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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고백 머묾 세계문학 사랑 3부작
기 드 모파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머묾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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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고백기 드 모파상 구영옥 옮김 삶과 세상의 심연(深淵)

 

 번쩍번쩍, 벌겋게 달려와서 토해내는 앰뷸런스 소리가 어둠을 갈기갈기 찢어발긴다. 그 날카로운 소리가 강추위에 벌벌 떨던 사람들을 더 움츠리게 했다. 지난주부터 몰아친 시베리아 한파가 물러서지 않고 기세를 떨치고 있다. 오늘따라 매서운 바람까지 불어왔다. 늦게 달려온 시내버스는 바깥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마스크와 귀마개를 벗지 못하고 히터가 나오는 차가운 의자에 앉자마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 강추위는 언제 물러갈까? 차창으로 어두운 삶과 세상이 달려든다.

 

 기 드 모파상의 첫눈, 고백이라는 책은 단숨에 읽힌다. 모파상이 쓴 단편소설들은 지금도 여전히 삶과 세상의 심연을 읽어내는 척도다. 삶과 세상의 어둠과 빛이 흐르는 모파상의 소설들은 고전(古典)이다. <첫눈>의 시작에서 남프랑스 칸(Cannes) 해안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크루아제트의 긴 산책로는 푸른 바닷가를 따라 부드럽게 굽어 있다. 오른쪽 멀리 에스테렐 산맥이 바다 속으로 길게 뻗어 들어가며, 그 뽀족하고 기묘한 봉우리들이 남부 특유의 아름다운 장식처럼 지평선을 막고 있다.

왼편에는 생마르그리트 섬과 생오노라 섬이 물 위에 누워, 소나무로 덮인 산등성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토록 아름답고 온화한 곳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젊은 여인이 있다. 여인은 4년 전 재산상의 이유로 노르망디 출신의 신사 앙리와 결혼한다. 노르망디 겨울은 시베리아 한파처럼 지독하다. 그 추위에 견디기 위해 여인은 앙리에게 난방기 설치를 부탁한다. 하지만 앙리는 부인의 부탁을 농담으로 생각하며 거절한다.

 

 “여기에 난방기라니! 난방기라니! ! ! ! 정말 기막힌 농담이군!”


 1월 초, 그녀에게 큰 불행이 닥쳤다. 부모님이 마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녀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파리로 갔다. 그리고 여섯 달 동안 슬픔만이 그녀의 마음을 지배했다.

 

 겨울에 추위가 다시 닥쳤을 때 여인은 그 어떤 희망이라도 가질 수 없었다. 암울하고 절망적인 생각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여인은 결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도 받았다. 그녀의 얼어붙은 삶에 죽음이 다가왔다.

 

 그녀는 분명 알고 있다. 자신이 곧 죽게 되리라는 것을, 다가올 봄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산책로를 따라 지금 그녀 곁을 지나가는 이 사람들이 다시 이 온화한 고장의 따뜻한 공기를 마시러 오리라는 것을. 조금 더 자란 아이들과 함께, 여전히 희망과 애정, 행복으로 가득 찬 마음을 안고서. 그때쯤이면 그녀는 참나무 관 속에서 살이 썩고 직접 수의로 고른 비단옷 속에 뼈만이 누워 있으리라는 것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둠이 내렸다.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은 멀고 추웠다. 정류장 한파 대피소는 많은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4호선 지하철 길음역에 도착하는 마을버스로 줄지어 떨고 있던 승객들이 우르르 달려든다. 두 번 더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북악터널과 굽은 자락 길을 달려 집 부근 정류장에 내려 백련교를 건넜다.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와서 구경하던 폭포는 얼어붙어 있었다.

 집으로 꺾어드는 오르막길 도로에 소방차 두 대가 빨간 불빛으로 번쩍였다. 동네 어디서 불이 났는가? 불안한 마음으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경찰차 두 대가 우리 빌라 앞 3층 주택에 서있었다. 경찰과 형사들이 수사 중이라는 노란 경찰수사선을 두르고 있었다. 깜짝 놀라 가까이 다가가는 나를 검은 형사가 막아섰다, 경찰 한 명은 3층 주인집으로 성큼성큼 올라가 창문을 열고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어두운 동네를 밝히던 크리스마스트리는 꺼져 1층 벽에 처박혀있었다. 그 벽 계단 난간 쇠창살이 모두 부러져 있었다.

 10년 전에 전세로 살았던 3층 주인집 부인은 K와 친해져 서로 가슴 속의 말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친척에게 선 보증으로 큰 빚을 갚고 부인과 주인아저씨는 마침내 3층 집을 사서 전세를 놓았다. 그 뼈를 깎는 세월을 부인은 웃으며 K에게 털어놓았다. 재작년 여름날 퇴근길에 만난 주인아저씨와 생맥주를 마시며 웃었던 기억이 났다. 이들에게 무슨 불행이 닥쳤는가?

 

 루아젤 부인은 궁핍한 삶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용감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 큰 빚을 갚아야 했다. 그녀는 모두 갚을 작정이었다. 하녀를 내보내고 집을 옮겼으며 작은 다락방에 세를 들였다.

 그녀는 힘든 집안일과 주방의 고된 허드렛일을 직접 했다. 기름 묻은 냄비 바닥을 뷴홍빛 손톱이 닳도록 설거지 했다. 지저분한 내의와 셔츠, 행주를 비누로 빨라 줄에 널어 말렸다. 매일 아침 쓰레기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물을 길어 올라올 때면 층마다 숨을 몰아쉬며 쉬어야 했다. 서민 여자들처럼 옷을 입고 과일 가게, 식료품 가게, 정육점에 들렀다. 팔에 바구니를 걸고 욕을 들으면서도 값을 깎고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애썼다.

 기 드 모파상이 쓴 <목걸이>라는 단편소설에서 루이젤 부인이 한 푼이라도 아껴 갚아야 할 빚은 36천 프랑과 그 빚의 이자다. 루이젤 부인은 친구 포레스티에 부인에게 목걸이를 빌려 만찬회에 참석하여 빛난다. 하지만 만찬 후 그 목걸이를 잃어버린다. 친구에게 빌린 똑같은 목걸이 가격이 36천 프랑이다. 루아젤 부부가 이 목걸이 값을 빚으로 산다. 그들이 갚아야 할 많은 빚은 그들의 삶을 파괴했다.

 

 매달 어음을 갚아야 했고 갱신해야 했으며 돈을 마련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남편은 저녁마다 한 상인의 장부를 정리하는 일을 했고 밤에는 종종 장당 5수를 받고 서류를 작성했다.

 그런 삶이 10년 동안 지속되었다.

 10년이 지나자 그들은 마침내 모든 빚을 갚았다. 고리에 복리로 불어난 이자까지 전부 갚았다.

 

 폭삭 늙어버린 루아젤 부인은 어느 일요일 친구 포레스티에 부인을 만난다.

 

 “오랜만이야, 잔느.”

 “그런데······ 부인···! 저는 당신을 모르겠는데요···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아요.”

 “아니야. 나야, 마틸드 루아젤.”

 “···! 세상에, 마틸드, 너 정말 변했구나···!”

 

 루아젤 부인은 친구 포레스티에의 잃어버린 목걸이 때문에 10년 동안 빚을 갚으며 고생한 이야기를 홀가분하게 털어놓았다.

 

 “! 불쌍한 마틸드! 내 목걸이는 가짜였어. 기껏해야 500프랑밖에 안 하는 목걸이···!”

 

 <목걸이>의 불행은 <보석>이라는 단편소설에서는 다르게 그려진다. 모파상의 입체적인 소설로 행복과 불행, 빛과 어둠을 그 심연까지 들여다보게 된다. 그 심연은 과거에서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닿아있다. 고통과 슬픔은 끝없이 파도친다. 빛은 어둠에 삼켜지고 삶은 죽음에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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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의 초대 - 뜻밖의 생각
민이언 지음 / 미드나잇인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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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생각철학으로의 초대민이언 지음 흐르는 삶과 죽음

 

 출근길 버스 차창으로 어둠이 흐른다. 삶과 어두운 세상이 흐른다. 오늘따라 출근버스는 히터를 세게 틀어놓고 달린다. 벌벌 떨던 새벽의 추위가 멀어졌다. 홍제동 유진상가 정류장에서 양손에 지팡이를 잡은 할머니를 뒤따라 승객들이 우르르 버스에 오른다. 이 춥고 어두운 새벽에 할머니와 승객들은 어디로 가시는가. 검은 배낭을 짊어진 남자가 내 옆에 앉자마다 스마트폰으로 태국 단어를 공부한다. 앞에 앉은 여인은 금융 앱을 열고 생활비를 계산한다. ‘고정지출이란 제목 아래 내역과 금액이 흐릿하게 보인다. 다른 삶과 세상에 눈길을 멈추고 내 일을 하자는 생각에, 나는 뜻밖의 생각철학으로의 초대이라는 책을 꺼내 읽는다. ‘관성으로부터의 자유라는 프롤로그에 이런 명언이 있다.

 

 “벽돌집을 짓지 말라!”

 징기스칸의 유언으로 알려져 있는 이 한 마디가 결국엔 들뢰즈의 철학서사인 노마드. 타성으로부터 탈주하고 관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언어로 잇대자면 벽돌집을 짓는 목적은 사유에 해당하며, 벽돌은 사물의 본성이 공간으로 뻗어 나온 연장이다.

 

 현대 철학의 가장 대중적인 키워드이기도 한 노마드의 스펙트럼을 유목의 번역으로 좁힐 필요는 없다. 충분히 여행의 모티브로 나아갈 수 있는 사유방식이다. 일상으로 벗어나 스스로 낯설음에 뛰어드는 탈주를 통해, 관성으로 흘러가고 있던 일상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관성 앞에 가로 놓이는 우연들의 배열 속에서 이전의 나와 차이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런 사유방식으로 발전을 반복하는 생활체계가, 다른 날들과 변별되는 차이의 자아정체성으로 순환한다.

 

 세검정을 지나자 장애인석에 앉은 할머니가 지팡이로 하차 벨을 누른다. 겨울 방한복 모자와 마스크로 머리와 얼굴을 감싼 할머니가 버스에서 내리고, 또 다른 승객들이 버스에 오른다. 버스에서 내린 할머니는 세검정 초등학교 정류장에 서있고, 파란 버스는 북한산 자락을 달린다. 어머니가 살아계시면 저 할머니 연세쯤 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계셔도 되는 삶인데, 죽음이 다가왔다. 내게도 이제 죽음은 남아있는 삶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서있다. 요즈음엔 자꾸 몸에 통증이 일어나서 날뛴다. 몇 년 전부터 두 무릎이 쑤셔오더니, 한 달 전에 목과 어깨가 아프고 팔이 저려왔다. 매주 두 번 이상 한의원에 가서 침으로 통증을 다스린다. 지난주부터 엉덩이뼈가 아파 의자에 앉아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부랴부랴 달려간 한의원에서 목에서 엉덩이까지 침을 맞았다. 죽음 같은 슬픔과 고통이 흐른다.

 

 민이언이 쓴 철학으로의 초대이라는 책에서도 죽음은 사유된다. 죽음은 무. 탈북한 주민들, 고통의 사람들을 소설로 묘사한 어느 재미 디아스포라 작가는 죽음 앞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언제 어디서 내 죽음이 다가올까? 죽음 앞에 부끄러운 나는 언제 어디서 죽음으로 걸어갈까?

 

 저 너머의 시간에 뭐가 있는지 누구도 말해줄 수가 없다.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죽어 있고, 죽음을 경험했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뭘 겪고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도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 저 너머의 시간에 뭐가 있든 간에 죽음은 최강의 불안으로 자리해 이 삶을 관장한다.

실존의 계보들에게서 죽음이 큰 주제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유한함 속에서 삶의 의미가 발견된다. 불완의 존재로서 맞이할 수 밖에 없는 끝이, 도리어 적극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무한의 동력이다. 단 한 번이기에 누구에게나 소중할 수밖에 없는 삶의 시간, 그것이 삶의 대척에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죽음의 기능이다.


 북한산 자락을 달리는 버스가 북악터널에 널름 삼켜진다. 터널을 밝히는 불빛 속에서 어둠이 흐른다. 지난주에 버스로 달렸던 태백의 어둠이 흐른다. 역전에서 잡아탄 버스 차창으로 태백의 밤거리가 흘러갔다.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은 도로변의 많은 집에서 불빛조차 비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거리는 어둠의 밑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죽음의 집들은 도시의 끝자락까지 이어졌다가 뚝 끊어졌다. 석탄을 캐던 역동적인 삶들은 오래전에 죽음의 저편으로 돌아갔고, 몇 개 남은 탄광도 끝내 문을 닫았다. 폐광촌에 내리자마자 어릴 때 겨울처럼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쳤다. 이토록 춥고 어두운 곳에 왜 다시 왔는지 알 수가 없다고 K가 투덜댔다. 삶들이 죽음으로 흘러간 어두운 고향에 다시 온 이유가 있을까. 부모와 함께 살았던 어제의 시공간이 이토록 잊히지 않는가. 검은 산등성이 위로 초생달이 흐릿하다.


 시간 앞에서 이런 항상성은 지속하는 것이 현상유지를 뜻하지는 않는다. 시간을 강물에 비유하자면, 흐름에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항상 일정한 속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지속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죽은 것들만 떠내려간다. 어제의 관성을 유지하는 오늘이라면, 쇠락의 방향으로 떠내려가고 있는, 그 또한 결국엔 어제일 뿐이다. 내일은 저절로 도래하는 시간이 아니다. 어제의 지점으로부터 계속 앞으로 나아갈 때야 비로소 마주칠 수 있다.

 

 북악터널을 빠져나온 버스가 K정류장에 가까워지자 내 옆의 남자가 스마트폰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는 태국어를 공부할까. 모국어의 뿌리에서 떠나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삶과 세상의 운동이다. 경계를 넘는 운동이 고향이라는 곳을 잊고 사라지게 하지 않을까. 고향이라는 곳도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지는 생성되는 공간이다. 그 어디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 고향이다. 검은 배낭의 남자가 차창으로 멀어졌다. 고정 지출을 계산하던 여인은 이제 수입을 계산한다. 수입 항목이 지출 항목보다 적다. 대추나무에 대추처럼 여기저기 달렸던 내 빚으로 괴로웠던 어제가 차창으로 다가왔다 멀어졌다. 빚으로 고통을 당했지만 그때는 사랑이 숨 쉬고 있었다. 사랑을 잃은 이제는 과거보다 더 고통을 맛본다. 슬픔도 깊고 길다. Y오거리 정류장에서 내릴 때까지 여인의 계산은 끝나지 않는다. 정릉천변을 따라 사무실로 걸어가는 길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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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이지 않은 세상에서 - 소설가를 꿈꾸는 어느 작가의 고백
강주원 지음 / 디페랑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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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를 꿈꾸는 어느 작가의 고백내가 쓰이지 않은 세상에서강주원 글 고통

 

 번쩍, 번개가 치고 얼마 후 우르릉꽝, 천둥소리가 났다. 어둠으로 뒤덮인 하늘에서 비가 퍼붓는다. 폭염으로 달궈진 거리와 집이 비에 푹 젖는다. 먹구름은 빠르게 흐르고 비바람이 내리친다. 폭염으로 고통을 겪은 삶과 세상은 이제 폭우로 젖는다. 햇볕에 불타고 물에 잠기는 삶과 세상이 앞으로 닥칠 고통과 슬픔처럼 읽혀진다. 닥쳐오는 삶과 세상의 트라우마는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강주원이 쓴 소설가를 꿈꾸는 어느 작가의 고백이라는 부제가 붙은 내가 쓰이지 않은 세상에서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글쓰기로 안내하는 감동적인 책이다. ‘글로 쓰면 알게 되는 것들이라는 글에 <트럼보>라는 영화이야기가 나온다.

 

 “투우를 보는데 소가 죽은 거야. 다들 환호했지만 한 소년은 경기장 펜스에서 울고 있었지. 나는 그 이유가 늘 궁금했어.”

 “글로 써 보면 알겠지.”

 영화 <트럼보>(2015)에서, 머릿속을 맴도는 오랜 의문을 털어놓는 주인공에게 동료 작가는 말한다. 글로 써 보면 알게 될 거라고, 자네도 작가면서 그걸 몰라? 하는 투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그것은 결코 대수로운 일이 아님을 나는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밤새 야근을 한 피로를 씻기 위해 안산(鞍山) 자락의 집에서 목욕탕에 가는 길이 가파르다. 동파방지 열선이 깔려 있는 그 길을 몸을 돌려 뒤로 한발 한발 내려갔다. 가지고 간 카드가 고장 나서 외상으로 목욕을 하고 집에서 현금을 가지고 다시 목욕탕으로 내려갔다. 옹벽에 어느 할아버지가 난간을 붙잡고 서있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목욕비를 내고 올라오는 길에 갑자기 할아버지가 난간에 쓰려졌다. 뛰어가서 할아버지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벌벌 떠는 할아버지의 팔과 다리는 통나무처럼 퉁퉁 부어있었다. 하얀 셔츠 왼쪽 팔목에 피가 스며들고, 손목은 아스파트에 까져 멍이 시커멓게 들어있었다. 목욕탕에 가기 전에 부축하지 않은 일이 후회되고,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우리는 쓰기를 통해 진실을 구하지만, 쓰다 보면 앎이 우리를 발견하기도 한다. 처음 한두 문장에선 잘 드러나지 않는다. 쓰다 보면, 계속해서 써 내려가다 보면 어디선가 빼꼼 고개 내미는 무언가를 발견할지도. 그때 우리의 펜은 낚싯대가 되었다가 뜨게바늘로 변했다가 다시 긴 여정을 돕는 지팡이가 되곤 한다. 지혜의 구원을 향한.

 

 <트럼보> 속 대사처럼 그 역시 글로써 깨달은 거라 믿는다. 쓰는 인생을, 씀으로써 답이 되게 만든 것이다.

 

 피를 흘리는 할아버지를 부축하여 주차장을 지나 빌라 계단까지 끙끙거리며 걸어갔다. 오래 전에 거리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던 할아버지가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을 잃다니······. 빌라 지하계단에서 손잡이를 잡으며 할아버지를 1층까지 부축했다. 걸어오는 동안 힘이 빠진 할아버지는 1층 계단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옆집 할머니가 다가와서 아이구, 피가 나고 멍이 들어서 병원에 가야겠네요.”라고 말했다. 괜찮다며, 할아버지는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말해지지 않은 고통은 언젠가 우리 안에서 곰이 되거나, 침묵의 언어로 뭉치기 때문이다.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라. 취약성을 과감히 고백하라. 이런 조언이 효과를 발휘하는 건 초고 쓰기에서다.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도망가는 대신 맞서 싸우는 자세는 응당 필요하다.

 

 병마와 싸워 가면서도 펜을 않은 작가들을 안다. 아이를 재우고 겨우 노트북을 펴는 지망생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매일, 한 줄이라도 남기려는 노력들은 존중되어 마땅하다.

 

 1층 계단에서 할아버지를 일으켜 천천히 걷고 걸어서 마침내 문 앞에 섰다. 여섯 자리 비밀번호를 누르는 오른 손에도 피가 맺혀있다. 마침내 번호가 입력되고 문이 열렸다. 문 앞 소파에 할아버지를 앉혔다. 소파 너머로 보이는 거실에 머리가 허연 할머니가 누워있었다. 죽음이 누워있고 앉아 있었다. 언덕길을 올라가는 길에 땀이 흘러내렸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문학이란 언어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유토피아. 자크 데리다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기이한 영토라고도 했다.

 

 중풍으로 잘 걷지도 못하는 할아버지가 어떻게 옹벽 난간에 섰을까. 움직이지 않으면 다가오는 죽음을 떨쳐내기 위해서인가. 어머니가 움직이지 못하는 누워있는 영안실에 통곡이 터져 나왔다. 10년 넘은 일이 어제처럼 떠오른다. 죽음처럼 내리는 비가 삶과 세상을 앗아갔다.

 

 아침부터 내리던 폭우가 밤에서야 점점 가늘어졌다. 밤새도록 가는 비는 내리고 생각은 어제의 죽음으로 달려간다.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벌써 30년이 넘어섰다. 이토록 세월은 빠르고, 아침이슬처럼 짧은 삶에 고통은 길다. 슬픔도 길다.

 

 ‘소설가를 꿈꾸는 어느 작가의 고백이라는 부제가 붙은 내가 쓰이지 않은 세상에서라는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을 읽으면 당신은 어떤 글이든 쓰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상처를 들여다보고 타인의 고통도 함께 겪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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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섬 기약없는 이별
진현석 지음 / 반석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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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섬 기약없는 이별진현석 장편소설 다카시마 탄광

 

 아침부터 하늘은 잿빛으로 흐른다. 아침부터 남부지방을 할퀸 폭우가 디시 온다고 뉴스에서 보도한다. 아직 복구가 되지 않은 곳이 많은데 또 극한폭우가 다가오는가? 몰려오는 폭우로 가온은 떨어졌지만 습하고 덥다. 어제는 가을을 알리는 입추였다. 더워도 세월은 덧없이 흐르고 내일은 말복이다. 삶과 세상을 태우고 젖게 했던 이 무더운 여름도 언젠가 지나간다.

 

 청량리역에서 오른 열차가 덜컹, 도시를 출발했다. 빈 좌석이 없는 열차에 입석 승객들이 통로에 서거나 앉아있다. 차창으로 멀어지는 도시를 떠나는 것만으로도 시원하고 좋았다. 지난 극한폭염으로 등과 가슴팍에 번진 피부병이 아직도 가라앉자 않는다. 도시가 멀어진 차창으로 북한강이 흐른다. 진현석이 쓴 외딴섬 기약없는 이별이라는 장편소설을 꺼내 읽는다. ‘작가의 말에서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역사와 대면하는 작가의 결심이 있다.

 

 저는 일본에 살면서 한일관계에 관한 수많은 소식을 접하고 있습니다. 그중 몇 가지 역사적 사실에는 복잡한 한일관계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한국인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렵거나 설명이 부족해 보이는 부분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저는 단 한 번도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정면으로 마주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무작정 녹음기 하나 들고 도쿄에서 나가사키로, 강제 동원의 피해를 직접 겪으신 생존자분들을 만나기 위해 떠났습니다. 조심스러울 수 있는 주재라 걱정이 많았는데 흔쾌히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작가는 나가사키 군함도 바로 옆 다카시마 섬 탄광에 끌려가서 강제 노역을 당한 조선인들의 고통과 한을 소설로 엮어냈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버린 역사적 사실에 대면했다. 작년 일본을 찾은 한국인의 수는 약 696만 명으로 일본 관광객들 중 1위였다. 작년 11, 나는 어느 재일조선인의 죽음을 슬퍼하기 위해 나가노현 지노시(茅野市)에 갔다. 죽음과 만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까마귀 떼들이 어두운 하늘에서 울며 날아다녔다. 잊혀져가는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에 대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바다로 달리는 열차가 영월에 멈춰 섰다. 영월은 산업화시대 탄광의 출발점이었다. 종착점은 태백에서 멈춘다. 해방 후 하나뿐인 영월발전소를 돌리기 위해 태백지역의 석탄이 묵호에서 인천까지 바다를 통해 실려 갔다. 그 석탄은 인천에서 영월까지 탄차가 실려 공급되었다. 태백지역의 탄광으로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이 몰려들었다. 탄광은 내게 근원적인 그림이다.

 

 탄광에 들어가면 화장실은커녕 어디 시원하게 설사를 싸지를 구멍도 마땅치 않았다.처음 배변의 물꼬를 튼 건 가장 나이가 어린 순성이었다. 고작 열여섯밖에 안 된 순성이는 강원도 강릉 출신이었고 바닷가 옆에서 자라 그나마 생선이나 날것을 잘 먹는 편이었는데도 여기서 배급받은 바닷물 국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돼지우리보다도 못한 탄광 안에서의 모든 환경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보단 인간임을 포기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개인적으로 순사라든지 일본 녀석들과 동행하거나 말을 섞는 일은 없었다. 노무계 사람들이나 관리직원 또는 함바장 같은 사람들은 물론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근무조의 십장, 그리고 사키야마(숙련공)들과는 갱 안에서 일하면서 말을 섞을 순 있었다.

 

 태백역에 멈춰선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가는 비가 내리치고 바람이 불어왔다. 숱한 세월이 흘렀지만 바람은 그 옛날 탄광의 시절을 말하는 듯하다. 고등학교 수업을 마치고 이 역전에서 버스를 타고 어머니가 계시던 집으로 달렸다. 차창으로 탄광 폐수가 흐르고 막장일을 마친 석공(대한석탄공사) 광부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광부들 중에 보갱에서 일을 마친 아버지가 있었다. ‘사키야마라는 광부 숙련공들도 예배당 고개를 넘어 탄광촌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작다면 작다고 할 수 있는 갑갑한 섬에 비추는 햇살, 불어오는 바람, 진한 풀냄새와 귓가를 어지럽히는 새들, 갈 길을 방해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풀벌레들과 벌들 그리고 친구라도 되어주겠다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봐 주는 주인 없는 고양이들. 사방이 바다로 고립되어 있지만 그래도 생명력을 한껏 뽐내는 중인 나가사키. 오하토에서 뱃길로 한 시간 반이나 걸리는 푸른 섬이다.

 

 『외딴섬 기약없는 이별이라는 소설의 에필로그에 작가의 통찰과 반성이 있다. 역사적 사실에 대면하여 이야기는 일본 어디든 존재한다.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삿포르 등 대도시를 비롯해 작은 시골 마을까지 현재의 일본은 외관상 우리와도 별반 다르지 않은 분위기의 가까운 나라이다. 특히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나 국도를 달리다 보면 마주치는 풍경은 그렇게 한국과 비슷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안 어딘가에 묻혀 있는 아픈 역사를 나눠 짊어진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피와 살점과 눈물 그리고 땀방울은 세월이 지나도 어딘가로 튀어나와 보일 길이 거의 없다. 그것은 비단 강제 노역 피해자들만이 아니다. 우리의 누군가의 할머니,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니면 형제 친구들. 각자의 사연을 들고 낯선 이국땅에 발을 들여놓고는 어렵게 살아야 했던 사람들 전부이다.

 

 각자의 사연과 맺힌 한은 사방으로 소리 없이 뿌려져 지금도 바람을 타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할지 모른다, 그것은 너무 방대해 도통 감도 잡히지 않을 정도일 것이다.

 

 그들의 마지막 이야기는 우리들이 사진으로 찍어 추억을 남기려던 어떤 곳의 바위일 수도, 어느 바닷가의 모래사장 아래일 수도, 기가 막히게 맛있는 덴푸라 가게 옆 어디가 될 수도 있다.

 

 나가노현 지노시에서 돌아가신 재일조선인 S선생은 내게 조신인들이 끌려가셔 강제 노역을 당한 일본의 탄광을 아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없다고 대답한 내가 지금도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 선생은 내게 역사와 삶 속에서 타인의 고통과 절망을 느끼기를 희망했다. 그분이 돌아가신 지금에야 그 말은 나에 대한 사랑임을 안다. 이것이 슬프다. 어쨌든 다카시마 탄광을 다룬 외딴섬 기약없는 이별이라는 소설로 일본의 탄광을 공부하는 시작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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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려고 어른이 된 건 아니지만
이근후.나인 지음 / 자유로운상상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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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려고 어른이 된 것 아니지만- ‘마음의 나이테

 

 아침부터 덥다. 집에서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출근길이 땀으로 젖는다. 벌써 온열질환자 사망자가 18 으로 늘어났고 폐사된 가축은 133만 마리가 넘어섰다고 뉴스에서 보도한다. 얼마 전에는 폭우로 생활터전이 물바다가 되었는데, 이제는 폭염이 삶과 세상을 활활 불태우고 있다. 이상기후로 삶과 세상이 파괴되고 있다. 10분후에 버스가 도착한다고 안내판이 알린다. 할머니 한 분이 부채질을 하며 안내판 아래 의자에 앉아 있다. 이른 아침, 이 무더운 날씨에 어디로 가실 일이 있을까? 이 불타는 더위가 언제 수그러질까? 조금 전에 먹은 피부 항생제로 머리가 아프고 졸음이 온다.


 어제 얼굴과 목과 등에 붉은 반점이 번졌다. 급히 회사 근처 피부과에 올라갔다. 스크린에 이빨 치료 화면이 보여 웃음이 났고 내 이름이 호명되어 접수처로 다가갔다. “어디서 아프세요?”라는 질문에 울긋불긋한 얼굴을 보였다. “여기는 치과인데요.” 간호사에게 고개를 숙이고 급히 7층 피부과 올라갔다. 진료 접수를 하고 털썩 의자에 앉았다. 이제 내게도 늙음이 닥쳐왔고 죽음은 점점 가까워졌다. 팔에도 붉은 것이 피어오른다.

 

 무덥고 힘든 하루의 근무가 끝나고 버스에 올랐다.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외곽길이 멀다. 이제 계약직으로 일을 하는 회사 생활이 도심에서 외곽으로 밀려났다. 한 번 더 갈아탄 버스 차창으로 북한산 자락이 다가온다. 버스 안도 덥고, 앞에 앉은 아주머니가 연신 부채질을 해댄다. ‘근후랑 나인이 전하는 마음을 조각하는 시간이라는 부제가 붙은 어른이 되려고 어른이 된 건 아니지만이라는 책을 꺼내 읽는다. 책을 읽을수록 더위가 가시고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죽음이 올 때까지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이근후 교수님이 말씀하신다.

 

 생각해보면 노인이 된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나이다. 그것은 내가 나이테를 두르고 싶어 두른 것이 아니라 세월이 가면 자연적으로 감겨 지는 나이테다. 이에 비해 마음이라는 것은 세월이 간다고 감기는 나이테가 아니다. 태어나서 생을 하직할 때까지 자기 자신이 갈고 닦고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 마음의 나이테다. 그런 생각에서 나는 가슴속에 철든 소년을 품고 사는 노인이라면 어른이라도 공경해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다. 철들지 않는 소년을 품고 사는 오인은 인격적인 성장이 고착되어 있거나 성장이 머무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니 철든 소년을 품고 사는 인격적인 성장이 지속하는 노인은 상대적으로 어른이란 존중을 받을 만하다.

 

 전반부는 나인이 후반부는 이근후 교수가 쓴 어른이 되려고 어른이 된 건 아니지만이라는 책은 삶의 고통을 마주보고 견뎌낼 지혜로 가득하다. 90살 나이테가 새겨진 이근후 교수는 변화를 말씀하신다. 삶과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세상 만물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라는 글귀가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산천은 의구(옛날 그대로 변함없이)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변화하는 속도가 늦어 우리가 감지하지 못할 뿐 변한다. 그 증거로 지구가 탄생하고 지구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 오랜 세월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변해도 많이 변했을 것이다.

 

 삶과 세상은 변한다. 그 변화하는 속도에 따라 사람도 변하고 늙어간다.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세월 속에 내가 그 얼마나 마음을 갈고 닦았는지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나로 인해 이 세상에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왜 그때 그렇게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을까? 끊이지 않는 이런 생각에 괴롭고 슬프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던 마음이 이제는 후회된다. 아울러 내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을 반성한다.

 

 마음이 변한다면 어떻게 변하는 게 바람직할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에게 영향을 주는 자연 그리고 내가 사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모여 사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대인관계 등을 그것에 맞게 적절하게 변화하면서 적응한다면 그는 현실 검증이 뛰어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에겐 삶을 통하여 이 마음이 변화하는 계기가 있다.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 마음만 변한다. 그런 일은 없다.

 

 세월은 우리에게 약도 되고, 스승이 된다는 것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갈 수 있다면 삶은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내일에 하나 뿐인 아들이 먼 타국으로 돌아간다. 오랜 학업 끝에 이제야 취업이 되어 서울에서 취업비자를 받고 교육을 마쳤다. 아이는 이제 서른이 가까워진다. “어른이 되려고 어른이 된 건 아니지만이라는 책에서 나인은 이렇게 서른을 말한다. 지나갔지만 내게도 고민하던 서른이 있었다.

 

 서른. 서른을 압박하는 많은 것 중에 사회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부를 축적하는 입신양명 즉, ‘성공이 새겨져 있다면 너뮤 이른 욕심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성공을 품기 전에 자신을 품어야 하고, 성공보다는 충족의 의미를 파고들어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해 주어야 한다고 나의 서른에게 말해 주고 싶다.

 

 살면서 점점 크게 와닿는 것은, 나를 지켜주는 것은 남으로부터 얻은 것이 아닌, 나 스스로 온갖 발품으로 찾은 것과, 나의 가슴으로 깨달은 것, 그리고 내 손끝으로 옮긴 행동이었다. 몇 번이야 남이 주는 것과 내가 찾은 것이 똑 같은 결괏값을 주는 것 같아도 멀리 보면 남에게 얻는 것은 오래 머물러주지 아니하고, 내가 얻은 것이 나를 돕는다는 겻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알고 있던 입신과 양명은, 돈과 명예의 유형적인 성공이 아닌, 스스로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 세우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배를 불리는 유형보다 더욱 선명한 무형의 자산이 나만의 삶으로 새겨 설령, 누구보다 성공할 자신이 없다 해도, 적어도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해석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게 서른에 할 일이다.

 

 아이에게 위의 문장을 얘기하고 어른이 되려고 어른이 된 건 아니지만이라는 책을 권했다. 아이는 며칠 동안 책을 재미있게 읽고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내일 먼 타국으로 갈 때 책을 가져간다고 했다. 아이의 서른이 나인의 글처럼 행복의 출발점이 되면 좋겠다. 마음의 나이테가 굵어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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