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일본의 알몸을 훔쳐보다 1.2 세트 - 전2권
시미즈 이사오 지음, 한일비교문화연구센터 옮김 / 어문학사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일본은 근대화, 서양화를 택하면서, 결정적으로 메이지 유신을 통해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월등한 국력을 성취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아시아적 정체성을 획득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일면에 있어서는 그러한 정체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시아 국가이지만 아시아 국가가 아닌 일본의 모습... 물론 이후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근대화의 길을 걸어가지만,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빠르게, 가장 적극적으로 서구화를 채택한 일본의 선택은 참으로 신기해보일 따름입니다. 섬이라는 지역적 특징에서 오는 개방성, 사무라이 문화의 순발력으로으로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이죠. 아마도 이런 일본의 모습은 서양인에게 더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이 책에서 소개된 프랑스인 풍자화가 조르주 비고의 풍속화를 통해서 서양인이 느꼈을 그러한 생경함을 다소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조르주 비고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18년간이나 일본에 체류하면서 당대의 일본을 속속들이 그려낸 일본통입니다. 당대 유럽에서 유행했던 화풍, 특히 우키요에에 경도된 많은 다른 화가들처럼 그 역시 보다 본격적으로 일본의 그림 기법을 배워보고자 하는 욕심에 일본행을 택한 화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의 만화들이 일본 내에서 적잖은 호응을 얻으면서 1882년부터 1899년까지 무려 18년을 일본에 체류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 결과 그의 풍속화들은 근대화를 겪는 일본의 명암을 일본적이면서도 일본적이지 않게 담아내는 데 성공해냈습니다. 그의 귀국 이후 그의 풍속화들은 오랜 시간 묻혀져있었는데, 시미즈 이사오라는 이가 관심을 가지고 다시 선별 편집하여 주석을 붙여 펴낸 것이 이 책입니다. 


2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1권은 주로 민중의 생활상을 다룬 풍속화를, 2권에서는 좀 더 정치적 풍자가 강하게 드러나는 캐리커쳐들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서구적, 프랑스적 시각과 동양인에 대한 비웃음이 엿보여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당대 일본인의 생활상을 순간적으로 캡쳐하듯 담아내는 비고의 능력 쪽이 놀랍게 다가옵니다. 병사나 하녀, 창부의 모습을 가감없이 솔직하게 담아내는 그의 그림이 서구화에 목을 맸던 당대 일본의 입장에서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특히 2권에서 다룬 캐리커쳐들은 독일화를 택한 일본에 대한 (프랑스인 화가로써의?) 불만이 노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검열을 받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 그의 그림이기에 현재에 와서 더 큰 역사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주는 것 같네요. 특히 편집인인 시미즈 이사오는 최대한 편견 없이 유쾌한 주석을 붙여내어 생경한 당대 일본 생활상을 즐겁게 읽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일본인으로써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부분에서조차 대인배적인 면모를 보여주어 존경스럽기까지 하네요^^ 


우습기도 하고 감탄스럽기도 한 그림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만, 한편의 그림이 기억에 남네요. 한손에는 양산, 다른 한손에는 부채를 든, 그리고 양복 정장을 입었으나 더위를 참지 못해 바지를 벗고 훈도시를 드러낸 한 청년의 그림입니다. 서양식 복장과 훈도시의 복장이 강렬하게 대조되는데다, 우스꽝스러운 청년의 표정이 인상에 강하게 남았나봅니다. 이 청년의 모습이 비고가 본 일본의 모습일 것입니다. 서구화 열풍 속에서 전통과 서구문명이 혼재되어 있는, 서구인보다 더 서구적이기를 원하지만 결국 일순간에 일본인으로써의 전통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지요. 현실적인 이유로 피할 수 없기에 선택한 서구화였지만, 그 과정에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어야 했던 일본인의 아픔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 서구화가 제국주의로 이어졌기에 마냥 동정만 할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결국 우리나라를 포함한 다른 모든 동양권 국가가 서구화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점을 감안해보면 역사의 흐름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자비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네요. 언제나 역사의 중심에 자리잡고 앉은 약육강식의 원리 안에서 공존공영을 찾는 것은 단지 위선 혹은 오만인 것일까요, 아니면 아직까지 우리가 알아내지 못한 역사적 당위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인간적 노력인 것일까요? 신자유주의라는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의 유령이 횡행하는 요즘,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아직 역사는 믿을만한 것이라고, 알만한 것이라고 이야기해주는 책이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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