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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의 초대 - 뜻밖의 생각
민이언 지음 / 미드나잇인 / 2025년 12월
평점 :

‘뜻밖의 생각’ 『철학으로의 초대』 민이언 지음 – 흐르는 삶과 죽음
출근길 버스 차창으로 어둠이 흐른다. 삶과 어두운 세상이 흐른다. 오늘따라 출근버스는 히터를 세게 틀어놓고 달린다. 벌벌 떨던 새벽의 추위가 멀어졌다. 홍제동 유진상가 정류장에서 양손에 지팡이를 잡은 할머니를 뒤따라 승객들이 우르르 버스에 오른다. 이 춥고 어두운 새벽에 할머니와 승객들은 어디로 가시는가. 검은 배낭을 짊어진 남자가 내 옆에 앉자마다 스마트폰으로 태국 단어를 공부한다. 앞에 앉은 여인은 금융 앱을 열고 생활비를 계산한다. ‘고정지출’ 이란 제목 아래 내역과 금액이 흐릿하게 보인다. 다른 삶과 세상에 눈길을 멈추고 내 일을 하자는 생각에, 나는 ‘뜻밖의 생각’ 『철학으로의 초대』이라는 책을 꺼내 읽는다. ‘관성으로부터의 자유’라는 프롤로그‘에 이런 명언이 있다.
“벽돌집을 짓지 말라!”
징기스칸의 유언으로 알려져 있는 이 한 마디가 결국엔 들뢰즈의 철학서사인 ‘노마드’다. 타성으로부터 탈주하고 관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언어로 잇대자면 벽돌집을 짓는 목적은 ‘사유’에 해당하며, 벽돌은 사물의 본성이 공간으로 뻗어 나온 ‘연장’이다.
현대 철학의 가장 대중적인 키워드이기도 한 ‘노마드’의 스펙트럼을 ‘유목’의 번역으로 좁힐 필요는 없다. 충분히 여행의 모티브로 나아갈 수 있는 사유방식이다. 일상으로 벗어나 스스로 낯설음에 뛰어드는 탈주를 통해, 관성으로 흘러가고 있던 일상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관성 앞에 가로 놓이는 우연들의 배열 속에서 ‘이전의 나’와 차이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런 사유방식으로 발전을 ‘반복’하는 생활체계가, 다른 날들과 변별되는 ‘차이’의 자아정체성으로 순환한다.
세검정을 지나자 장애인석에 앉은 할머니가 지팡이로 하차 벨을 누른다. 겨울 방한복 모자와 마스크로 머리와 얼굴을 감싼 할머니가 버스에서 내리고, 또 다른 승객들이 버스에 오른다. 버스에서 내린 할머니는 세검정 초등학교 정류장에 서있고, 파란 버스는 북한산 자락을 달린다. 어머니가 살아계시면 저 할머니 연세쯤 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계셔도 되는 삶인데, 죽음이 다가왔다. 내게도 이제 죽음은 남아있는 삶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서있다. 요즈음엔 자꾸 몸에 통증이 일어나서 날뛴다. 몇 년 전부터 두 무릎이 쑤셔오더니, 한 달 전에 목과 어깨가 아프고 팔이 저려왔다. 매주 두 번 이상 한의원에 가서 침으로 통증을 다스린다. 지난주부터 엉덩이뼈가 아파 의자에 앉아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부랴부랴 달려간 한의원에서 목에서 엉덩이까지 침을 맞았다. 죽음 같은 슬픔과 고통이 흐른다.
민이언이 쓴 『철학으로의 초대』이라는 책에서도 죽음은 사유된다. 죽음은 무無다. 탈북한 주민들, 고통의 사람들을 소설로 묘사한 어느 재미 디아스포라 작가는 죽음 앞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언제 어디서 내 죽음이 다가올까? 죽음 앞에 부끄러운 나는 언제 어디서 죽음으로 걸어갈까?
저 너머의 시간에 뭐가 있는지 누구도 말해줄 수가 없다.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죽어 있고, 죽음을 경험했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뭘 겪고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도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 저 너머의 시간에 뭐가 있든 간에 죽음은 최강의 불안으로 자리해 이 삶을 관장한다.
실존의 계보들에게서 죽음이 큰 주제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유한함 속에서 삶의 의미가 발견된다. 불완의 존재로서 맞이할 수 밖에 없는 끝이, 도리어 적극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무한의 동력이다. 단 한 번이기에 누구에게나 소중할 수밖에 없는 삶의 시간, 그것이 삶의 대척에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죽음의 기능이다.
북한산 자락을 달리는 버스가 북악터널에 널름 삼켜진다. 터널을 밝히는 불빛 속에서 어둠이 흐른다. 지난주에 버스로 달렸던 태백의 어둠이 흐른다. 역전에서 잡아탄 버스 차창으로 태백의 밤거리가 흘러갔다.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은 도로변의 많은 집에서 불빛조차 비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거리는 어둠의 밑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죽음의 집들은 도시의 끝자락까지 이어졌다가 뚝 끊어졌다. 석탄을 캐던 역동적인 삶들은 오래전에 죽음의 저편으로 돌아갔고, 몇 개 남은 탄광도 끝내 문을 닫았다. 폐광촌에 내리자마자 어릴 때 겨울처럼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쳤다. 이토록 춥고 어두운 곳에 왜 다시 왔는지 알 수가 없다고 K가 투덜댔다. 삶들이 죽음으로 흘러간 어두운 고향에 다시 온 이유가 있을까. 부모와 함께 살았던 어제의 시공간이 이토록 잊히지 않는가. 검은 산등성이 위로 초생달이 흐릿하다.
시간 앞에서 이런 항상성은 지속하는 것이 현상유지를 뜻하지는 않는다. 시간을 강물에 비유하자면, 흐름에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항상 일정한 속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지속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죽은 것들만 떠내려간다. 어제의 관성을 유지하는 오늘이라면, 쇠락의 방향으로 떠내려가고 있는, 그 또한 결국엔 어제일 뿐이다. 내일은 저절로 도래하는 시간이 아니다. 어제의 지점으로부터 계속 앞으로 나아갈 때야 비로소 마주칠 수 있다.
북악터널을 빠져나온 버스가 K정류장에 가까워지자 내 옆의 남자가 스마트폰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는 태국어를 공부할까. 모국어의 뿌리에서 떠나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삶과 세상의 운동이다. 경계를 넘는 운동이 고향이라는 곳을 잊고 사라지게 하지 않을까. 고향이라는 곳도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지는 생성되는 공간이다. 그 어디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 고향이다. 검은 배낭의 남자가 차창으로 멀어졌다. 고정 지출을 계산하던 여인은 이제 수입을 계산한다. 수입 항목이 지출 항목보다 적다. 대추나무에 대추처럼 여기저기 달렸던 내 빚으로 괴로웠던 어제가 차창으로 다가왔다 멀어졌다. 빚으로 고통을 당했지만 그때는 사랑이 숨 쉬고 있었다. 사랑을 잃은 이제는 과거보다 더 고통을 맛본다. 슬픔도 깊고 길다. Y오거리 정류장에서 내릴 때까지 여인의 계산은 끝나지 않는다. 정릉천변을 따라 사무실로 걸어가는 길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