 동안 나쁜 짓도 제법 했고, 주위에 건달이나 야쿠자 생활을 하는 이들도 많았던 모양이에요. 그때의 경험으로 소설에 건달, 양아치, 조폭을 자주 등장시킨 것이지요.
고교를 졸업한 후에는 자위대에 입대하였고 제대 후에는 여성복 매장을 운영하며 옷을 팔았습니다. '소설가가 되기까지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는 프로필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강조하고 싶은데 '다양한 직업을 거쳐'라는 말은 데뷔하고 『프리즌 호텔』을 출간할 때 편집자가 붙여 준 카피다. 내가 제대 후에 가졌던 직업은 여성복 영업, 하나뿐이다. 아르바이트는 다양하게 했지만, '다양한 직업'을 거쳐 온 것은 아니다. 다만 호기심은 강한 편이다. 나는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사실 남의 이야기 듣는 걸 더 좋아한다.
이 ‘호기심’이 그를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사다 지로는 중학 시절 명작이라 불리는 문학 작품을 ‘멋대로 개작’하는 게 취미였는데,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단편 <이즈의 무희>를 ‘개작’하여 학교에서 돌려 읽게 한 적이 있었다네요. 그때 읽고 극찬한 친구가 훗날 슈에이샤(드래곤볼, 원피스, 슬램덩크 등을 출간한 대형 출판사)의 상무가 되어 “내가 네 가장 오래된 독자다”라고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부모가 이혼을 하자 아사다 지로는 엄마의 친정집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아사다 지로의 증조부는 태곳적부터 신을 모셔온 영산(靈山) 미타케산의 신관이었는데 실력 있는 퇴마사로도 유명했다네요. 그 능력은 아사다 지로의 어머니(와 이모)를 거쳐 아사다 지로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실제로’ 어려서부터 귀신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유명한 <철도원>도 죽은 딸이 돌아온다는 설정의 귀신 이야기잖아요.
<신이 깃든 산 이야기>는 미타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가 귀신을 보는 증조부와 이모를 통해 들었던, 혹은 직접 맞닥뜨린 기이한 일들을 적은 자전적 괴담집입니다. 당시에 보고 들은 이야기들은 소년 아사다 지로의 상상력을 강하게 키워주었다고 작가는 술회하고 있습니다.
“미타케산에서의 생활이 없었다면 나는 소설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얘기할 정도였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아사다 지로라는 거장이 탄생하게 된 수원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원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현대 도시에서 전해지는 괴담과는 또 다른, 미타케산을 배경으로 한 신비로운 괴담을 통해 달인의 이야기 솜씨를 만끽하실 형제자매님들은, 가급적 <신이 깃든 산 이야기>의 맨 뒷단에 실린 ‘편집자 후기’를 먼저 거들떠보시고 본문을 읽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마포 김 사장 드림.
덧) 사진의 왼쪽은 원서고 오른쪽은 한국어판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