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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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와 심장의 활동이 정지된 상태라고 했을 때, 모든 죽음은 간명하게 정리된다. 떠나간 자는 말이 없고 우리는 얼마간 슬퍼하다 망자를 잊는다. 삶은 여러 가지 일들이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스펙터클의 연속이므로, 우리는 바쁜 일상을 핑계 삼아 우리의 망각을 용서한다.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모든 자가 언제든 가는 것이다. 죽은 자에 대해 영원한 애도를 표하기에 우리의 인생은 너무 짧다. 마음 깊숙이 뿜어져 나온 슬픔에 사로잡혀 식음을 전폐해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는 쓰러지겠지만, 대부분은 다시 일어난다. 웃으며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생전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그는 죽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죽음은 때론 급작스럽게 들이닥친다. 죽은 자의 내면에 복잡하게 뒤엉겨 있었을 심사에 대해 우리는 다만 추측해본다. 사람의 마음속으로 아무도 들어갈 수 없으므로 죽은 자의 내면은 세상에 없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풍경처럼 막막할 뿐이다. 풀 수 없는 수수께끼만을 세상에 떡하니 남긴 채 떠나가버린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 데서 느꼈을 고독을 나는 어렷품하게나마 짐작하지만, 이해받는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때론 별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드는 건 왜일까.

따뜻한 손 하나 그리웠을까.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가 맨살에 내리꽂히는 칼날처럼 날카로웠을 때. 차라리 꿈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기도 하며 선잠에 밤을 지새우던 나날들처럼. 익숙한 사람들의 웃음과 늘상 듣던 잔소리마저 죽음 앞에선 사무치게 그리운 추억, 다시는 오지 않을 선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

이젠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꽃에서 더 이상 향기가 나질 않아요. 소란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땀 흘리며 운동하는 노인들, 한 푼이라도 가격을 깎기 위해 실랑이를 벌이는 상인들과 손님. 세상이 아무런 말도 없이 흘러가고 있어요. 내 안에 넘쳐나는 말들은 갈 곳 없이 내 가슴속 여기저기를 들이받으며 파열하고 있는데 말이죠. 내가 철이 덜 든 건가요. 인생의 맛은 쓰다는 걸 알았지만 가끔은 사탕처럼 달콤하게 입 안을 굴러다니던 시절이 있었죠.

이해한다는 거짓말, 거듭되는 사과와 끝없는 가식. 이젠 저도 아니까 받지 않을게요. 아니 차라리 외면하고 말게요.  물러설 공간도, 헤엄칠 바다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는 것 외에 제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요?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 푸른 나무들이 생명의 열기를 한껏 뿜어 대는 축복 받은 그 계절에 하늘이 무너지는 모습을 당신은 지금껏, 아니 앞으로도 보지 못했겠지요. 그때 하늘은 숨막힐 듯 노랬는데 그 노란 빛이 벼락처럼 떨어져 제 온 몸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죠. 저는 눈을 질끈 감았어요. 손에 칼을 들고 있었더라면 가차없이 제 배를 찔러버렸을 겁니다. 십수년이 지났지만 그 노란색이 자다가도 깨버릴 정도로 선명하게 저의 망막에 맺히곤 해요. 그 절망의 색깔을 당신이 짐작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만 가려고 합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완전함에 가깝게 모두를 용서하고요.

죽지 않은 사람들은 긴 인생을 마저 살다 가겠죠.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는 우아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요. 유대인 수백만 명이 홀로코스트로 희생됐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도 유대인을 힐난하는 걸요. 타인을 인식하는 시선이 통째로 뒤바뀔 수 있다는 믿음 따위 애시당초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골치 아픈 일을 내가 죽음으로써 간단히 해결하겠다는 오만한 영웅심리 따위도 물론 없어요. 다만 이제 여러 날의 고민 끝에 이곳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떠나는 거에요. 저를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미안하지 않느냐는 질문은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어떤 경우에도 제가 죽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짊어질 삶의 무게가, 지금 제가 죽음을 결정하고 실천하는 이 순간 짊어지고 있을 비극의 무게보다 무겁진 않을 테니까요.  다들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잖아요. 모든 상처는 대개 시간이 지나면서 아물게 마련이고요. 그걸 알고 가는 거에요. 거기에도 예외가 있다는 걸 모르는, 도무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하는 사람들의 무심함에 대해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는 거. 어떻게 생각하시죠?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란 지금 제게 어울리는 표현이 아닌 것 같네요. 말했잖아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니까요.

그래도 저는 당신이 비극보다는 희망을, 슬픔보다는 기쁨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기를 바래요. 제가 논리적이지 않다 욕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는 그걸 바래요. 당신이 행복하기를 말이죠. 죽음이란 언제나 쓸쓸한 일이죠. 죽음이란 동행이 불가능한 행위죠. 결국 모든 죽음은 개별적이고 이 세상을 떠나는 건 나 혼자만의 몸짓이니까요. 자신의 존엄성을 높이기 위해 저를 장난감처럼 이용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놈팽이처럼 이 여자 저 여자에 기웃거리며 가난과 비극을 대물림하던 가장들이 있었고,  목소리만 크고 허세만 가득할 뿐 속을 뒤집어보면 파들파들 떠는 한마리 약한 짐승에 불과한 친구들이 있었고, 사람들이 죽든 말든 무심하게 자기 갈 길 잘 가는 동료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이제 알아요. 모든 존재에는 그것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어떤 이유가 있다는 걸 말이죠. 우리가 세상에 없어져야 할 놈이라고 욕하는 자들조차 자신만의 논리와 남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비극적 사연을 숙명처럼 지닌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말이죠. 화는 화를 낳고 거듭되는 화는 끔찍한 분노로, 최후에는 살인과 같은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을 낳죠. 복수와 원한은 누군가 끊지 않는 한 끊임없이 계속되는 악마의 놀음같은 거에요. 괴상하고 한심한 짓거리만 되풀이하는 자들에게 저놈은 참 이상해라고,  혹은 아무 문제없이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듯 보이는 친구들에게 저놈은 참 괜찮은 놈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단정짓지 마세요. 모든 인간은 살짝만 닿아도 폭발할지 모르는 악마성을 어느정도는 품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당신이 좀 더 우아해지길 바랍니다. 정확히 말하면 좀 더 우아한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이만 가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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