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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위의 삶 - 뇌종양 전문 신경외과 의사가 수술실에서 마주한 죽음과 희망의 간극
라훌 잔디얼 지음, 정지호 옮김 / 심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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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위의 삶』 Life on a Knife’s Edge 라훌 잔디얼 지음 정지호 옮김 – 아버지의 죽음

 

 아침부터 가는 비가 내린다잿빛으로 뒤덮어 있는 구름들은 여름날처럼 빠르게 흐른다하루 일과 시간도 우울하게 흐른다오후에 가는 비는 진눈깨비로 변해 막 내리친다그것들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녹아서 빗물이 되어 흐른다거친 바람이 하루 종일 잦아들지 않고 잿빛도 걷히지 않는다어둠이 내리자 진눈깨비는 눈으로 훨훨 날린다우수雨水가 지났는데 날씨는 이토록 변화무쌍하게 겨울을 훑는다이런 어두운 날씨가 고뇌의 삶처럼 읽힌다이런 날에 죽음이 내리지 않을까.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벌써 30년이 넘어섰다이제 곧 내가 돌아가신 아버지 연세만큼 나이를 먹는다덧없는 세월은 이토록 비정非情하다아이를 먹이고 가르치는 지금에야 돌아가신 아버지 심정을 조금 알 듯하다어리석은 자식을 가르치려고 애쓰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잊히지 않는 어제 일이 그저 슬프고 괴롭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아버님이 갑자기 쓰러지셨다급히 서대문 X병원으로 모셔가서 받은 검사 결과는 뇌종양이었다외과의사는 뇌 검사 결과를 말하고 고개를 저었다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걷지 못하셨고 말을 잃었다왜 뇌종양이라는 치명적인 병이 아버지에게 생겼을까여름 내내 병마病魔와 싸우던 아버지는 그해 가을 넘기지 못했다.

 

 뇌종양 전문 신경외과 의사이자 뇌 과학자인 라훌 잔디얼Rahul Jandial이 쓴 칼날 위의 삶이라는 책을 읽었다. ‘칼날 위의 삶이라는 제목처럼 이 책은 죽음 앞에 선 삶을 성찰하게 한다그 성찰의 도구가 의학醫學뿐만 아니라 과학科學문학文學철학哲學이다이 책은 총탄을 맞은 여성을 긴박하게 수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지진인줄 알았지만실은 헬리콥터가 옥상에 착륙하면서 생긴 진동이었다이건 당시 외과 인턴이었던 내가 60초 안에 외상 소생실trauma bay의 지정 위치로 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한 여성이 빗나간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헬리콥터가로 옮겨졌다이송침대가 병원 문을 박차고 들어왔을 때 환자의 혈압은 곤두박질쳤다모니터로 보이는 맥박 수도 급격히 떨어지고 있어환자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말해주었다담당 외과 의사가 이 환자의 왼쪽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갈비뼈 사이를 메스로 가르더니 나에게 이 환자의 심장을 마사지하라고 지시했다나는 왼손을 두 갈비뼈 사이에 가까스로 끼워 넣었다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손이 비집고 들어간 모양새였다손목 정도까지 넣으니 팽팽하게 늘어난 갈비뼈가 내 손목 위에 얹히는 게 느껴졌다이어서 미끄러운 심장 밑부분을 움켜쥐려고 손을 돌리니 갈비뼈가 내 손을 받아들이며 부러졌다.

 

 외상 소생실에서 응급처치를 받은 여성은 급박하게 수술실로 옮겨져 수술대에 눕혀졌다잔디얼을 포함한 네 명의 의사가 혼연일체로 혼돈 속에서 미친 듯이 여성을 수술했다삶과 죽음을 가리는 네 시간 수술 끝에 혼돈이 걷히고 질서가 잡혔다여성에게 죽음은 사라지고생명의 수술에 참여한 잔디얼은 기쁨을 맛본다하지만 잔디얼 앞에 실패의 슬픔이 소용돌이친다.

 

 12살의 캐리나는 척수뼈 뒤쪽에 기형뼈가 자라고 있는 척수이분증을 앓고 있다잔디얼은 캐리나를 수술대에 엎드려 놓고 기형뼈를 도려내는 수술 후에 캐리나를 바로 눕혀야 했다그때 잔디얼은 캐리나 수술부위가 하중을 받는 문제를 직면하지만 더 이상 보강 조치를 하지 않는다이 결과 심각한 합병증으로 캐리나는 불구가 된다한 번의 실수가 이토록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잔디얼은 이 실수를 오랫동안 괴로워한다.

 

 『칼날 위의 삶이라는 책에서 잔디얼은 장 도미니크 보비Jean Dominique Bauby의 잠수종과 나비를 말한다프랑스 언론인이었던 보비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깨어났을 때 감금증후군locked-in syndrome을 진단받는다잠수종과 나비는 보비가 눈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쓴 책이다.

 

 나는 사라져가고 있다서서히하지만 분명히해안에 있던 자기 집이 점점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선원처럼나는 내 과거가 점점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지켜본다내가 예전에 누렸던 삶은 내 안에서 여전히 타오르고 있지만이제 많은 부분이 기억의 재로 변해버렸다.

 

 잔디얼이 감금증후군 환자가 나눈 대화가 감동을 준다환자는 장기 기증을 원한다.

 

 돌연 이 환자는 기증이라는 의사를 표현했고당황한 나는 무엇을 기증할지 물어보았다그는 심장이라고 밝히고 이어서 라는 철자도 표시했다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고 환자는 한 단어 한 단어 확실히 표현했다. “기증”, “장기”, “장기 기증자가 되고 싶어요.”

 

 나는 환자 침대 왼쪽에서 알파벳 판을 그의 바로 앞에 들고 손가락으로 납작한 글자를 이리저리 가리켰다꽉 두 눈을 뜬 채 점자를 읽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병실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침착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려고 제각각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나는 글자를 더듬으며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호흡기를 떼기를 원하십니까?‘ ”.“ ”호흡기의 도움을 계속 받고 싶으세요?“ ”아니오.“

 

 감금증후군 환자는 장기 기증을 원하고 죽음을 받아들인다죽음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이다돌아가신 아버지 연세만큼 나이를 먹는 내게도 죽음은 가까워졌다언제 어디서 죽음이 다가올까하룻밤에 잠자듯이 죽음을 맞이했으면 좋으련만단지 희망사항이다육신을 갈기갈기 찢을 고통으로 죽음을 만날 수도 있으리라감금증후군 환자처럼 죽음을 받아들일 용기를 쌓아야한다.

 

 뇌종양과 투병鬪病하던 아버지는 가끔 정신이 돌아오면 무슨 말씀을 하려고 했다하지만 언어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아버지는 눈빛으로 무언가를 절박하게 표현했다. “아이들이 걱정돼서 그래요?”라고 어머니가 물으면 아버지는 그저 눈물만 흘리셨다결국 아버지는 유언遺言조차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셨다아버지 장례식동안 거친 비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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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가장 먼 길 - 임성순 여행 에세이
임성순 지음 / 행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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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순 여행 에세이’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 먼 길』 임성순 지음 행:북 – 고타드 패스 오토바이 투어 Gotthardpass motorcycle tour

 

 3호선 지하철A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오르자마자 매서운 바람이 불어왔다버스정류장에 서있는 사람들이 강추위에 벌벌 떨고 있었다추위는 도심으로 달리는 버스까지 끈질기게 따라왔다히터heater를 틀지 않은 버스 안은 냉동실처럼 싸늘했다고궁古宮을 스쳐 달리는 버스는 Y터널에 삼켜지고, 3차선의 굽은 터널 안은 차들로 콱 막혀있었다곧 뒤따라온 앰뷸런스와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어둠을 찢어발겼다소방차를 뒤따라 살금살금 Y터널을 벗어나는 차창으로 쓰러진 오토바이와 멈춰있는 승용차가 보였다충돌로 쓰러져 있었다헬멧을 쓴 채 교통정리를 하는 오토바이 라이더가 차창에서 멀어졌다.


 임성순 작가가 쓴 여행 에세이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 먼 길이라는 책을 읽었다이 책은 유럽을 달리는 가슴 벅찬 오토바이 여행기다컨설턴트라는 소설을 쓴 이 작가는 두카티ducati가 알프스를 넘는 유튜브를 보고 유럽 오토바이 여행을 꿈꾼다그 아름다운 꿈이 현실이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십대의 작가가 만난 가수 김광석이었다김광석 가수는 마흔살이 넘으면 할리데이비슨harleydavidson을 타고 세계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어린 작가에게 말했다하지만 가수는 마흔살이 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났고그의 노래와 언어는 작가에게 남아 소용돌이쳤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아아이건 밀린 숙제 같은 거구나’ 싶습니다그렇게 납득하지 못했던 여행 방식에 비로소 수긍하게 됐죠그러자 목표가 분명해졌습니다. ‘눈이 와서 길이 막히기 전에 알프스 넘기.’

 

 임성순 작가의 허스크바나husqvarna 오토바이가 모스크바moscow를 떠나 라트비아를 거쳐 리투아니아 항구도시 클라이페다klaipėda에서 발트 해를 건넌다코펜하겐Copenhagen에 도착한 오토바이는 함부르크hamburg를 지나 예나jena까지 빗속의 아우토반autobahn을 최고 시속 170킬로미터로 질주한다아우토반에서 덤프에 추월당하면 오토바이가 날아가기 때문이다베트남 오토바이 여행에서 나는 그토록 미친 듯이 달려본 적이 없다오토바이에 올라 체사레 파베세Cesare Pavese와 프리모 레비Primo Levi가 글을 쓰던 이탈리아 토리노torino를 출발하여 포강river Po을 따라 아드리아 바다로 달리는 것이 숙제로 남아있다어쨌든 혼자 달리는 오토바이 투어는 갈기갈기 찢어지는 육체와 정신과 싸움이다달리는 오토바이에 육체와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눕습니다온몸이 다 쑤시네요그래서 스스로에게 묻습니다무슨 영화를 누리려고 이 미친 짓을 하기로 한 거지?

 

 오토바이는 또 다시 달린다독일 예나를 출발하여 스위스 안데르마트andermatt를 지난 오토바이가 드디어 알프스 고타드 고개Gotthardpass에 올랐다작가의 오토바이 여행은 아직도 절반을 넘지 않았다달려가야 할 길은 멀고 위험하다.

 

 고타드 고개 정상에서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추위를 느끼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한랭전선에 패하길 잘했구나일주일간의 비썩어가는 신발··· 다 이걸 위한 거였구나오길 잘했다.’

 

 여행은 이제 막 반도 지나지 않은 참입니다가야 할 길은 아직 많이 남았고집은 여전히 아주 먼 곳에 있습니다그리고 남은 여정도 썩어가는 신발과 함께해야 합니다목표를 이뤘다고혹은 실패했다고 그걸로 끝은 아닙니다문제는 여전히 문제고가야 할 길은 아직 멉니다.

 

 고타드 고개를 넘은 오토바이는 이탈리아 코모como, 베네치아venezia를 지나 슬로베니아 류블랴나Ljubljana에 도착한 후 플라트비체 국립공원Plitvička jezera으로 가는 길에 사고를 당한다.

 

 신발과 오토바이가 온통 흙투성이가 된 채 산길에서 겨우 빠져나왔을 때 양손이 덜덜 떨리고 다리는 근육통으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습니다진짜 웃긴 건 이제 정오였고저는 아직 플라트비체 국립공원에 가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는 거죠지금 생각해 보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상한 길에서 빠져나와 다시 달리기 시작합니다그리고 여행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커브 길에서 미끄러집니다저는 그대로 도로 밖으로 튕겨나가 버렸습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은 임성순 작가의 오토바이 여행은 계속된다플라트비체에서 자다르로 넘어가는 길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만난다.

 

 ‘세상은 아름답구나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이토록 아름다운 오토바이 여행은 아드리아 해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Dubrovnik에서 이탈리아 남부 바리bari로 이어진다이탈리아 남부를 달린 오토바이는 로마와 제노바를 지나 프랑스 남부를 통과한 후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 달린다티레니아 해와 발레아레스 해의 푸른 파도가 고독한 오토바이를 반긴다오토바이 여행은 발렌시아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임성순 작가의 오토바이에 투어에 존경심으로 머리를 숙인다.

 

 저는 오토바이를 몰고 고타드 옛길로 들어갔습니다첫눈과 서리를 맞아 하얗게 빛나는 길바닥의 돌들은 마치 흰 성벽 같았고그런 하얀색 길이 청록색의 차가운 호수를 끼고 고지로 쭉 이어져 있었습니다돌과 눈으로 이뤄진 고지를 둘러싼 봉우리들은 차갑고 선명하게 빛났고그 모습은 너무 아름다워 조금쯤 슬펐습니다어떤 경외심이 이내 제 안으로 흘러 들어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세상은 실존하며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코로나로 끊겼던 나의 오토바이 투어는 언제 다시 이어질까새벽 3시에 오토바이에 올라 어둠과 싸우며 달리던 베트남 하장 길Hà Giang Loop이 그립다빗속을 뚫고 달렸던 그 험난한 길에서 나는 아름다운 삶과 세상을 만났다그 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기억할까지금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임성순 작가의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 먼 길이라는 책으로 다시 오토바이 투어를 꿈꾸게 되었다오토바이 투어는 나약한 자신의 삶과 싸움이다부디 그 아름다운 싸움의 길이 하루빨리 열리길 소망한다그 길은 살아있음이며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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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의 이름은
조진주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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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의 이름은조진주 소설집 현대문학 남아 있는 이름은 무엇인가

 

남중국해와 오키나와沖縄에 걸쳐있던 장마전선이 북상했다. 오랫동안 오키나와를 할퀴었던 장마전선은 일본 열도를 할퀴고 한반도로 올라왔다. 이번 주말부터 작년보다 늦은 장마가 시작되었다. 작년에 길고 긴 장마로 많은 피해가 났는데, 올해 장마는 또 얼마나 삶과 세상을 파괴할까? 전선戰線의 군단軍團처럼 저벅저벅 몰려오는 장마전선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삶처럼 읽힌다. 장마에 삶과 세상은 밑바닥까지 젖는다.

 

현대문학에서 출간된 조진주의 다시 나의 이름은이라는 소설집을 읽었다. 이 소설집에 실린 9개 단편소설에 삶의 슬픔과 고통이 소용돌이친다. 삶의 슬픔과 고통은 장마전선처럼 피할 수 없는 어둠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 어둠 속에 떨고 있다. 어둠 속에서 작가는 삶의 슬픔과 고통을 밑바닥까지 겪고 들여다본다. 왜냐하면 작가는 삶의 슬픔과 고통을 끊임없이 느끼고, 그것들을 글로 써야하기 때문이다. 조진주 작가는 그 슬픔과 고통을 담담하게 겪고 단단한 문장으로 연주했다.

 

란딩구바안이라는 단편소설에서 정옥은 할머니 배달원이다. 추운 겨울날 그녀는 지하철에 올라 강남의 한 맞춤형 케이크를 중랑구 가정집까지 배달한다. 하지만 두 정거장을 앞두고 지하철이 고장 나서 정옥은 추위에 떨며 걸어서 배달한다. 좁은 길로 들어선 정옥에게 술 냄새를 풍기는 남자들 중에 갈색 머리가 큰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혹시 불 없어요. ?”

정옥은 못 들은 척 그 옆을 지나려 했다.

할머니, 왜 내 말 무시해요? 혹시 불 없어요?”

조용히 좀 해, 병신아.”

아니, 할머니가 내 말을 씹으시잖아. 할머니, 그거 들고 가는 거 케이크 맞죠? 요즘은 케이크 팔 때 성냥 같이 안 주나?”

미친 새끼.”

덩치 큰 남자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정옥은 케이크 상자를 슬며시 몸 옆쪽으로 감추고는 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 할머니. 내 말 안 들려요? 혹시 귀가 먹으신 건가?”

시끄러워, 새꺄.”

아니, 왜 다 나를 무시하냐? 이제 늙은 년도 나를 무시하네.”

 

삶은 이토록 너절하고 추하다. 살면서 누구나 이런 어두운 상황을 겪는다. 이런 어둠이 가속적으로 몰려온다. 정옥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결혼 후 출판사를 그만두고 번역 일을 맡아했다.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그녀는 생활비를 벌면서 아들을 키웠다. 남편과 사별 후 정옥은 30여 년 동안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보내며 생활을 꾸려 아들을 장가까지 보냈다. 이토록 아름다운 삶이 좁은 길에서 모욕당했다.

 

나의 이름은이라는 단편소설에서는 직업에 따라 이름이 바뀌는 삶을 말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소리를 하며 명창을 꿈꾸던 주화영은 국악 전문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소리는 취미 정도로 하고 무난한 삶을 원하던 부모의 기대와 달리 그녀는 명창이 되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주화영은 기울기 시작한 집안 사정과 맞물려 대학을 포기한다. 그녀는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아르바이트를 한다.

 

주화영이라는 이름은 레나로 바뀐다. 어느 중소기획 소속사에 들어가 펑키파니라는 혼성 크로스오버 밴드 보컬로 활동하게 된 주화영은 레나라는 활동명을 얻는다. 그룹이 해체되자 레나는 오디션을 보고 트로트 가수가 된다. 트로트 가수로서 얻은 이름이 연주황이다. 바뀌는 이름이 삶의 어둠처럼 읽힌다. 이제 남아 있는 이름은 무엇인가? 이 의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처음 이름을 얻었던 곳으로 간다.

 

단지 의문을 품었을 뿐입니다. 어째서 누군가는 그 존재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는 자기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것조차 알릴 수 없게 되는지요. 다른 이가 아닌 내가 이 세상에 있어야만 하는 정당한 까닭이 궁금했습니다. 그 명분을 얻기 위해 유일하고 불가변한 이름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나를 지칭했던 많은 이름들은 바다로 떨어진 빗방울처럼 수많은 이름들 가운데 쉽게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많은 이름들을 거치는 동안, 나는 점점 텅 비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그 답을 구하기 위해 내가 처음 이름을 얻었던 강원도로 떠났던 것이었습니다.”

 

연주황은 답을 구하지 못하고 죽는다. 그녀가 탄 버스가 집중호우로 갑자기 불어난 하천에 휩쓸려 다리 아래로 추락했다. 실종된 연주황은 결국 죽음을 당했다. 이름을 바꾸어가며 견디었던 삶이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처음 이름을 얻었던 곳으로 가는 길이 죽음의 길이 되고 말았다.

 

등단 후 쓴 당선 소감문에서 나는 조금 거창한 이야기를 했었다. 대충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글을 쓰면서도 의심스러웠다. 누군가를 온전히 안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때도 지금도 내가 그런 대단한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조금 아는 척을 해볼 뿐. 그러나 알아가고 싶은 마음만큼은 진심이다.”

 

다시 나의 이름은이라는 소설집은 조진주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은 잘못된 삶에 대한 답과 남아 있는 이름을 찾아가는 험한 길이 놓여있다. 누구나 답을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조진주 작가의 소설은 그 길 위에서 담대하게 견디고 싸우는 힘을 준다.

 

주말에 많은 장맛비를 뿌리고 남하했던 장마전선이 남부지방을 할퀴었다. 집이 무너지고 삶이 파괴되었다. 그 어둠의 장마전선이 북상하여 억수로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분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빗방울이 튄다. 삶과 세상에 걸쳐있는 어두운 장마전선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것에 맞설 것인가, 아니면 물러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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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우리에게 두 개의 콩팥을 주었다
류정호 지음 / 파람북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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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우리에게 두 개의 콩팥을 주었다류정호 지음

 

K가 아침부터 외출준비를 한다. 폭설 뒤에 닥친 강추위가 K의 아픈 허리가 공격했다. K3년 전에 부러진 허리 수술을 받았다. 그 후로 지금까지 K는 허리 통증을 견뎌내고 있다. 걸을 때 허리 통증이 무릎에 무리하게 힘을 주어, 이제는 다리도 아프다. K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서 버스정류장까지 걷는다. 겨울의 끝에서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류정호님이 쓴 신은 우리에게 두 개의 콩팥을 주었다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저자가 당뇨병으로 신장(콩팥)이 나쁜 남편에게 신장을 이식하며 겪은 고통을 쓴 책이다. 이 책에 있는 혼인서약을 천천히 읽었다.

 

나는 당신을 남편으로, 아내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수십 년을 화성과 금성에서 따로 살아온 남자와 여자가 만나 다시 수십 년을 갈등하며 인내를 배웠고, 인내는 수행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익혀온 수행은 끝내 희망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부부는 충돌과 갈등 속에서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우리 부부가 내어주고 받아들던 순간들이 35년 세월의 강을 이루었다.”

 

푸르던 5, K와 나의 결혼식 주례 선생님은 고향 중학교 은사였다. 그 분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 믿고 존경하며 살아야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느덧 26년이라는 흘러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었다. 우리의 혼인을 지켜보시던 은사님과 두 분 어머님 모두 이제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세월은 이토록 빠르고 허무하다. 이제 누가 우리의 남은 삶을 지켜볼까. 하나 뿐인 자식도 멀고 먼 타국에 있다. 삶은 그저 슬프다.

 

결혼 3년 만에 성조에게 당뇨병이 생겼다. 당뇨병은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걸리는 부자병이고 아주 무서운 병이라고 스쳐 듣기만 했던 생소한 병명이었다. 금쪽같은 막내딸을 시집보내고 걱정 없이 살기를 바라며 새벽마다 기도하던 엄마에게 막내 사위의 당뇨병 소식은 벽력과 같았다. 당뇨병은 엄마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죽을병이었다.”

 

당뇨병은 오랫동안 삶을 괴롭혔다. 혈당이 정상 수치보다 높은 당뇨병은 합병증으로 이어진다. 당뇨병으로 혈압이 높아지고, 급기야 신장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망가진 신장으로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하고, 무엇보다도 신장 이식을 받아야만 한다. 결국 류정호님은 남편에게 신장을 이식한다.


혈연의 관계가 아닌 부부에게는 여러 변수가 있어 이식의 절차가 순조롭지 않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이식 전 1차 검사에서 혈액형에 문제가 없었고, 유전자 교차반응 검사도 음성 판정으로 이식 가능의 문을 열었다. 결혼 35년 만에 하늘이 정해준 천생연분임을 확인한 것이다. 천생연분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과학적으로 확인하는 부부가 얼마나 되겠나. 우리 부부는 이식수술 후에 비로소 일심동체를 이룰 것이고, 끝내 동병상련의 길을 함께 걸어갈 천생연분이다.”

 

강추위를 뚫고 달려온 버스에 K와 함께 오른다. 마침 비어 있는 노약석에 K를 앉히고 엉거주춤 서서 천변을 달리는 차창을 본다. 겨울의 밑바닥을 견뎌내고 있는 플라타너스의 앙상한 가지 뒤로 우중충한 내부순환도로가 뻗어있다. 서로 모르는 사람이 만나 인연을 이루고, 천생연분 부부가 되었다. 세월의 세찬 강물이 삶 속으로 거칠게 흘러갔고, 삶은 늙고 병들고 말았다. 허리가 아픈 K를 위해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다. 차창으로 잿빛의 병원이 다가왔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신장을 이식한 후 류정호님은 온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을 겪는다. 그것은 남편의 삶을 위한 죽음의 고통이다. 믿음으로 고통을 견뎌낸다. 사랑하는 남편의 병든 몸이 내 몸이기에, 신장을 이식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 죽음을, 고통을 극복하게 한다.

 

버스에서 내려 K의 손을 잡고 병원까지 걷는다. 매서운 바람이 삶을 후려친다. 우리의 푸르던 봄은 멀리 지나갔다. 이제는 눈보라치는 삶의 겨울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병원 안은 따뜻했다. 물리치료실까지 K를 데려다주고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우리에게 남은 사랑으로 고통을 겨울을 견뎌내야 한다. 사랑이 있으면 겨울도 언제나 봄이다.

 

     류정호

 

복사꽃 피고

앵도꽃 피고

박새,

우짖는 봄바람에

복사꽃 지고

앵도꽃 지는데

 

사람아,아픈 상처 하나 있어

사는 일에 꽃 한 송이 피어남을 알지니

이 봄

슬픈 병 하나라도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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