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메가를 사람이 아닌 '알파에게 맞춤 제작된 생물'로 취급하는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고 싶었던 불량 오메가 글리와 백치나 다름없는 오메가중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사고를 하는 글리에 대한 흥미로 강한 독점욕을 보이는 행성의 실질적 지배자이자 오메가를 생산하는 공장의 주인인 알파 해켓. 평범하지 않는 글리를 특별하게 여기고 집착하면서도 그 감정의 정체를 몰라 어긋난 방식으로 글리를 소유하려 한 해켓에 대한 사랑으로 서서히 정신이 망가져 가던 글리가 안스러웠다. 필력이 좋아 끝까지 몰입해서 읽었지만 알파의 백치처럼 알파에게 순종하며 살다 사창가로 팔려가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는 오메가들로 인해 취향탈 만하다.
알파들에게 오메가는 인간이 아니었다.
적어도 해켓에게는 그랬다.
그는 스스로가 관대하다고 착각하는 주인이었다.
외관상 성별과는 상관없이 남자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오메가 버스 세계관의 판타지물인데 비슷한 소재의 책에서도 오메가의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이 책처럼 대놓고 오메가를 물건 처럼 생산해서 알파에게 씨받이로 제공하는 설정의 책은 처음이었다. '배양실험실'에서 생산된 공장 출신에 비해 부모가 있는 자연산 오메가는 그나마 나은 대우를 받는다 해도 인간이 아닌 물건 취급받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오메가란 주인이 될 알파에게 순종하며 쾌락을 제공하고 아이를 낳아 주기 위한 존재로 여기는 사회에서 규격에서 벗어나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남자로 태어난 글리는 쓸모 없는 불량품 취급을 받는다.
' 너희가 나약하고 쓸모없는 것은 모두 알파의 아이를 낳기 위해서인데
아이도 낳지 못하는 오메가라니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구나. '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글리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남자 오메가인데도 관심을 보여준 강력한 알파 해켓을 만나 기뻤던 것도 잠시 웃는 얼굴로 굴욕적인 폭언과 폭력에 가까운 첫 관계에 공포를 느끼고 도망치고 만다. 1권은 오메가 공장에서 탈출했다가 2년만에 붙잡혀 온 글리를 개처럼 목줄에 묶여 알몸으로 끌려다니는 굴욕적인 방식으로 벌을 주는 해켓으로 인해 상당히 피폐하다. 알파에게 순종하도록 세뇌당하며 자랐음에도 주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글리가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강제 각인당한다. 각인이란 어디까지나 알파가 오메가를 종속시키기 위해서, 알파에게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만들어 낸 보이지 않은 족쇄였다.
" 너는 나만을 생각해야지.”
해켓은 다정한 얼굴로 기대게 만들어 놓고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글리를 위험한 계략의 미끼로 서슴없이 내던지고 그를 거역한 자들을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하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글리를 길들이면서도 스스로를 관대한 주인이라 착각하는 이기적인 알파였다. 어떤 알파보다 정점에 선 잔혹한 독재자인 그는 오메가들의 인생을 언제라도 갈가리 찢을 수 있는 포식자였기에 지금보다 더한 시궁창에 내던져 질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강제 각인으로 도망칠 의지까지 박탈당한 글리는 체념하고 오메가의 본능대로 주인인 해켓에게 순종하며 살려 했지만, 인간다운 삶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누려봤기에 점점 마음이 병들어 간다.
" 오메가치고 지나치게 영리한 저애의 머리가 문제입니다.
더구나 이 년간 도피 생활을 하면서 베타의 세상을 너무 많이 봤어요.
저애는 '인간'이 뭔지를 압니다."
오메가를 진심으로 대하는 알파따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메가의 본능은 글리로 하여금 해켓의 다정함을 믿고 의지 하고 싶게 만들었다. 단지 독점욕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해도 글리를 특별하게 아껴주는 것은 사실이기에 들떴다가 그의 애정이 인간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매번 좌절한다. 아이를 낳고 쓸모를 상실한 오메가들에게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지, 태어난 아이가 오메가라면 어떤 삶을 살게 될 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달콤한 말로 안심시키는 해켓을 믿을 수 없는 글리. 온전하게 믿을 수 없는 이기적이고 잔인한 알파를 사랑하게 된 스스로를 경멸하고 인간성에 대한 갈망으로 괴로워하는 글리의 정신은 더 황폐해져 간다.
" 알파를 믿는 건 바보짓이지.
그들은 거짓말을 아주 쉽게 하고 책임도 지지 않아."
글리의 정신이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망가지고 나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후회 하는 해켓. 그리고 오메가들이 그런 삶을 살게 된 음모의 진실이 드러난다. 오래전에 고장나서 스스로가 강철 같은 사내라 굳게 믿고 이기적이고 어긋난 판단을 내린 어리석은 알파때문에 모든 오메가들이 희생양이 되어 비참하게 살아야 했냐고 분노하는 글리의 심정에 공감했다. 최악으로 치닷는 두 사람의 갈등 해결책은 뻔했지만 최소한의 면죄부는 던져줄 지언정 해켓이 저지른 죄를 억지스럽게 포장하려하지 않은 전개가 마음에 들었다.
글리의 사랑은 강제 각인된 오메가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고 어딘지 망가진 해켓은 사랑을 하면서도 그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불완전한 사랑도 사랑이기에 글리는 자신의 인생을 파괴한 원인이자 가해자인 해켓과 함께 하는 길을 선택했다. 잔인하고 강력한 알파지만 글리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한 사내로 전락한 해켓이 진심을 다해 노력하는 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글리의 소망은 이루어 질 것이다. 그리고, 하루 아침에 오메가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해켓의 강력한 비호아래 글리를 비롯한 의식있는 알파들이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고 있으니 오메가들의 삶도 조금씩 나아지리라 믿는다.
인간은 불완전한 채로도 앞으로 걸어야만 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딘가로 나가간다는 뜻이다. 갈 곳없이 떠도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었다.
내 인생이 그랬고 오메가들의 인생이 그랬다.
나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영구히 회복되지 못할 장애를 얻은 내 정신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일생을, 똑바로 서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내가 인간답게 살고자 발버둥을 치더라도 나는 정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오메가였다.
베타들의 세상에 숨어 떠돌 때에도 나는 몇 번이나 느꼈었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치명적인 차이들을.
아마도 나는 영원히 '인간'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좌절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룰 수 없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이룰 수 없을 리가 없었다.
나는 누군가가 그것을 이루길 바랐다. 가능하다면 가까운 곳에서.
천천히, 조금씩이라도. - 『이스케이프 』2권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