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출근길
법륜스님 지음 / 김영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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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출근하고 저녁이나 밤에 퇴근하는 삶이 지겹다. 일을 시작한지 3년 하고도 3개월. 도대체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나, 1년간 책만 읽으며 좀 쉬다가 취직하면 안될까, 여행을 다녀와볼까, 회사가 언젠간 망할 거 같은데 이직 준비라도 해야하나.. 온갖 질문들에 둘러싸인 채 대답 없는 번민만 반복했다. 갈수록 얼굴이 탁해졌고 몸은 늘 감기에 걸린듯 무거웠다.


일이 즐겁지 않으니 인생이 답답하고 마음은 불만투성이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돈과 명예를 쟁취할 것을 요구하는 작금의 신자유주의 체제를 날마다 증오했고, 사회적 약자를 무시하고 자본에 빌붙는 정부와 정치권을 혐오했다. 학벌로 사람을 판단하고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좋은 회사에 면접 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 이 사회가 미웠다. 괜한 울분에 휩싸여 사회를 저주하고 내 신세를 한탄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친구들은 나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상 사회를 꿈꾸는 몽상가 취급했다. 현실은 약육강식의 세계이며 이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라고 친구들은 말했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라고, 책만 보지 말고 다른 자기 계발도 좀 하라는 충고까지 덧붙였다. 나는 속으로 왜 이렇게 친구들이 세상을 좁게 바라보는지, 왜 모든 사람들이 즉물적인 욕망에만 집착하며 살아가는지 개탄했다. 대화 자체가 통하지 않는다는 느낌에 혼자 절망하곤 했다.

늘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믿었다.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쓰지 않았다. 돈도, 명예도, 지위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저 매순간 내가 해야 했고 할 수밖에 없었던 일에 최선을 다해 살며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적당히 놀았고 연애도 했다. 취직할 때가 되자 열심히 준비해서 직장을 잡았다. 큰 문제 일으키지 않고 내 나름 성실하게 일했고 돈도 또래 아이들에 비해 꽤 벌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부족할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나는 항상 비관주의자로 살아왔다. 인생이 행복하고 재미있다고 느낀 적은 정말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늘 나 자신이 부족한 점만을 탓했다. 돈에 미친 인간 족속들과 분열되고 모순된 삶을 살아가는 나 자신을 냉소했다. 심지어 얼마 전에 육촌 동생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오빠는 겉으로 보기엔 정말 열심히, 충분히 잘 살고 있는데 왜 그렇게 뒤틀린 사고를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별로 새겨듣지도 않았다. 그냥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나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륜 스님의 <행복한 출근길>을 읽으며 나 자신을 뼛속까지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어쩌면 내 안의 괴로움의 원인일지도 모른다. 나르시스트적인 자기 인식이 나를 옥죄는 멍에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보통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대개 자기 자신을 매우 사랑한다. 따라서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매순간의 결심과 선택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어야 한다. 허례허식에 얽매이고 외부에 구속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보헤미안적인 특성도 있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렇다.

하지만 직장 생활이 어디 그러한가. 오너나 상부에서 내리는 지침에 부하 직원은 일방적으로 따라야만 한다. 말로는 소통을 외치지만 모든 직원은 엄격한 분업 시스템과 수직적인 직위 체계 속에 일방적으로 예속될 수밖에 없다. 인격을 무시하는 듯한 상사의 잔소리와 지적질을 무덤덤하게 견딜 줄 아는 힘은 필수다. 나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두고 싶다,  오전 출근 오후 퇴근의 삶은 도저히 못 살겠다,  진짜 이 일을 평생 하면서 살아야 되나 등과 같은 생각만 할 뿐 실제로는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욕심 때문이란 걸 나는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그렇게 말하고 생각은 하면서도 직장 생활이 주는 약간의 부와 안정감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직장생활을 통해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 직장생활과 상관 없는 꿈과 목표까지 이루려다 보니 인생이 고달프고 불만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직장일은 완벽히 하면서 작가도 되고 몸짱도 되고 그러다가 적당한 때에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까지 하려고 한다. 게다가  영어공부에 만날 친구 다 만나면서 독서에 서평쓰기까지 하려니 제대로 되는 건 없고 하루하루가 너무 짧아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  또 후회, 오늘부턴 더 치열하게 살겠다고 결심하고선 또 후회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려는 비장하고 진지한 엄숙주의가 나 자신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법륜 스님은 말한다. 생각을 다르게 하라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라고.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온갖 알바를 하며 학교를 다녀야 하는 고학생들이나 취직도 못하고 졸업할 수밖에 없는 백수, 백조들에 비하면 나는 그나마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지를 깨달으라고 말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일상에 긍정하면서 새로운 목표에 도전했을  때, 비로소 가슴이 후련하고 세상 사는 게 즐거워진다. 실패에도 한층 관대해지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에너지 역시 금방 확보할 수 있다. 삶이 별 거 아닌 줄 알고 그저 하루하루 충실했을 때 비로소 삶은 위대해진다. 인생을 대충대충 가볍게 살라는 게 아니다. 욕망에 집착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꿈을 꾸라는 것이다.  법륜 스님의 법문은 이처럼 알고도 몰랐던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힘이 있다.

이것도 해야지, 저것도 해야지, 이것도 잘해야지, 저것도 잘해야지, 이런 게 욕심이라고 스님은 일갈한다. 내가 딱 그랬다. 모든 걸 다 잘할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 왜 그토록 온갖 ‘목표'에 집착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불안해하며 언제나 심각하게 말하고 행동해왔던 내 자신이 문득 애처로웠다. 무엇이 그리 급해서 하루하루 버둥버둥 살았던 것일까. 조금 더 가볍게 생각하고, 조금 더 유쾌하게, 웃으면서 살아도 아무 문제 없었을텐데. 그렇게 몸과 마음에 쌓인 번뇌의 더께를 걷어냈을 때 비로소 정말로 치열하게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을텐데.

책을 다 읽었고 얻은 바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직장을 섣불리 그만두지 못할 것이다. 스님 말대로 돈 때문에, 더 나은 직장을 구할 수 없으리라는 불안감 때문이다. 직장에 다니면서 지금껏 얻어왔고 앞으로 얻게 될 이점들을 쉽사리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젠  내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내가 어떤 생각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자학하는지를 명확히 깨달았다. 세상사엔 이치란 게 있으므로 이걸 하려면 저걸 포기해야만 하는 법이다. 직장에서 빼먹을 건 다 빼먹으면서 직장 밖에서 이룰 것 역시 다 이루겠다는 건 이러한 이치에 맞지 않다.

남들이 뭐라건 상관 없이 내 자신의 결정과 선택을 믿어왔다. 그렇게 지금에까지 이르렀고 큰 후회는 없다. 하지만 ‘나 자신을 위해 혹은 나 자신을 사랑하므로' 내 욕망과 목표에 완벽히 부합하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은 실현 불가능하다. 삶의 여백을 만들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서른을 앞둔 지금 결국 중요한 건 내가 이룰 수 없는 것들을 확실히 버리고 지금 이 순간 행복해질 수 있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버린다고 해서 영원히 되찾을 수 없으리란 법도 없다. 직장을 그만두든 이직을 하든 혹은 등단을 해서 전업 작가가 되든 결국엔 나의 선택이 내 인생의 정답이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의 가치관을 확실하게 세우고 인생의 방향을 명확하게 잡는 것이다. 그래야 상황에 휘둘리거나 남 눈치 보는 일 없이 똑바로 걸어갈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충분히 잘 살고 있다. 그러니까 힘내자. 지금 필요한 건 나 자신에 대한 자학과 불만이 아니라 응원과 격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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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주례사 -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남녀 마음 이야기
법륜스님 지음, 김점선 그림 / 휴(休)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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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집착을 떠나 언제나 마땅히 해야 할것을 하라. 집착없이 행하는 자가 가장 높은데 이르기 때문이다.

                                                                                                                          -바기바트 기타 中-

‘주례사 서평’을 안 쓸 수가 없다. 너무나 좋은 말씀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세상 이치를 이처럼 직설적이고 단촐하게 꿰뚫다니 속이 다 시원하다. 결혼을 앞둔 연인뿐만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는 모든 연령과 세대의 사람들에게 이 책은 귀한 설법이요 법문이다.

사랑은 소유와 집착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내 곁에만 있어야 하며 절대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 인간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집착은 탄생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자유와 사생활을 침해하고 헤어지려고 할라치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처음 만났을 때의 두려움과 설렘은 사라지고 어느 순간 사랑은 끔찍한 저주이자 견딜 수 없는 구속이 되고 만다.

이 사람 아니면 죽어버리겠다던 연인들이 결혼을 하고 나면 약속이나 한듯 땅을 친다. 까놓고 보니 함께 하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애라도 들어서면 진짜 빼지도 박지도 못한다. 우스갯소리로 ‘인생 끝났다'고도 한다. 하지만 사람이 바뀐 게 결코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의 그러한 본 모습을 자신이 보지 못한 것일 뿐이다. 축복 받아야 할 두 사람의 결혼이 견뎌내야 할 일상이 돼버린 가정에 행복이 들어설 공간이 있을 리가 없다. 불화는 자식에게 되물림되고 종내에는 사회를 병들게 한다. 이 모든 결혼의 불행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된 탓이다.

흔히들 결혼은 낭만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현실'은 대개 결혼으로 인해  주어질 수밖에 없는, 따라서 받아들이고 견뎌내야 할  새로운 삶의 조건이다. 둘이 살 집도 마련하고,  자녀 출산 및 교육 계획도 세워야 한다. 돈 관리는 누가 할지 정하고 집안 대소사도 빠뜨리지 않고 챙겨야 한다.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으면서 알콩달콩 살겠다는 꿈은  정신없이 바쁜 일상, 금전적 압박 등 여러 가지 현실적 이유로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바꿀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결혼의 현실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결혼생활이 이렇게 수동적으로 주어진 현실에 불과하다면 사랑은 짐이 되고 가정은 지옥으로 변하고 만다. 결혼의 현실은 사랑하는 두 사람이 얼마든지 능동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당장은 돈도 부족하고 애 낳을 형편도 안될 수 있다. 이런저런 현실적 제약에 신혼부터 한숨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노력한다면 주어진 현실이 얼마나 힘드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것을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마음이다. 고통은 고통대로 기쁨은 기쁨대로 끌어 안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가 되어주어야 한다. 그토록 사랑해서 결혼했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도대체 결혼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랑 좋아하시네, 라고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욕심을 버리고 상대를 배려할 때 결혼의 수동적 현실은 행복한 일상으로 다시 태어난다. 스님은 사람들이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기반해 결혼했기 때문에 그토록 불행한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만 따지고 결혼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마음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 성에 안 차면 그냥 끝이다. 거기서 더 나가면 자식 때문에, 돈 때문에 그냥 함께 살고 마는 비극이 벌어지고 마는 것이다.

욕심은 곧 내가 원하는 상대방의 모습을 일방적으로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내가 원하는 모습만 상대방이 보여주길 원하는 것이다. 몸매는 항상 날씬했으면 좋겠고 돈도 많이 벌어와야 한다. 자녀를 자상하게 대하는 동시에 배우자에게 가끔 편지와 선물도 줄 줄 아는 센스도 갖춰야 한다. 그런데 모든 요구 조건을 서로 충족시키면서 살아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충족될 수 없는 욕심을 붙들고 있어본들 화가 될 뿐이다. 그냥 내려놓아야 한다. 마음속이 욕심으로 가득한데 어떻게 배려가 가능하겠는가.

외롭다고 결혼하는 것도 문제다. 서로 기대기만 해서는 결혼 생활이 유지될 수가 없다. 살다보면 둘 다 힘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이 힘들면 좀 덜 힘든 다른 한 쪽을 보듬어주고, 또 보듬어주던 쪽이 힘들면 다른 쪽에서 위로해주는 상호 협력에 기반한 의존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게 안되면 상대방은 어느 순간 감당하기 힘든 존재가 된다. 결혼해서 함께 살지만 떼놓고 보면 둘은 전혀 다른 개인이다. 각자 자기 삶의 영역에서 감당해야 할 고통이 있고 자신만의 관심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고통은 나누되 프라이버시는 존중 받아야 한다. 따로 설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안되니까 결혼생활이 답답하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와 같은 말이 나온다.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니라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떠나는 것까지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스님은 말한다. 다소 과격한 배려론이 아닌가 싶은데 꼭 그렇지도 않다. 결국 내가 행복할 수 있어야 결혼생활도 행복하기 때문이다. 바람 피운 상대를 저주하면서 절대 이혼해주지 않겠다고 맞서봤자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아이의 정신 건강만 나빠질 뿐이다.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라도 모든 책임을 과감히 자신에게로 돌릴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배우자의 유무보다 중요한 건 미움을 털어내고 자신을 위해 또 자식을 위해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는 일이다. 얕은 수행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어쨌든 미워하고 저주해봤자 비참해지는 건 자기 자신일 뿐이다.

모든 일에는 이치가 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이다. 상대방에게 하나라도 더 얻어내려는 욕심이 가정의 불화를, 평소에 배우자에게 소홀했던 것이 간통과 외도를 부른다. 돈 많은 늙은 남자와 결혼한 젊은 여자가 남편과 친구처럼 소통하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의 작용이다. 이것을 거부하려고 하면 결혼생활이 결코 유지될 수 없다고  스님은 정문일침을 놓는다.

나를 어떻게 바꾸냐에 따라 결혼생활이 달라진다.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다고 실망만 할 게 아니라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정확히 들여다봐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요구 사항을 자꾸만 고집하거나 먼 미래의 희망 사항을 지금 당장 이뤄야 될 사안처럼  강조해선 곤란할 것이다. 모든 갈등의 씨앗이 자기 안에 있듯 행복한 결혼생활의 씨앗도 자기 안에 있다. 이 책은 그 씨앗의 파종부터 재배에 이르기까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지침서다. 사랑하는 사람과 꼭 함께 읽고 싶다. 그런 날이 어서 오길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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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 “이게 사는 건가” 싶을 때 힘이 되는 생각들
엄기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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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 책은 정말 좋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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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주례사 -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남녀 마음 이야기
법륜스님 지음, 김점선 그림 / 휴(休)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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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한테 죄송하다고 고개 숙여 빌고 싶다. 이 책을 이제서야 읽다니. 이 책을 읽은 건 벼락같은 축복이었다. 비단 결혼뿐만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케 해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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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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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와 심장의 활동이 정지된 상태라고 했을 때, 모든 죽음은 간명하게 정리된다. 떠나간 자는 말이 없고 우리는 얼마간 슬퍼하다 망자를 잊는다. 삶은 여러 가지 일들이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스펙터클의 연속이므로, 우리는 바쁜 일상을 핑계 삼아 우리의 망각을 용서한다.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모든 자가 언제든 가는 것이다. 죽은 자에 대해 영원한 애도를 표하기에 우리의 인생은 너무 짧다. 마음 깊숙이 뿜어져 나온 슬픔에 사로잡혀 식음을 전폐해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는 쓰러지겠지만, 대부분은 다시 일어난다. 웃으며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생전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그는 죽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죽음은 때론 급작스럽게 들이닥친다. 죽은 자의 내면에 복잡하게 뒤엉겨 있었을 심사에 대해 우리는 다만 추측해본다. 사람의 마음속으로 아무도 들어갈 수 없으므로 죽은 자의 내면은 세상에 없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풍경처럼 막막할 뿐이다. 풀 수 없는 수수께끼만을 세상에 떡하니 남긴 채 떠나가버린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 데서 느꼈을 고독을 나는 어렷품하게나마 짐작하지만, 이해받는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때론 별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드는 건 왜일까.

따뜻한 손 하나 그리웠을까.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맨살에 내리꽂히는 칼날처럼 날카로웠을 때. 차라리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기도 하며 선잠에 밤을 지새우던 나날들처럼. 익숙한 사람들의 웃음과 늘상 듣던 잔소리마저 죽음 앞에선 사무치게 그리운 추억, 다시는 오지 않을 선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

이젠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꽃에서 더 이상 향기가 나질 않아요. 소란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땀 흘리며 운동하는 노인들, 한 푼이라도 가격을 깎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는 상인들과 손님. 세상이 아무런 말도 없이 흘러가고 있어요. 내 안에 넘쳐나는 말들은 갈 곳 없이 내 가슴속 여기저기를 들이받으며 파열하고 있는데 말이죠. 내가 철이 덜 든 건가요. 인생의 맛은 쓰다는 걸 알았지만 가끔은 사탕처럼 달콤하게 입 안을 굴러다니던 시절이 있었죠.

이해한다는 거짓말, 거듭되는 사과와 끝없는 가식. 이젠 저도 아니까 받지 않을게요. 아니 차라리 외면하고 말게요.  물러설 공간도, 헤엄칠 바다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는 것 외에 제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요?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 푸른 나무들이 생명의 열기를 한껏 뿜어 대는 축복 받은 그 계절에 하늘이 무너지는 모습을 당신은 지금껏, 아니 앞으로도 보지 못했겠지요. 그때 하늘은 숨막힐 듯 노랬는데 그 노란 빛이 벼락처럼 떨어져 제 온 몸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죠. 저는 눈을 질끈 감았어요. 손에 칼을 들고 있었더라면 가차없이 제 배를 찔러버렸을 겁니다. 십수년이 지났지만 그 노란색이 자다가도 깨버릴 정도로 선명하게 저의 망막에 맺히곤 해요. 그 절망의 색깔을 당신이 짐작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만 가려고 합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완전함에 가깝게 모두를 용서하고요.

죽지 않은 사람들은 긴 인생을 마저 살다 가겠죠.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는 우아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요. 유대인 수백만 명이 홀로코스트로 희생됐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도 유대인을 힐난하는 걸요. 타인을 인식하는 시선이 통째로 뒤바뀔 수 있다는 믿음 따위 애시당초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골치 아픈 일을 내가 죽음으로써 간단히 해결하겠다는 오만한 영웅심리 따위도 물론 없어요. 다만 이제 여러 날의 고민 끝에 이곳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떠나는 거에요. 저를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미안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어떤 경우에도 제가 죽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짊어질 삶의 무게가, 지금 제가 죽음을 결정하고 실천하는 이 순간 짊어지고 있을 비극의 무게보다 무겁진 않을 테니까요.  다들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잖아요. 모든 상처는 대개 시간이 지나면서 아물게 마련이고요. 그걸 알고 가는 거에요. 거기에도 예외가 있다는 걸 모르는, 도무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하는 사람들의 무심함에 대해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는 거. 어떻게 생각하시죠?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란 지금 제게 어울리는 표현이 아닌 것 같네요. 말했잖아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니까요.

그래도 저는 당신이 비극보다는 희망을, 슬픔보다는 기쁨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기를 바래요. 제가 논리적이지 않다 욕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는 그걸 바래요. 당신이 행복하기를 말이죠. 죽음이란 언제나 쓸쓸한 일이죠. 죽음이란 동행이 불가능한 행위죠. 결국 모든 죽음은 개별적이고 이 세상을 떠나는 건 나 혼자만의 몸짓이니까요. 자신의 존엄성을 높이기 위해 저를 장난감처럼 이용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놈팽이처럼 이 여자 저 여자에 기웃거리며 가난과 비극을 대물림하던 가장들이 있었고,  목소리만 크고 허세만 가득할 뿐 속을 뒤집어보면 파들파들 떠는 한마리 약한 짐승에 불과한 친구들이 있었고, 사람들이 죽든 말든 무심하게 자기 갈 길 잘 가는 동료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이제 알아요. 모든 존재에는 그것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어떤 이유가 있다는 걸 말이죠. 우리가 세상에 없어져야 할 놈이라고 욕하는 자들조차 자신만의 논리와 남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비극적 사연을 숙명처럼 지닌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말이죠. 화는 화를 낳고 거듭되는 화는 끔찍한 분노로, 최후에는 살인과 같은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을 낳죠. 복수와 원한은 누군가 끊지 않는 한 끊임없이 계속되는 악마의 놀음같은 거에요. 괴상하고 한심한 짓거리만 되풀이하는 자들에게 저놈은 참 이상해라고,  혹은 아무 문제없이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듯 보이는 친구들에게 저놈은 참 괜찮은 놈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단정짓지 마세요. 모든 인간은 살짝만 닿아도 폭발할지 모르는 악마성을 어느정도는 품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당신이 좀 더 우아해지길 바랍니다. 정확히 말하면 좀 더 우아한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이만 가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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