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첫번째 시가 좋은 것일까?
이유도 없이 슬퍼졌다.

아니 나는 그런 작은 행성에 살지 않아서 슬펐다.
이 커다란 행성에 사는데도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를 해 줄 사람이 없어서, 그래서 싱거운 손사래를 칠 수 없어서, 대신 내 앞에는 헤엄쳐도 건너 갈 수 없는 바다가 있어서 슬펐다.

소행성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의자만 뒤로 계속 물리면 하루종일 석양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너와 나는 이 별의 반대편에 집을 짓고 산다.
내가 밤이면 너는 낮이어서
내가 캄캄하면 너는 환해서
우리의 눈동자는 조금씩 희미해지거나 짙어졌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적도까지 몇 발자국이면 걸어갈 수 있다.
금방 입었던 털외투를 다시 벗어 손에 걸고 적도를 지날 때
우리의 살갖은 급격히 뜨거워지고 또 금세 얼어붙는다.
우리는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나는 네게 하루에 하나씩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네가 못 보고 지나친 유성에 대해
행성의 반대편에만 잠시 들렀다가 떠난 외계인들에 대해,
너는 거짓말하지 마, 라며 손사래를 친다.

바다가 있으면 좋겠다.
너와 나 사이에
너에게 한없이 헤엄쳐갈 수 있는 바다가
간간이 파도가 높아서 포기해버리고 싶은 바다가.

우리는 금세 등을 맞대고 있다가도 조금씩 가까워지려는 입술이 된다.

지구의 둘레만큼 긴 칼로 사람을 찌른다고 해서 죄책감이 사라질까.
죄책감은 칼의 길이에 비례하는 것일까.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네 꿈속의 유일한 등장인물은 나.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의 지나간 죄에 밑줄을 긋는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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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시

오후 네시


어느 날
마음이 먼저 죽는 날이 올 거다

(중략)

믿음도 연습이야
그 단 한 마디에 구원을 버린 적이 있다

그러니까 어느 날
무언가 먼저 죽는 날이 올 거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 있어서 유능할 것이다

몸의 착각으로 만들어진 마음이 있는 것처럼
오늘도 오후 네시가 지나간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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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빵터졌다. 이탈리아는 어떻게 칼비노와 보파를 모두 가졌지?

"아빠는 어땠어요?"
난 엄마에게 물었다.
"바삭바삭하고 약간 짭짤한 데다 섬유소도 풍부했지."
"엄마가 아빠를 먹기 전에 어땠느냐고요."
"불안하고 위태롭고 신경질적인 유형이었어. 너희 수컷들이 다그렇듯 말이야, 비스코."
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빠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깝게 느껴졌다.
엄마가 나를 임신한 동안 엄마의 위 속에서 소화되어 버린 그 아빠가 말이다. 난 아빠에게서 애정이 아닌 양분을 받았다. 나는 ‘고마워 아빠. 하고 생각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게 사마귀에게 무얼 뜻하는지 나는 안다.
나는 아빠의 무덤 앞에서, 다시 말해 엄마 앞에서 잠깐 명상에 잠기면서 찬송가를 읊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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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각이다. 배세진 - 동학개미, 어떻게 볼 것인가

내가 노동자의 주식투자에 제동을 거는 것은 ‘땀 흘려 노동해 번 돈이 정직하고 선한 것‘이라는 도덕주의적 비판도 아니고, 노동자가 비대칭적 정보 권력관계 속에서 주식투자에 성공할 가능성이 낮아 ‘패가망신‘할 수 있으니 ‘헛꿈‘ 꾸지 말라는 조언도 아니다. 너무 힘들다는 문자를 남기고 과로사한 택배노동자, 비닐하우스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이주노동자, 코로나19로 실직한 뒤 생활고로 극단적 선택을 한 항공사 승무원, 바닥으로 떨어진 노동의 권리와 오늘도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는 코스피 지수는 화폐라는 매개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노동자가 주식을 함으로써 자본의 파트너가 되면 자본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내가 나의 소득을 주식에 넣는 만큼, 그러니까 동학개미가 힘을 모아 주식시장을 부양하는 그 화폐의 양만큼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를 자본에 양도하게 되고, 노동자가 노동을 통해 정당한 임금을 받아 낼 수 있는 힘, 일터에서 자본가의 부당한 폭력에 저항할 힘은 줄어든다. 도덕주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경제학적, 정치철학적인 관점에서 내가 주식에 넣은 돈만큼 노동자로서의 내 권리가 줄어든다. 이것은 화폐를 매개로 하나의 논리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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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너무 좋다 ㅠㅠ

마르코발도는 도시 생활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은 눈(目)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고안된 간판이나 신호등, 진열장, 휘황한 네온사인, 포스터는 사막의 모래 위를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의 시선을 전혀 끌지 못했다. 하지만 나뭇가지 위에서 노랗게 물드는 나뭇잎, 기왓장 끝에 매달린 깃털은 절대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말 잔등에 앉은 등에 한 마리, 탁자에 좀이 쏠아 생긴 작은 구멍, 보도 위에 으깨진 무화과 껍질 하나도 마르코발도는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사색의 대상으로 계절의 변화, 영혼의 욕망들, 존재의 초라함을 깨닫게 해 주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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