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을 처음 만났던 건 기나긴 장편 속에서였다. 그래서인지 단편으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오래간만에 만난 동창처럼 머쓱하니 다가갈 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그는 경쾌하고 날렵한 이야기꾼이며, 군데군데 그의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그의 사소한 말 한 마디가 내 뇌리의 고리에 턱하고 걸려드는 기쁨은 여전했다. (물론 시기 상 그의 단편이 내가 읽었던 장편보다 먼저 쓰여졌다.)
아무것도 아닌 문장에 마음이 쓰일 수 있다는 것에 그가 새삼 또 멋져보이기도 했다. (빨간 책방 다운받아놓고 한 달째 못 듣고 있다.)
하지만 내가 장편을 좋아하는 것에는 어쩔 수 없는 취향이라는 게 있기 때문인 듯 하다. 장편에는 그 세계에 오롯이 빠져들 수 있을 뿐더러, 단편과 달리 그 깊이와 너비 같은 것들이 나를 둘러싼다. 어쩌면 그저 `그`가 누군지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삶을 들여다볼 수 있고, 그래서 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게 요즘 단편엔 없는 것 같다.
언제나 이질적이고, 불쾌감을 주고, 독자가 그 안에 다가가 함께 몸을 뉘일 공간이 없는 비공감의 공간.
삶이 변하고, 소설도 변했다.
언제나 삶의 뒤만 쫓던 소설이 이제는
이 현실이 못 해주는 것을 했음 싶다.
이미 충분히 뒤쫓고 드러내고 재창조 해냈으니,
이제는 삶이 지향할 목적지를 보여줬음 싶다.
구체적인 전망이 아니라,
단지 바람뿐이더라도.
목이 마른 이에게 달디 단 한 모금의 물이 소설이기를.
언제쯤 그게 바뀔까,
그게 아니라면 언제쯤 나는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게 될까
종종 마른 낙엽 뒤로 한 두 방울 후두둑 떨어지는, 미처 떨어지지 못했던 빗방울 처럼
뜻밖의 갈증을 해소할 빈 자리를 단편에서 찾곤 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지만,
건넌 마을의 절이 내 맘에선 제일 좋다지만,
그래도 괜히 들여다보고싶은 마음이랄까.
이젠 post-의 시대에서 그만 벗어나고post-싶다.