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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평점 :
지구는 열심히 돌고, 해는 매일 진다. 해가 지기에 매일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해가 높이 떠 있는 동안 하늘엔 구름이 있거나 없거나 할 뿐이지만 해가 저물어 갈 때에는 하늘은 온갖 색으로 물들며 변해가다가 어두워진다.
주인공 가즈코는 귀족가문의 딸이지만, 이혼을 하고 친정에 돌아온 상태이며 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전쟁이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가즈코는 자신의 어머니가 진짜 귀족이라고 생각한다. 예의범절에 맞게 행동하지 않아도, 심지어 수풀에 들어가 오줌을 싸는 것마저도 귀엽고 순수한 어머니는 ‘진짜‘라고 생각하는 가즈코 때문에 책의 초반에 나는 웃음이 터지곤 했었다. 성인에게 기대되지 않는 귀여움이나 순수함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귀족다움으로 생각하는 가즈코가 웃겼다.
우리는 보통 성인에게서, 심지어 귀족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고고하거나, 법도가 있거나, 지혜롭거나, 아름답거나 하는 것들, 보통 사람들이 가지기 어려우며 그래서 가지고 싶어 하는 것들을 기대한다.
하지만 그런것들 대신, 가즈코의 어머니가 귀여움과 순수함을 지닌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녀가 진짜 ‘귀족‘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과관계가 뒤바뀐 것 같지 않은가? 어머니는 그런 삶을 추구하고 고민한 결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진짜 귀족에게는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셈할 줄 모르는 인간으로 살아도 괜찮을 정도로. 하지만 가짜 귀족일 지 모르는 가즈코 역시 어머니에게 말하는 걸 보면 어머니와 별반 다르지 않다. ˝돈이 뭐에요? 가난이 뭔가요? 난 모르겠어요. 애정을, 오직 어머니의 애정만을 난 믿고 살아왔어요.˝ 라고 말하는 가즈코는 똑같은 삶의 방식을 배워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 어머니는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이제 해는 저물고 어둠이 오고 있다. 그녀와 어머니가 생각해오지 않았던 것. 이제 해는 지고, 밤은 뱀처럼 다가와서 어머니를 데려갔다.
혼란스러운 변화속에서도 가즈코는 혁명을 결심한다. 세상이 인정 하거나 말거나 자기의 생각대로 행동하기로 하는 혁명. 그 생각이 내 마음에 드는지는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고, 그 이후에 가즈코가 어떻게 살아남았을지 모르겠지만 가즈코는 하나의 껍질을 깼다.
사양은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 실패 후에 세상과 타협하고 글을 쓰며 살기로 한 이후의 작품인 만큼, 문학에 빠지고 술과 마약에 취해 살다 자살한 동생 나오지는 아마 작가 자신을 투영한 인물일 것이다. 그에 비해 가즈코는 자기보다 더 억세게 버틴 사람, 이혼이나 부모와 재산의 상실을 겪으면서도 죽음 대신 삶을 그렸던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을 그리고자 한 것 같다. 그래서 사양과 인간실격 모두를 좋아하는 것이란 어려운 일 일것같다. 둘은 한 쪽이 죽지 않으면 다른 쪽은 살아 있을 수 없는 두개의 다른 자아가 쓴 글이다. 그래서 나는 결국 가즈코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내게는 그렇게 삶을 긍정하며 버티는 것이, 그래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무조건 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물로서의 주어진 의무를 의심하는 나는 다만 회의도 하지만 유보를 하며 목숨을 이어갈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